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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DUST (5)

리플리 |2005.12.02 00:20
조회 120 |추천 0

 

 

 

 

 

 


                                                                    입술과 혀


  


  
   그들이 나타나리라 예상되던 날 나는 저녁 8시쯤 '미스티'를 찾았다.  푸조를 비좁은 주차장 한 귀퉁이에 대고 술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러나 두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눈에 띄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재즈바 '미스티'의 단골 손님이었다.  별 일 없으면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들러 술 한 잔씩 하곤 했던 것이다.
   냇 킹 콜의 허스키 보이스가 실내에 감미롭게 흐르고 있었다.  손님은 많지 않았고, 그래서 재즈 곡들을 감상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였다.  테이블 세 개를 아베크족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평범한 양복 차림의 사내 두 명이 바텐더를 보고 마주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냥 갈 것이냐, 아니면 기다릴 것이냐.
   나는 30분쯤 기다리기로 했다.  왜냐면 반드시 그들이 나타날 것 같았기 때문에.  새로 일주일이 시작된 이래 두 사람은 내 기대와 달리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내리 다른 곳에서 저녁 시간을 보냈었다.  때문에 해외로 출국하지 않는 한 그들은 이번 금요일에는 꼭 '미스티'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실내 한 구석의 빈 테이블에 앉아 칵테일로 목을 축이며 묵묵히 올드팝에 귀를 기울였다.
   이 곡의 제목이 뭐더라.  시가 케이스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이며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맞아.  호기 카마이클이 작곡했다던 바로 그 노래로군. 
   1927년이던가, 어느 여름날 밤 카마이클이 긴 객지 생활 끝에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지난 날 사랑했던, 그러나 이젠 남의 아내가 되고 만 옛 애인을 회상하며 밤하늘을 쓸쓸히 바라보다가 만들었다던 그 명곡이었다.  
   나도 모르게 멜랑콜리한 분위기에 뉘엿뉘엿 빠져들 무렵이었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한 쌍의 남녀가 다정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실내를 가로질러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의 옆 자리로 왔는데, 문득 남자 손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쪽으로 걸어왔다.
  
 

   "실례합니다만, 혹시....."
   "....."
   "역시 내 눈이 정확하군. 십여 일 전 워커힐까지 태워다주셨던 분 맞죠?"


   내가 짐짓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자 사내는 반갑다는 듯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기억 안나쇼?  얼마 전 올림픽대로에서 거지 하나를 차에 태워줬잖소.  그 거지가 바로 나요.  갖고 계신 차가 푸조 맞죠?  어쩐지 밖에 푸조가 한 대 보이길래 어디서 많이 본 차다, 생각했지.  반갑시다.  나 박준섭이요."

 

   엉거주춤 내민 손을 그는 힘주어 꽉 잡더니 마구 흔들면서 여자 쪽을 보았다.

 

   "미미.  이리 와봐."

 

   여자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선그라스를 벗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과연 미미였다.  처음 학교 앞에서 보았을 때처럼 그녀는 여전히 긴 생머리였다.  그녀는 선그라스를 이마 위로 맵시있게 올렸다.

 

   "인사해.  왜 있잖아,  지난번 우리가 쉐라톤 워커힐에서 만났을 때 내가 차사고 났었다고 했었지?  그때 나를 태워다준 사람이야."

 

   두 사람은 내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맞은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준섭이 말했다. 

 

   "인사해요.  이쪽은 내 걸프렌드."

 

   다리를 포개고 앉은 채 담배연기를 후우, 내 얼굴 쪽으로 내뿜으며 미미는 한 손을 내밀었다.

 

   "미미라고 해요."
   "백성민입니다."

 

   손은 작았으나 손가락이 긴 편이었다.  그리고 손바닥 살결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마주잡은 손을 놓을 즈음 미미는 내 얼굴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어디서 한 번 뵌 듯 한 데,  기억이 통 나질 않네."

 

   하지만 느낌으로써랄까,  그녀는 나와 마주친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면서도 일부러 준섭을 의식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 같았다.  나는 모른 체하기로 마음 먹었다.

 

   "듣자니 차를 기막히게 모신다고 그러던데.....혹시 프로?"
   "아마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때 준섭이 끼어들었다.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  내가 보기엔 진짜였다구.  오죽하면 그날 내가 바지를 다 갈아입었겠어."

