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본 것은 지나간 내 학창시절
어느 겨울날이였던 것 같습니다.
첫사랑도 아니였는데,
왜 그렇게 나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튼,
그 사람 덕택에
나는 당시에 전혀 상상도 못할만큼
많은 것을
내 인생에서 바꿀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처음으로 코피터지면서
책상에 앉아 공부해보기도 하였고,
누구보다 학원에 일찍 가서 공부하는 척(?)도 하면서
그 사람의 관심을 끌고자 노력했었습니다.
그 결과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문득
생각이 나네요.
가을 바람 쌀쌀하던 어느 밤,
학원 특강 시간
몰래 빠져나와 건물 앞 자판기에서
따듯한 캔커피를 사와 열람실
그 사람의 자리에 살며시 놓고
교실로 들어가다가
선생님에게 걸려 학원 문닫는 시간까지
잔소리를 들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나의 소중한 학창시절에
항상 그 사람은 있었습니다.
사랑?
그렇게까지는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만화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었던
두근거리는 좋아한다는 감정을
내게 가르쳐준 사람이라서 더욱 더
나는 그 사람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여자>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제 나이가 되면,
그렇게 연락 안되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먼저 반갑게 찾아온다고
청첩장과 함께
아마 그 시즌이 시작되었나 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면서
연락이 뜸했던 보습학원 같은 반 친구의
청첩장은 첫눈이 내리던 날 오후에 제게 왔습니다.
사실 몇 번 아는 사람의 결혼식에 간 적은 있지만,
이렇게 나와 친했던,
아니 같은 추억을 공유한 사람의 결혼은
처음이라서 조금 기분이 색다릅니다.
남들보다, 운이 좋아서인지, 일찍 사회에 자리를 잡은 저는
대학때부터 만나던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워낙 오래 사귀다보니, 주위에서는 결혼하라고 여간 압박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뭐 저를 많이 사랑해주고, 속물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조건도 정말 좋은 그런 사람이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결혼을 앞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득 그 사람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러더군요.
그 사람, 열심히 살고 있다고
<그 남자>
청첩장.
회사 다니면서 지친 사람들에게는
휴일을 잡아먹으면서
지갑을 털털 가볍게 만드는
피하고 싶은 이벤트일지도 모르지만,
저 같이, 지방에서 자연의 혜택을 지나치게 누리는 사람에게는
대도시로 탈출할 수 있는 신나는 기회였습니다.
달리 돈 쓸일도 없고, 오랜만에 정겨운 사람도 볼 수 있으니까요.
이번에 결혼하는 친구는,
대학동기였습니다.
이친구 하고 결혼할 사람이,
놀랍게도 저를 알더랍니다.
고등학교때 저랑 같은 동네 살았고,
같은 학원을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친구가 그랬답니다.
이번 결혼식에 그 사람도 초대했다고,
갑자기 심장의 박동이
속도를 내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머리는 많은 산소를 필요로 합니다.
너무 많은 일을 생각하고 있나봅니다.
<그 여자>
남자친구는
마침 아버지 회사의 일 때문에 해외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결혼식에 가게 되었습니다.
차를 가지고 할까 생각하다가,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택시를 탔습니다.
오랜만에 서울 도심으로 향하니
기분이 새로와졌습니다.
살기편하다는 핑계로
신도시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거든요.
익숙한 모습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하늘은 눈을 뿌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정말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그 겨울날
<그 남자>
결혼식이 열리는 호텔,
우연일까요?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던 그 버스 정류장.
그 일대가 재개발되어 지금은
으리으리한 호텔이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그 버스정류장
그대로 있더군요.
형태는 달라졌지만,
분명 그 위치, 그대로였습니다.
나는 생각이 났습니다.
아쉬움만이 가득했던 그날 밤.
<그 여자>
이름을 잊어본 적은 없습니다.
조금 미안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지겹게 나를 좋아하는 티를 냈으니까요.
생각해보면,
그사람 제법 멋졌습니다.
키도 제법 크고 얼굴도 조각같은 미남은 아니지만,
살며시 짓는 눈웃음이 매력적인 사람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이 답답해 보였습니다.
