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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3장

이나영 |2006.01.23 20:04
조회 171 |추천 0

 

제 3장











  정우가 서울로 올라온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생활도 이제는 꽤 순조로워졌다. 가끔 복잡한 교통. 그리고 북적이는 사람들로 서울의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고 사람들로 가득 찬 만원버스 속에서 부대끼며 지각을 면하기 위해 아침마다 마라톤을 방불케도 하지만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달리는 기분도 그리 썩 나쁘지 않았다. 이젠 시골보다 서울에서의 생활이 몸에 밴 정우였다. 오늘도 그는 복잡한 인파 속에서 시계를 착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좀처럼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역시 지각은 따놓은 단상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그에게 생긴 버릇이 있다면 그것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지각을 한다는 것이다. 서울로 올라온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그의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전학을 오고 얼마동안 그가 지각을 하자 아직 서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그의 지각에 대해선 아무런 터치도 하지 않던 선생들도 이제는 싫증 섞인 목소리로 그를 대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늦게 교실을 들어선 정우. 그와 동시에 날아드는 선생의 잔소리.

  “또야? 또 지각을 해? 이젠 서울 생활에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니?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늦었는지 변명이나 좀 들어보자. 왜 늦었니?”

  “……….”

  “왜 대답을 못해 늦은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하긴 이젠 그렇다할 변명거리도 없겠지. 내 말이 틀렸니?”

  정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희정아. 정우 보고 이 시간 마칠 때까지 반성문 써서 교무실로 내려오라 그리 전해”

  그 말을 끝으로 선생은 수업을 계속 진행시켰다. 정우는 제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희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창피함 때문에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런 정우의 태도에 희정은 잠시 정우의 손을 꼬옥 잡아주는 것으로 위로의 말을 대신했다. 그 시간 내내 정우는 반. 성. 문. 이란 대목만 적어둔 채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딱히 적을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늘 아침마다 써오던 반성문이 이젠 지겨울 따름이다.


*     *     *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정우는 오늘도 희정과 하굣길을 같이하고 있었다. 희정은 늘 그랬듯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런 희정이 고맙고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평창동 한 주택가에 위치한 자취방에 당도할 무렵 정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야 너 왜 그래?”

  희정의 물음에 대답도 없이 정우는 자취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의 자취방으로 통하는 문 앞에는 검은 고급 승용차 한대가 서 있었다. 누구의 차일까? 의문이 생긴 희정은 정우가 뛰어 들어간 문을 통과해 계단을 올라갔다.

  희정이 그의 방으로 들어갔을 땐 정우는 낯선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대체 누구일까? 정우와 마주앉아있던 남자도 갑자기 들어오는 희정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제 친구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 말을 들은 남자는 희정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희정은 이야기 도중 자기 때문에 해가 될까봐 조용히 그의 자취방을 빠져나왔다. 희정이 나간 것을 느낀 정우는 대화를 진행시켰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죠?

  “회장님께서 올려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아뇨. 내일부터 저에게 도련님 운전기사를 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운전기사요?”

  “네. 그렇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신다면, 오늘 오전 사장님께서 도련님 학교에서 전화를 받으신 뒤 노발대발 하시며 저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랬었군요. 아버지께서 화를 내실만 하네요. 뜻이 있어 서울로 상경한 놈이 지각을 밥 먹듯이 하고 있으니….”

  자책하듯 내뱉는 그의 말에.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쉬십시오. 도련님.”

  “아저씨 우리끼리 있을 땐 말씀 낮추세요.”

  “아닙니다. 장차 사장님 뒤를 이어 회사를 도맡을 분에게 낮춤말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나오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김 기사는 정우의 집을 빠져나갔다. 그의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우는 시선을 거두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마음이 무거웠다. 아버지가 운전기사를 보냈다는 것은 그의 생활을 감시하겠다는 심사였다. 그것을 빌미로 운전기사를 보낸 것이다. 단지 김 기사는 그것을 숨기고 있을 뿐… 복잡한 상념을 깨운 건 전화벨 소리였다.

