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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우가 아버지의 방에서 나온 건 제법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두 사람은 과연 그 긴 시간동안 어떤 대화를 나눈 걸까? 승우의 얼굴을 살피며 대충이라도 가늠해보려 했지만, 녀석은 완전히 포커페이스다. 표정만으로 봐서는 묵은 오해와 감정을 해소하며 감동의 화해를 했는지, 아니면 또 죽도록 말다툼을 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저녁 먹고 가겠니?”
승우의 새엄마가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 그러나 승우는 그녀를 외면하며 내 손을 잡아끌기 시작한다.
“자, 이제 돌아가자.”
“하지만 어머니가 저녁을…….”
“빨리 가자니까!”
역시 승우의 태도는 달라진 것이 없다. 녀석은 나를 막무가내로 잡아끌었고, 때문에 승우 새엄마에게 인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승우가 집을 나서는데도 승우 아버지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얼굴도 비추지 않으신다.
‘역시 부자지간에 심보가 똑같잖아.’
순식간에 승우의 차까지 끌려 나왔다. 녀석은 나를 차에 밀어 넣고 나서야 내 손을 놓아준다.
“뭐야! 그렇게 허둥지둥 끌고 나올 것까지는 없잖아!”
“볼 일 끝났으면 가야지, 거기서 더 시간 보낼 이유가 없잖아.”
“저녁 먹고 가라잖아!”
“거기서 저녁 먹을 맛이 나냐?”
“쳇, 그런 부잣집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는지 궁금했는데…….”
나의 말에 승우는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남은 어색하고 불편해서 죽을 뻔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냐? 먹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부잣집이라고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다고…….”
“너야 어려서부터 그런 집에서 살았으니 별 거 아닐지 몰라도, 나한테는 그런 게 아니다 뭐.”
계속 툴툴거리는 나를 보고, 승우는 맥 빠진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내가 먹고 싶은 건 뭐든 사줄게. 아무리 비싼 거라도 말만 해. 이제 됐지?”
이게 아닌데……. 꼭 먹을 거 못 먹어서 삐진 것 같은 상황이 되 버렸다. 사실 나는 좀 더 고차원적인 문제 때문에 불만스러운 거라고! 굳이 따지자면 아주 약간쯤은 먹을 것 때문일지도 모르지만……그건 아주 약간, 약간일 뿐이다.
“이제 그만 좀 불평하고……자!”
승우가 갑자기 입술을 내민다.
“그건 뭐야?”
“네 말 잘 들었잖아. 오기 싫은 거 억지로 여기까지 오고, 아버지 방에서도 끝까지 버티고……. 상 안 줄 거야?”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커다란 덩치에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을 한 녀석이 나의 입맞춤을 상으로 받기 위해 입술을 쭉 내밀고 있는 모습이라니……. 예상치 못했던 귀여움이다.
겨우 웃음을 참으며 녀석의 뺨을 잡고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해줬다. 그리고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잡고 있던 뺨을 마구 잡아 늘인다.
“이래서 남자는 평생 어린애라는 말이 있나봐. 정말 내가 애 하나 키우는 것 같다니까.”
“아야! 뭐? 어린애? 누가 할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나야말로 항상 너 때문에 불안해 죽겠다. 언제 무슨 사고를 저지를지 모르니, 물가에 애 내놓은 것 같아서 어디 살겠냐? 내가 너 때문에 늙는다, 늙어!”
승우는 나의 말이 못마땅한지 투덜거리며, 꼬집힌 뺨이 얼얼한 듯 얼굴을 문질렀다. 그런 녀석을 응시하며, 나는 정말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아버지하고는……무슨 얘기했어?”
승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한참동안 생각에 빠진 듯 침묵하는 그. 그의 눈빛이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 보인다. 잠시 후, 갑자기 녀석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언제나 강하게만 보이는 그가 나에게 의지하고 싶은 것처럼 내 품에 파고든다.
“따뜻하다. 너무 포근해.”
고즈넉한 그의 목소리. 나는 온힘을 다해 그를 꼭 끌어안았다. 이런 걸 모성애라고 하나? 승우가 내 품안에서 편하게 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아버지도 많이 늙으셨더라. 언제나 불같던 분이……많이 유해지셨어.”
