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참 다사다난한 나날이었습니다.
이번 주엔 더 큰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젊어서 얻는 가장 귀한 재산은 경험이라고
뭐든 한 번 부딪혀 보렵니다.
======================= 주식, 사채, 보증만 하지 말자 =================
민아 - =누나=가 누구야?
갑작스런 그녀의 질문에
난 일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왜 그녀가 그 사람의 존재를 아는 걸까.
어머니에게 들었나?
아니면 설마 내 입으로?
...... 그렇다고 하면 대체 어디까지?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는 동안
난 더듬더듬 그녀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기억 -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사람인데....
민아 - ........ 그랬구나.
예상 밖에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내가 서둘러 다음 말을 찾는 사이
그녀는 슬쩍 잡고 있던 손을 빼내며 말했다.
민아 - .... 그럼.... 가 볼게.
기억 - 어, 아냐, 집까지 바래다줄게.
난 다시 그녀의 소매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한 발 물러나 내 손을 피하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평소와는 다른 단호한 거절.
난 무안해진 손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민아 - 그럼..... 다음에 또 만나.
기억 - 으.....응.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선 뒤
빙글 돌아 똑바로 개찰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
난 그녀가 개찰구를 지나는 것이라도 확인하려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아 - .........
그때 그녀가 다시 내게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훨씬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는
내게 깜짝 놀랄 만큼 바싹 붙어 선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민아 - 키스해줘.
기억 - ...뭐?
깜짝 놀라 되묻는 나에게
대답대신 가슴에 솜주먹을 날리는 그녀.
기억 - ......
설상가상으로 퇴근시간 겹쳐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는 전철역.
정말 이런 곳에서 말인가?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빤히 날 올려다보며
날 거듭 재촉하고 있었다.
기억 - 후....하.... 오케이. 잠깐만.....
뭔가 잘못되긴 했어도 피해갈수는 없다고 느낀 난
긴장으로 뻣뻣해진 손을 비벼 몸을 풀며
뒤돌아서서 두어 번 심호흡을 한 뒤
곧장 결행태세로 들어갔다.
이내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주는 그녀.
난 그녀의 양쪽 어깨를 살며시 잡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얹었다.
두근두근두근... 이 정도면.
잠시 후 적당하다 싶은 때가 되어
살짝 눈을 뜨고 입술을 떼려하는 순간
=꽉!=
기억 - .....으?!
갑자기 그녀가 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뭐라 반응을 하기도 전에
내 목을 두 팔로 감싸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그녀.
우리가 점심 때 뭘 먹었더라?
내가 안 먹은 것 중에 민아가 먹은 게....
민아 - .......
기억 - ........
한참 후에야 그녀는 꽉 죄었던 내 목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내 개찰구를 향해 뛰어가는 그녀.
주변에선 =휙- 휙-= 하는 휘파람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난 그저 멍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녀가 다시 그 사람에 관해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 같은 문제에 대한 궁리.
혹은 지난 일에 대한 추억과 회상...
하지만 이런 내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별 다른 내색 없이
매일매일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동대문에서 간단한 쇼핑을 하고 그녀를 바래다주는 길.
그녀의 집 앞까지 도착했을 때 그녀가 물었다.
민아 - 늦었는데... 저녁 먹고 갈래?
기억 - ... 그럴까? 오늘도 시켜먹는 거야?
민아 - 아냐~ 재료 다 사놨어.
오늘에야 비로소 그녀의 집에서 제대로 된 밥을 먹는 구나...
하지만 이런 내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집에서 날 맞이한 건
=3분 OK. 냉동 돈가스=.
이걸 재료라고 해야 할지 완성품이라고 해야 할지...
민아 - TV라도 보고 있어. 금방 준비되니까.
기억 - 아냐. 나도 도와줄게.
민아 - 음.... 그럼 이거 전자렌지에 3분만 돌려줄래?
.......... 그냥 기다릴 걸 그랬나.
마지막까지 처참히 부수어진 꿈의 잔해를 뒤적이며
멍하니 전자렌지 앞에 서서
카운트다운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는 사이
그녀는 식탁과 주방을 부지런히 오가며
뭔가를 열심히 준비했다.
불과 10분 만에 준비된 저녁 식사.
하지만 분위기만큼은 고급 레스토랑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얀 식탁보가 깔린 식탁에
가지런히 정돈된 포크와 나이프.
식탁 가운데엔 촛대까지 놓여있었다.
민아 - 촛불 켜고... 방에 불을 끄면.... 짠!
해가 짧은 겨울이라 바깥은 벌써 어두워진 후였고,
방안은 은은한 촛불로 가득 찼다.
황금색 빛의 베일이 일렁이는 식탁에 앉아
나와 그녀는 분위기 있는 (냉동)돈가스를 먹었다.
기억 - 그런데, 집에 이런 게 다 있었어?
민아 - 응? 어떤 거?
기억 - 뭐.... 나이프나... 촛대나....
민아 - 찾아보니까 있던데.
기억 - 으응... 신기하네.
민아 - 저기저기, 기억아.
기억 - 응?
민아 - 우리 와인 마셔볼래?
기억 - 와인도 있어?
민아 - 찬장에 많이 있으니까.... 음.... 괜찮을 거야.
낭만적인 분위기에 꽂혀버린 우린
예전에 화이트 와인 두 잔에 뻗었던 아픈 기억을 잊고
또 다른 와인을 꺼내 한 잔씩 앞에 놓았다.
민아 - 우와.... 이러니까 꼭 어디 온 거 같다. 그지?
기억 - 그러게.... 자, 건배~.
민아 - 후훗.... 쨍~.