  “여보세요?”

  [정우냐?]

  “네. 아버지. 어쩐 일이세요?”

  [아비 망신을 그렇게 시키다니. 실망스럽구나.]

  “……….”

  [내가 너 지각하라고 서울까지 보낸 줄 아냐?]

  “죄송합니다.”

  [김 기사는 만나봤냐?]

  “네.”

  [내일부터 등하교를 시켜 줄 거야.]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행동 조심 해 주길 바란다.]

  “네…”

  [조만간. 나도 올라갈 생각이다. 그 때 보자꾸나.]

  “네. 그럼 들어가세요.”

  아버지의 전화였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정우의 손이 떨렸다. 아버지께서 올라오신다니… 떨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자신도 닮아버릴까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번 잘못한 일이라면 절대 용서치 않는 그런 분이셨다. 그러니 방금 전의 통화는 경고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다시 그 같은 일을 저질렀다간 뼈도 못 추린다는 그런 경고. 이제부터는 정말로 행동에 조심해야했다. 아버지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도록 말이다.


*     *     *


  얼마 전 아버지와의 통화 내용처럼 아버지는 얼마 후 서울로 올라오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로 이사를 오신 것이다. 얼마 전까지 공장으로만 운영되던 아버지의 사업이 점점 커지면서 서울에 본점을 창립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정우는 자취방을 벗어나 본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 버린 탓인지 본가에서의 생활은 지옥과 다름이 없었고 더불어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기 전 사업상 만나다 재혼하게 되어 같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여자는 그에게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왔다.

  ‘아마도 내가 이 세상에 아버지 자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 거다.’

  아버지 강 회장에게는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 다른 가족들처럼 같은 집에 정을 나눠가며 살아가던 가족은 못되었지만 5년 전 그의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뜨자 그 충격에 휩싸여 어머니가 남기고 간 유일한 유산인 회사도 내팽개치고 룸싸롱을 전전하며 방탕한 생활을 해오던 걸 보면 충분히 알고도 남을 일이었다.

  매일 밤 술에 찌들어 들어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정우는 이를 악물며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것이 그가 수재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강회장이 그러한 생활을 해오던 동안 회사는 부도직전까지 갔었고 돈이 들어올 구멍이 없자 사채를 끌어다 구멍 난 돈을 매구기를 수 십 번….

  다행히 회사가 정상화 될 수 있었지만 밤마다 유흥가를 거니는 생활은 여전히 계속 되어오고 있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회사 일도 착실히 한다는 것… .

  ‘그래도 아내가 남기고 간 회사는 살리고 싶었던 모양이지?’

  그렇게 한 번의 부도위기를 넘긴 회사는 점점 입지를 굳히며 급성장을 하며 마침내 서울로 이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우도 시골의 한 조그만 공장이 급성장을 하며 서울로 이전된다는 소식에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생각해 이젠 아버지와 가족다운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만 이사 당일 아버지의 옆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앙칼진 여자를 보는 순간 꿈은 유리조각이 깨지듯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인사 하거라. 새어머니시다.”

  강회장의 짧은 소개에 잠자코 서 있던 정우도 여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감히 어머니의 자리를 술집 년한테 내주다니 … 미쳤군.'

  그 후로 여자의 따가운 시선은 항상 정우를 향해 있었다.

  그녀의 따가운 시선을 꿋꿋이 받아내며 담담하게 잘 버티고 있었지만 그에게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삭막한 분위기가 계속 지속될수록 목울 죄어오는 고통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정말 이런 집에서 하루라도 더 있다간 아무리 넓고 좋은 집일지언정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았다

  “그렇게 쳐다본다고 제가 뻥 뚫리기라도 합니까?”.

  지금도 여자의 독기 어린 시선을 느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그녀의 시선을 무시해오며 그녀에게 말 한마디 전해오지 않던 그가 말을 건넨다는 것은 폭발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뭐 … 뭐야?”