그의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게 많이 유해지신 거라고? 지금 내가 본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거 맞나? 도대체 예전에는 어땠다는 얘기야?
“내색은 안하시지만, 마음이 많이 약해지셨어. 모르겠다. 언제나 아버지가 밉고 원망스러웠는데……그런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
말없이 토닥이는 나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그는 말한다.
“솔직히 주무시는 아버지를 봤을 때……정말 아버지를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어.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서는 영원히 살기라도 할 것처럼 강해 보였는데……. 그 때 깨달았어. 네 말이 옳다는 것을. 무조건 원망만을 내 가슴에 담아둘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을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아버지가 평생 내 마음을 알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걸 그제 서야 깨달은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내가 오랜 시간 후회하게 될 거라는 것도…….”
“그래서……무슨 말을 했어?”
“솔직히 아버지와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어색하게 느껴져. 너도 아까 봤겠지만, 예전부터 아버지와의 대화는 서로 고함치고 싸우는 게 다였거든. 내가 기억하는 한 한 번도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아. 마주치기만 하면 언쟁을 하게 되고, 그게 싫어서 마주치지도 않으려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대화를 하려니까……정말 쑥스럽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 그래도 다음번이라고 더 쉽지는 않을 것 같아서……나름 노력했어. 내가 왜 예전부터 아버지에게 그렇게 반발 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 무엇 때문에 상처를 받았는지,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정말 잘했어. 아버지 반응은 어땠어?”
“거의 일방적인 대화였지 뭐. 아버지는 나보다 더 대화에 서툴고, 준비조차 돼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잠자코 나의 말을 듣고 계시더군. 큰소리로 윽박지르거나 꾸짖지 않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셨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토록 서둘러 다른 여자를 데려온데 대한 원망을 말했을 때는……아버지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진 것도 같아.”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꼭 눈물이 흘러야만 울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속으로 흠뻑 젖을 만큼 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표정은 그렇게 마음으로 울고 있는 것처럼 젖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용서하는 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의 그 때 행동은 용서할 수 없어. 아픈 어머니를 두고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가 무섭게 그 자리에 그 여자를 데려온 행동은……. 내가 너무 옹졸한 걸까?”
“그렇지 않아. 너로서는 분명 용서하기 힘든 일이야. 스스로를 탓하지 마. 그건 분명히 아버지의 잘못이니까. 하지만……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잖아. 어머니의 긴긴 투병 생활을 바라보며, 아버지도 약해지고 힘들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런 잘못을 저지른 거겠지. 네 새엄마도 지난 번 그런 말씀을 하셨어. 잘못된 일이었지만……굳이 변명하자면 자기도 어리고 철이 없었다고.”
“그래, 생각해 보면 그 때 그녀는 지금의 나보다 어렸지. 차갑고 몰인정하다고 비난했지만, 어쩌면 내 쪽에서 그녀를 거부했기 때문일지도 몰라.”
“두 사람은 분명히 잘못을 했지만, 아마도 긴긴 세월 그만큼 마음의 고통을 받으며 대가를 치렀을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게 두 사람을 당장 용서하라고 하지는 마. 바보 같은 생각일지 몰라도……어쩐지 그건 어머니를 배신하는 행동인 것처럼 느껴지니까. 나중에……좀 더 시간이 지나면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재촉하지 않을게. 난 언제나 네 편이잖아.”
나의 말에 승우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둡고 슬퍼 보였던 그의 얼굴이 나의 한 마디에 웃음으로 가득 찬다. 그 얼굴을 보며 묘한 희열이 느껴진다. 나의 사랑이 그를 그렇게 웃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 행복하게 했다. 사랑이란 그 자체로 행복일 수 있나보다.
‘언젠가는 승우도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 용서를 배울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가족 간의 사랑도 알게 되겠지. 지금 한 발을 내딛었으니, 언젠가는 모든 것이 좋아질 날이 올 거야. 그 때까지 나는……서두르지 말고 승우의 얼굴에 깃든 이 웃음을 지켜줘야지!’
“고맙다, 아영아. 네가 아니었으면 난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을 거야. 아마 너무 늦어버린 후에야 지금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겠지.”
“그것 봐. 하여간 넌 나 아니면 안 된다니까!”
