11. 약속
수학여행에서 미영이의 마음을 확인 한 후, 나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시간들이 지속되었다. 당시에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그 행복의 터널은 수학여행에서, 수학여행을 갔다 온 후 처음으로 같이 보낸 주말로, 그리고 어린이 날로 이어졌다. 수학여행에서 있었던 그 일로 인해 나와 미영간의 친밀도는 단숨에 높아졌다. 금요일 날 수학여행이 끝나고 난 후 토요일에는 수학여행의 뒤풀이로 성현이네 집에서 친구들과 모임이 있었고, 그때 나와 미영은 갑자기 높아진 애정표현으로 아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우리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성현이의 집으로 들어갔으며, 아주 자연스럽게 오래된 연인처럼 서로를 챙겨주었다. 사실 그전까지 연애경험이 없던 내가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5월 5일, 나는 미영과 유원지에 놀러가고 싶었지만 모범생인 그녀는 다른 제안을 하였다.
“다음주면 중간고사 기간인데 공부해야 되잖아. 우리 같이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자.”
아쉬움이 남았지만 미영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나는 그녀의 제안을 승낙하였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맑은 공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는 집에서 약간 거리가 멀리 떨어진 구립도서관에서 공부하기로 했는데, 집 근처에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을 그녀의 부모님에게 들켜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무척 완고한 분들이었고, 그녀의 성적에 관해서는 특히 민감했기 때문에 남자친구하고 사귄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전혀 엄두도 안 나는 일이라고 그녀는 말하였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서 연애를 한다는 점과 좋아하는 사람과 버스를 타고 평소에 지내던 곳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나는 마치 밀월 여행인 것 같은 스릴을 느끼었다.
구립도서관은 단독주택이 있는 주택가에 있었다. 아파트 단지처럼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고, 5월 5일 이었기 때문에 가족 단위의 사람들은 보통 유원지나 동물원으로 놀러 갔기 때문에 거리는 한산하였고, 도서관도 인적이 드물었다. 도서관은 5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설립목적은 구주민의 독서를 권장하고, 교양을 증진시킨다는 것이었지만 보통 독서실보다는 열람실에 사람이 더 많았다. 건물의 1층은 어린이 도서관이었고, 2층은 남자 열람실, 3층은 여자 열람실, 4층과 5층에는 각기 사무실과 자료실이 있었다. 우리는 도서관 건물 앞에 있는 벤치에서 잠시 노닥거리다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각각의 열람실로 향하였다.
여자친구와 같이 와서 무슨 공부를 하냐 생각할 수 도 있지만 당시 난 아주 열심히 집중해서 공부를 하였다. 미영과 나의 성적차이가 너무나 많이 났기 때문에 약간 열등감에 빠져 있던 나는 될 수 있으면 미영을 따라잡고 싶다고, 그렇게 해야만 미영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눈을 부릅뜨고 공부했는데 목표를 하나로 정하고 공부를 하니 공부가 지루하지도 않고 평소에 어려웠던 문제들도 술술 잘 풀려서 기분 좋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꼬박 4시간을 화장실도 안가고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한 후 약속대로 난 자리에서 일어나서 지하로 향하였다. 도서관의 지하에는 작은 식당과 매점이 있었는데, 점심을 미영과 같이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때 공부는 잘되니?”
먼저 와 나를 기다리고 있던 미영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였다.
“응, 아주 잘 되는데. 사실 난 독서실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제까지 집에서만 공부를 했거든. 그런데 환경도 바뀌고 모두 열심히 공부하는 틈에서 공부하니 딴청도 안 부리게 되고 아주 좋은걸.”
“그래, 그럼 잘되었네 앞으로 자주 같이 이곳에 와서 공부하자.”
“좋아! 님도 보고, 성적도 좋아지고 일석이조네.”
나는 미영에게 앞으로도 계속 딴청 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하기도 약속하였다. 우리는 김밥과 우동을 시켜 나눠먹으면서, 서로에게 시험범위 중 모르는 부분을 물어보기도 하고 ? 주로 내가 미영에게 물어 본 것이지만 ? 잡담도 하면서 즐겁게 점심시간을 보내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자판기 커피를 뽑아서 1층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쬐었다. 5월의 햇살은 마치 갓 세탁을 마친 솜이불처럼 포근하였고, 달콤한 밀크커피는 내가 그때까지 마셔본 어떤 커피보다도 감미로웠다. 주변은 너무나 고요해서 세상에는 마치 나와 미영만이 존재하는 듯 했다. 우리는 도심의 한가운데서 이지러진 시간과 공간 속 호수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그러다, 미영과 나는 한가지 약속을 했다.
“우리 시험 끝나는 날 놀이공원에 놀러 가자.”
내가 말하자,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 마지막 날 2시에 시계탑에서 보는 거야.”
우리는 이렇게 약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