 

   준섭이 낄낄거리자 미미는 곱게 눈을 흘겼다.

 

   "정말이야.  난 그날 진짜 한강 다리 위에서 죽는 줄로만 알았다구.  이제서야 말이지만,  바지를 갈아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찔끔 한 것만은 사실이야."  

 

   종업원이 다가왔다.  미미와 준섭은 제각기 좋아하는 칵테일을 주문했고,  나도 마시던 것으로 재차 주문했다.  술이 왔을 때 달착지근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미미는 내 잔을 보며 물었다.

 

   "그게 뭐죠?"
   "블랙 러시안."
   "제가 딱 한 모금만 마셔도 될까요?"
  


   나는 말없이 잔을 건네주었다.  미미는 글라스에 담긴 얼음을 갈색의 술에 섞어 흔들더니 한 모금 살짝 맛보았다.  그러더니 제법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모금, 세 모금 마셨다.  준섭이 위스키 더블을 단숨에 쭈욱 들이켜더니 말했다.

 

   "나도 우리 그룹에선 카매니아로 이름깨나 알려진 편인데, 지난번 백형의 솜씨를 보곤 솔직히 존심에 기스 났수.  아니, 그날 백형의 옆자리에서 내심 놀라자빠진 내 자신이 싫어졌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지.  그래,  정말 나 자존심 상했어."  

 

   미미를 보며 한 손의 검지와 장지로 사인을 보내자 그녀는 피우던 담배를 준섭의 손에 넘겼다.  미미가 블랙러시안을 빨며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뭐야?  한 번 붙어보겠다고?"
 


   의중을 찔린 듯 준섭은 내 얼굴을 힐끗 보며 히죽 웃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겨, 웨이터를 불러 칵테일을 한 잔 더 주문했다.  블랙러시안은 곧 내 앞에 놓여졌다.

 

   "좋지.  하지만 차종이 다른데 게임이 되겠어?  중고 푸조한테 포르셰는 너무 부담스러울 거야."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엷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상대가 모멸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렇죠?  역시 무리겠지요?"

 

   준섭이 흰 이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나는 술잔을 반쯤 비웠다.

 

   "지금 나와 레이스를 벌이자는 겁니까?"

 

   술잔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나는 담배를 꺼냈다.  준섭은 고개만을 까딱했다.  담배를 한 개피 입에 물고 불을 당겼다.  그리고 나는 지그시 미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어디서?"
   "시내 도로.  버스도 다니고 화물차도 다니는."  
   "지금?"
   "백형만 괜찮다면."
   "무엇을 걸고?"
   "글쎄,  뭘 걸까?  내가 이기면 그냥 백형의 차에서 타이어를 두 개쯤 접수하는 걸로 하지 뭐."
   "만일 내가 이긴다면?"
   "그때는 글쎄,  뭐가 좋을까?  백형은 뭐가 좋겠어요?  돈 백 드릴까?  아니면 이백?  삼백?"

 

   눈, 코, 입.  미미의 얼굴을 훑고 있던 내 시선은 그녀의 입가에서 멈추었다.  나는 여자의 입술을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가 민망할 정도로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했다.

 

   "입술,  윤미미씨의 입술."

 

   미미나 준섭 둘 다 놀란 표정이 되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미미와 달리 준섭은 곧 평정을 되찾고 키득거렸다.

 

   "좋았어.  백형이 이기면 미미의 입술을 드리지.  이봐, 미미.  내가 지면 말야.  백형한테 멋진 키스를 한 번 해주라고."

 

   준섭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자 미미는 혀를 낼름 내밀었다.

 

   "좋아요. 꼭 이기세요.  그래서 우리 키스 한 번 멋지게 하기로 해요."

 

   한 술 더 뜬 미미의 말에 나는 이를 사려물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근질거리는 미소를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근데,  백형.  타이어는 카센터에서 떼어내는 게 아니고 백형이 직접 해야 합니다.  시합 끝난 뒤 그 즉시."

 

   예정에도 없었던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너무도 즉흥적이고 우발적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제각기 테이블 위에 있던 칵테일을 깨끗이 비운 뒤 곧 바로 재즈바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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