무거운 분위기를 몰아낼 겸, 가볍게 그의 말을 받아 넘겼다. 그리고 또 다른 궁금증을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저……아버지가 나에 대해서는 뭐라고 안하셨어? 아까 그런 실수를 해버려서…….”
질문을 하면서 불안했지만, 은근히 기대감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엄청난 실수로 인해 끝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승우 새엄마도 나를 좋게 보셨지 않은가!
‘가끔 순정만화를 보면 나오는 얘기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여주인공의 솔직함과 당당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시키기 마련이거든. 까다로운 인물일수록 더욱 굳어진 마음이 노곤하게 녹아내리더라. 그래, 승우의 아버지라면 나의 진가를 알아보실 게 틀림없어!’
초롱초롱 빛나는 기대에 찬 두 눈을 승우에게 향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녀석은 엉뚱한 동문서답으로 나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다.
“아, 맞다. 아버지한테 게임 제작에 대해서 얘기를 하니까, 조금 이해를 하시는 것도 같더라고. 아무래도 사업을 하는 분이니 게임 산업의 전망을 전혀 모르지는 않으셨겠지. 물론 아직도 내가 사업을 물려받길 바라고 계시겠지만…….”
‘지금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누가 물어봤어?’
녀석의 머리가 어디 잘못된 게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곧이어 승우가 말을 잇는다.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데, 원한다면 내가 하는 일을 인정해주시겠대. 단, 제발 너와는 헤어지라나? 성격도 이상하고, 버릇없고, 약간 정신도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절대로 너를 며느리로 맞는 일만은 없기를 바라시더라.”
헉, 설마 그 정도일 줄이야……. 내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 공중으로 분해되고, ‘빛과 같은 사람’인 나, 이아영은 어둠에 휩싸인다.
‘지독해. 아무리 그래도 정신이 이상하다니……. 그걸 또 솔직하게 다 말해줄 건 뭐야! 승우, 이 바보 녀석! 아, 다 틀렸어. 차라리 승우가 아버지와 가까워지지 않게 해야 하나?’
내 머리를 둘러싼 시커먼 먹구름을 못 봤는지, 승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그러고 보니……좋은 방법이군.”
“뭐, 뭐가?”
승우의 눈빛이 빛난다. 그것은 오랜만에 녀석이 악마로 보일 정도로, 무척이나 사악한 빛이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뇌리를 스친다.
“우리 결혼하는 거야!”
상상도 못했던 그의 대답에 심장마비로 비명횡사할 뻔 했다.
“뭐?”
“좋은 방법이잖아. 그 꼰대한테 복수하는 거야! 그렇게 마음에 안 든다는 며느리를 얻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지켜보면 재미있을 거야!”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이거 진담으로 하는 말 맞아? 지금 복수의 수단으로 나와 결혼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며, 머리에서는 김이 솟는다. 저절로 손이 올라가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이 바보 녀석! 누가 너 따위와 결혼한대?”
“아야! 또 폭력이야? 이렇게 폭력적인 널 데리고 살아준다는데 감사하게 여길 것이지, 왜 성질이야? 쑥스러워서 그러냐?”
“이게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네? 넌 더 맞아야 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매운 주먹을 인정사정없이 녀석에게 날린다.
“그만 좀 때려! 내가 동네북이냐? 도대체 뭐가 문제야?”
정말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건가? 그렇다면 분명 이 녀석은 사상 최악의 바보다. 공부만 잘했으면 뭐하냐고!
“너 같은 멍청이하고는 상종을 못하겠다. 머리에 총 맞지 않는 이상 너하고 결혼할 일은 없으니까, 복수고 뭐고 꿈 깨!”
냉전모드 돌입이다. 이번에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으로 유혹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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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는 무사~히 주 5일 연재 완료입니다!
역시 저는 너무 욕심내지 않고 주 5일 연재가 적당한 것 같아요^^;
주말에 쉬는 저를 용서해 주세욧!!
음, 이제 다음 주 중에는 이 글이 끝날 것 같군요.
글이 끝나면 시원하면서도 많이 섭섭하겠죠?
지금 얼마 안남은 이 글을 만끽해야겠어요!
간만에 34회 글에 달린 댓글에 답변을 달아 놓을게요.
그럼, 주말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전 월요일에 돌아올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