자고로 필 받아서 마시는 술이 제일 무서운 법.
한잔 두잔이 오가면서
돈가스를 다 먹기도 전에 알딸딸하게 취해버린 우린
실없이 마주보고 실실 웃으며
평소엔 생각도 못했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민아 - 기억이 너 많이 먹고 살 좀 쪄야 해.
기억 - 하하, 난 원래 먹어도 안 찌는 체질이라....
민아 - 뭐~야 그게~. 누군 먹는 데로 살로 다 가는데~.
기억 - 응? 지금 충분히 날씬하잖아?
민아
- 아냐. 내가 숨어있는 살이 얼마나 많은데~
꼬집어보면 다 뭉실뭉실 지방이야 지방....
자신의 양 볼을 꼬집듯 잡은 채
자책하듯 고개를 흔드는 그녀.
기억 - 그렇게 잡으면 누구라도 잡혀.
난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내 볼을 똑같이 잡아당겨 보였지만
그녀는 못 믿겠다는 듯 몸을 앞으로 쑥 내밀어
내 양 볼을 덥석 잡았다.
민아 - 뭐~어~야~~. 가죽밖에 없잖아~ 거짓말쟁이!!
기억 - 아아, 잠깐, 아파. 아, 진짜 아파.
민아 - 나빴어 나빴어 나빴어...
얼마나 세게 꼬집었는지
얼얼하게 감각이 없는 뺨을 문지르며
난 그녀가 제대로 취했음을 직감했다.
민아 - 기억아....
기억 - 응?
민아 - 나 업을 수 있어?
기억 - 응. 지난번엔 안고 달린 적도 있잖아.
민아 - 나 그때보다..... 3키로나 더 쪘는걸.
기억 - 뭐, 그 정도야....
민아
- 뭐가 그 정도야~!! 3킬로면...3킬로면....
아아..... 앞으로도 계속 찔 거야.... 안돼....
내가 마른 탓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평소 체중에 관한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 같다.
기억 - 못 믿겠으면 업혀 봐.
민아 - 안 돼.... 절대 못 일어날 거야.
기억 - 거참, 업을 수 있다니까.
난 식탁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등을 내밀었다.
술기운에 약간 다리가 풀린 것 같긴 했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녀의 추정 몸무게를 생각할 때
지금도 가뿐히 업을 수 있다는 자신은 있었다.
내 등을 보며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팔로 내 목을 감고 몸을 기대왔다.
기억 - ........
민아 - ...... 기억아?
잠깐 잠깐..... 흐읍......
민아 - ...... 기억아??
오 마이 갓.
와인의 여파가 생각보다 강했는지
쉽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그녀가 깜짝 놀랄 만큼 가뿐히 일어나 보이려던 난
체면 불구하고 한 손으로 식탁 다리를 붙잡은 채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기억 - 쫘빠, 흐이짜아아아!! 하하하.
자리에서 일어나긴 많이 버거웠지만
일단 일어나고 나니 서있는 건 가뿐했다.
곧 여유 있는 걸음으로 거실 주변을 빙 돌자
안심한 듯 등에 얼굴을 기대는 그녀.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반짝 들며
볼 멘 목소리로 소리쳤다.
민아 - ..... 반칙이야.
기억 - 응?
민아 - 반칙이라고!! 반칙!
기억 - ....뭐...뭐가?
민아 - 아니, 배신이야 배신, 배반!
얌전히 등에 업혀있다 말고
갑자기 내 목을 죄며 소리를 질러대는 그녀.
아까 너무 힘들게 일어나서 그런가?
기억 - 켁.... 왜그래? 응?
민아 - 히잉.... 그 사람 누구야....
기억 - .....누구?
민아 - 누나라는 사람... 누구냐고~!
기억 - 케헥! 자..잠깐만....숨 막혀...
내 비명 아닌 비명에 손을 놓은 그녀는
이내 어깨위에 축 늘어진 채
울먹이는 듯한 콧소리를 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취중진담이라고....
내내 그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걸까?
어쩐지 지난번엔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시답잖게 넘어가긴 했다.
내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등 뒤에 있는 그녀의 숨이
점점 나긋하게 길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잠시만 있으면 곧 잠들 것 같다.
민아 - 누구야.... 누구....
계속 중얼거리곤 있지만 잠기운이 흠신한 목소리.
목을 스치는 숨이 뜨겁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사람의 존재, 그 사람과의 관계, 그 사람과의 추억을...
기억 - .... 공주.
민아 - ......
기억 - 공주님?
민아 - .......
완전히 잠들어 버린 걸까.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이걸 과연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잠시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업은 채 거실 주변을 빙빙 돌던 난
곧 2층에 있는 방으로 올라가
그녀를 침대에 살며시 뉘였다.
민아 - 으응....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옅은 신음을 내며 내 목을 다시 끌어안는 그녀.
별 생각 없이 몸을 일으키던 난
자칫 그녀 위에 엎어질 뻔 했다.
기억 - ......
난 그대로 그녀의 팔에 힘이 빠지길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목을 빼냈다.
지금 시각 8시 30분.....
이제 슬슬 집으로 들어가야 할 때인가.
난 식탁에 어질어져 있는 그릇들을 적당히 치워놓고
주변을 한 번 살펴본 뒤 현관을 향했다.
피카츄 - 즈르르르르를......
기억 - ......
하지만 현관문 바로 앞에서
단단히 전투태세에 들어가 있는 피카츄.
이게 왜 또 풀려있는 거야.
설마 민아가 잠든 걸 직감적으로 눈치 챈 건가.
..... 어떻게 나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