  “아버지가 재혼하실 때 아들이 있다는 소린 안하셨나보죠?”

  정우는 여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고 여자의 표정은 악독스럽게 변해갔다.

  “근데 어쩌죠? 전 아버지의 아들이니 … 참 유감스럽게 됐습니다. 재산을 가로챌 기회를 놓치셔서… 제가 만약 없었다면 아버지의 재산의 반은 당신의 몫이 될 텐데 생각지도 못한 아들이 나타나 당신 계획을 무참히 짓밟고 있으니 이것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 …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당신을 사업상 만난 여자라고 소개했었지만 난 알고 있어. 술집 년이라는 것을 … 재산이 목적이라는 것도 … 미안하게도 난 아버지처럼 호락호락하지가 않거든. 그러니 개수작 부리지 말고 나가시지 여긴 당신 같은 매춘부가 머물 곳이 아니야.”

  여자는 정곡을 찔린 듯 멍한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보더니 이내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마 그를 이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릴 것이다. 그러기 전에 그가 먼저 이집을 나갈 생각이다. 그녀에게 협박을 하긴 했지만 순순히 나가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

  물론 그가 이 집을 나간다고 해도 아버지의 호적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이상 그는 영원한 강회장의 아들이니 … 지금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는 여자라 할지라도 재산을 전부 가로채고 달아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하더라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     *     *


  “아버지. 저 독립해 나가겠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저녁을 먹고 있던 강 회장은 뜬금없는 아들의 독립선언에 먹던 동작을 멈추고 우측에 앉아 밥을 먹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롭니다. 이 집에서 나가겠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

  “왜 가당치도 않은 소리입니까? 전 이제 독립해 나갈 나이가 되었고 아버지께서도 굳이 반대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하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 나가서 살겠습니다.”

  “그래요. 정우 이제 혼자 살아볼 시간을 줘야죠. 어차피 당신이 서울 올라오기 전부터 자취생활을 한터라 이 집이 좀 불편하다고 하더라구요.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엄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마음이 편하겠어요? 허락해줘요.” 

  여자는 이때다 싶었는지 강 회장에게 몸을 떨고 애교를 부리며 정우를 돕는 척했고 강 회장은 여우같은 여자에게 홀리듯 넘어가며 허락의 눈빛을 보였다.

  ‘완전히 홀리셨군요. 아버지. 그러나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언젠가는 저 여자가 아버지의 목을 사정없이 옭아맬지도 모르니 조심하시라구요. 이건 제가 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충고입니다.’

  정우는 아버지 강 회장에게 무언의 눈빛으로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했지만 강 회장은 그 눈빛을 발견하지 못한 듯 여자의 앙탈을 받으며 식사를 했고 그 모습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며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밖으로 나와 운전기사의 도움을 받아 좌석에 올라탄 정우는 문득 아버지가 어머님을 사랑하셨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어머님을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셨다면 어머님께서 돌아가신지 5년 만에 여자를 끌어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머님을 잊기 위한 방편이라 할지라도… 물론 지금 저 여자도 아버지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누굴 진정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는 냉철한 인간이었으므로.

  이런 생각에 미치자 아버지처럼 지저분하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굳은 신념이 생겨났고 아직 나이가 이르긴 하지만 희정에게 자신의 마음을 곧 고백하리라 마음먹었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너와 할 것이며 처음 사랑에 눈 뜨게 해준 희정에게 늘 감사하며 살겠다고 고백할 것이다. 그녀의 마음은 어떠할까? 날 좋아할까? 만에 하나 내 진심어린 고백을 어린아이 장난쯤으로 치부해버린다면… 아니… 아니다… 이런 생각 섣불리 하지말자. 애써 그렇게 다짐을 굳힌 정우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종잡을 수 없는 그의 마음을 표현이라도 한 듯 화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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