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결별
1992년 5월 15일 금요일 오후 2시, 때때로 나는 어쩌면 그날의 사건이 어떤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망상에 빠지고는 한다. 내가 5월 15일 마주친 미영은 5월 5일에 약속을 했던 미영과는 다른 평행우주 속에 있는 다른 미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고 그날 난 시계탑을 올려다 보면서 행복한 기분에 빠져있었다.
시험기간 동안에는 미영의 모습을 통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난 어디선가 나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을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흐뭇해 하였고, 그녀도 나의 마음과 같아서 시험을 잘 치르고 가뿐한 마음으로 데이트를 하고 싶어 할 것이라 믿었다. 난 수학여행 때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던 목걸이의 다른 한 짝을 내방 책상 위에 올려놓고 공부가 힘들 때 마다 그것을 바라보며 위안으로 삼았다. 또한 시험 때는 주머니 속의 목걸이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그것을 행운의 부적으로 삼았다. 이런 나의 일관된 마음가짐은 결실을 맺었다. 매일 정답을 채점해 볼 때마다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성적이 좋게 나왔고,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답안지를 밀려 쓰는 등의 실수를 하지 않은 한 나의 성적이 월등히 올라갈 것이 확실했다.
그때 난 어쩌면 “행운”이라는 것에 중독되어 있었을 지 모른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행운들을 초창기에는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혹시 그것에 마음을 기대었다가 상처를 입지 않을까 두려워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듭 증폭되는 행복에 마음을 완전히 맡겨버렸다. 성적이 너무 좋은 것도, 내가 유명인이 된 것도, 미영이 나를 사랑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입을 헤벌레 벌리고, 기분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한시라도 빨리 미영의 얼굴을 보고 싶었고, 미영에게 자신의 성적이 올랐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초조하게 30분이 지나갔다.
기다리는 것도 즐거웠다. 기다림 또한 데이트의 한 과정이 아닌가? 세상에 참을성 없이 얻어지는 진정한 행복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타이르면서 30분을 보내었다.
마음속에서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다. 여러 가지 망상들이 떠오르고, 여러 가지 가정들이 혹시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였지만 그것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30분을 버텼다.
1시간 30분이 지난 후에는 화를 냈다. 미영의 시간감각 없음에 대해서 흉을 보고, 오기만 하면 크게 혼내 줄 것이라고 자신에게 말하였다. 사실, 난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가 올 것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해 버린 것이다.
또 30분이 지났다. 이제 완전히 패닉상태가 되어버린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도저히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떠나버리면 나의 인내심 없음 때문에 행복을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여기서 떠나버리면 다시는 미영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3시간째가 되어서 난 공중전화로 걸어갔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외우고는 있었지만 한번도 전화해 본 적은 없는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떤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난 낯선 목소리에 전화를 받는 사람이 그녀의 언니일 것이라 생각하여 대답하였다.
“저……안녕하세요. 저는 한강민이라고…… 미영이 친구인데요. 급히 연락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미영이 있으면 좀 바꿔주시겠어요.”
난 최대한 정중하게 말하였다. 하지만 상대방은 의외의 답변을 하였다.
“강민아, 나야 미영이”
“…….”
난 너무 놀라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어……어떻게 된 거야? 왜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어?”
난 자신감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 그녀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긴 침묵이 지난 후 말하였다.
“강민아, 우리 이제 그만 만나야 할 것 같아.”
“왜? 어째서?” 내게 가장 가혹한 말이 쏟아졌다.
“이번에 성적이 크게 떨어졌거든, 그리고 내가 너하고 사귀고 있다는 것을 부모님이 알아버렸어.”
“하지만…… 그렇다고 헤어질 필요는 없잖아. 오늘 만나지 않아도 되니까. 아니 앞으로도 더 조심해서 만나면 되잖아.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
난 그녀에게 애원했다.
“미안해, 하지만 정말 안되겠어. 지금도 어머니가 빨리 전화 끊으라고 하시거든. 그럼 이만 끊을게.”
그녀는 차갑게 말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난 수화기를 들고 그녀의 다음 말을 계속 기다려 보았지만 “뚜-뚜-뚜”하는 무성의한 신호음만이 들릴 뿐이었다. 난 한참을 그냥 그곳에 서있었다.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나는 터덕거리는 발걸음으로 집으로 걸어왔다. 태양은 서쪽 하늘로 넘어가고 있었고, 혼이 빠진 듯 내가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 앞의 초인종을 누르며 그때서야 내 눈이 흐려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난 계속 눈물을 쏟으면서 집 앞까지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