한 번도
그 사람. 나에게 직접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해 본 적 없습니다.
전화를 걸어본 적도 없고,
언제인가, 편지를 건내준 적은 있습니다.
'기회를 주지 않겠니?'
무슨기회? 항상 그런식이였습니다. 그 사람이 저를 좋아한다는 것은 너무 잘 알지만, 나에게 말할 용기도 없는 사람.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택시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섭니다. 앞에 차들이 많이 밀려 있군요.
그래요. 이 정류장쯤에서 였을 거에요.
그 사람이 나에게 건내주었던 선물 상자.
집에 와 윗 포장을 열어보니 게스 와치라는 상펴가 보였습니다.
다시 나는 포장을 덮고
너무 어려서였을까, 나는 그에게 받았던 선물상자를
마침 크리스마스라 한국에 돌아온
미국에 계신 외삼촌의 막내딸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한국말이 서툰 동생은 연신 땡큐땡큐를 외치더군요.
<그 남자>
나는 지금도 후회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왜 직접 말하지 못했을까,
조금 더 다가서서
솔직한 내 심정을 전하지 못했을까.
대학입시전,
나는 아는 분의 가게에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꼭 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거든요.
백화점에서 봤던
시계.
그랬거든요.
그 사람 학원에서 모의고사 볼때,
시계가 늦게 가서 시험 망쳤다고 투덜거리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대학가게 되면 그러지 말라고
그리고 나에게 소중한 시간을 주어서 고맙다고
여러가지 의미로 꼭 시계를 선물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나 너를 좋아한다고,
내 마음을 받아준다면
다음날 학원 앞 자판기 앞으로 나와달라고
집에 돌아가는 그녀에게
선물 상자를 건내고
도망치듯 나는
집으로 뛰어와 이불을 덮고
눈을 질끈 감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어서 내일이 오기를 빌면서요.
하지만 다음날
겨울인데도 비가 내렸고,
그 사람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많이 속상했습니다.
정말 많이...
<그 여자>
결혼식은 성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지만,
눈에 특별하게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였습니다.
많이 달라지지 않았더군요. 결혼식에 참석한
같은 나이의 남자들, 벌써 아저씨 티를 내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는 잘 해진 청바지위에 제법 좋아보이는 자켓을 입고 있었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그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은 쉽게 그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친구에게 들은 것 이상으로 그는, 훌륭한 어른이 되었나봅니다.
세상에 찌들지 않은 것 같은 그의 모습에 호감이 갔습니다.
<그 남자>
얘기 듣기로는
그 사람도 얼마뒤면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하네요.
역시 아름다운 사람은
주위에서 그냥 둘 일이 없죠.
아쉬운감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니까,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저 사람때문에 나는
남에게 무엇인가 해줄 수 있는 사림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늦은 나이에 겨우겨우 치과 의사과 되어 지금은
공중보건의로서 시골에서 많은 어른신들의 충치와 싸우고 있지만
항상 즐거웠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
그리도 그 누군가의 기억속에서 나는
고마운 사람이 된다는 사실이
나의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습니다.
저 사람에게
가서 직접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10년전 나는 당신을 좋아했다고
그리고 당신을 좋아하는 그 감정으로 인해
나는 조금 더 열심히 세상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그 여자>
솔직하게,
저 사람이 있었기에
나의 입시시절은 외롭거나 괴롭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
그것도 제법 괜찮은 사람이 나를 아껴준다는 것
솔직하게 기분 좋은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 때는 왜 그렇게,
주위를 의식하고
이상한 자존심이 많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뒤로 알게되었습니다.
얼마나 저 사람이 순수하게 나를
아껴주었던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내가 속한 환경이나
내가 갖은 것에 관심을 가져서가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워하면서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결코 세상에 많지 않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고맙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말하지 못했지만요.
꼭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고,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신부와 신랑은 이미 공항으로 떠났고
피로연 자리는 파장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 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하는 그 곳에,
구석진 자리에서
친숙해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를 보며 밝게 웃는
두 사람이 보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기억해주어서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