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은 누구십니까?
" 유채야, 퍼뜩 슈퍼가서 맛소금 쫌 사온나!"
" 돈복아~ 빨간 크레파스 있어?"
" 유채야, 엄마 지금 집에 계시니?"
" 저는 햇님 유치원 병아리반 이돈복입니다!"
사춘기가 되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된다고들 하지요?
하지만 난 5살 무렵부터
도대체 난 누군가.. 하는 질문을 스스럼없이 내던지곤 했습니다.
엄마, 아빠, 할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 사촌언니인 유진언니, 유미언니...
그리고 옆집 아줌마 등등..
이 분들에게 있어 나는 '이유채'로 존재하였고
유치원 선생님, 유치원 친구들, 우리 동네에서 하나 뿐인 박인호의원 의사선생님, 간호사언니,
동사무소 아줌마....
이 사람들에게 있어 나는 '이돈복' 이었거든요.
대체 난 유채입니까. 돈복입니까?
헌데 이왕이면 촌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는 돈복이 보단
좀 더 세련된 유채란 이름이 좋죠?
그래서 난 오로지 '이유채' 하나로만 살아가기로 결심했지요.
유치원 음악 시간.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동요를 배우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 당신은 누구십니까?" 노래하며 한 아이를 지목하면
지목당한 아이는 " 나는~ XXX~~~" 하고 화답합니다.
그럼 다 함께 " 그 이름~~ 아릅답구나~~~" 합창하는 식이죠.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최민혁. 그 이름 아름답구나.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정아람. 그 이름 아름답구나.
당산은 누구십니까? 나는 김진아. 그 이름 아름답구나...
드디어 내 차례가 왔어요!
백경희 선생님은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띄며 내게 다가왔지요.
" 당신은~ 누구십니까? ♬"
나는 스스럼 없이 화답해주었습니다.
" 나아는~~ 이유채."
순간 어리둥절해진 선생님은 " 응?" 하면서 내게 되물었고
노래는 맥이 뚝 끊겨버렸어요.
" 넌 네 이름도 모르냐?... 똥복이잖아. 이 바보야~!!!"
내 다음 차례이던 종철이가 크게 소리쳤고
우리 병아리반 아이들 일체히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 넌 네 이름도 모르니?'
내 이름..
그래요, 내 이름은 이유채가 아니라 이돈복이었던 거예요.
출생신고가 되어있고 호적에 올라있는 진짜 내 이름..
그 이름은 이 .돈. 복 ... 이었던 거죠.
- 아무도 외할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지
호적상 내 이름은 돈복이가 되었지만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난 여전히 유채로 불려졌지요.
23살이 된 지금까지도...
내 앞에서 깔깔거리며 웃던 아이들..
그 때 내가 느낀 수치심은 귀신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바지에 오줌을 쌌을 때 보다
더 큰 것이었어요.
사타구니에 진한 노란색 물이 점차 점차 번져가다 이내 흥건히.. 발 아래쪽으로 줄줄 흐르던
노란 액체때문에 선생님을 당황캐한 건 비단 나 뿐만이 아니었으니까요..
옴푹 파인 양변기에서 귀신 손이 삐죽 올라올 것 같다면서
화장실 가는 걸 무서워하던 민혁이도 그랬고
바지 내리는 타이밍이 늦는 바람에 옷을 입은 채로 일(?)을 치룬
아람이도 그랬어요.
하지만 이렇게 <창피한 이름>을 가진 건.... 나 뿐입니다.
아이들로 부터 놀림을 당하는 이름...
처음 내 이름을 듣는 아이들이 킥킥대며 웃는 이름..
그건
민혁이도. 아람이도.. 아닌 나 뿐이었어요.
오로지... 나 뿐....
그 뒤로 난 <예쁜 이름>을 가진 유치원 아이들이 다 미워졌어요.
같이 놀기도 싫어서
유치원 차를 기다리는 아이들 무리와 멀찌감치 떨어진 채
놀이터 구석에서 혼자 흙장난을 하고 놀았고
봉고차 속에 켜켜이 앉은 아이들 틈에서도 나 혼자 널찍이 떨어져 앉아있곤 했어요.
그렇게 며칠이 지나니까..
이상하게도.. 난 혼자 노는 것에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
숨바꼭질, 소꿉장난, 얼음땡놀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그 중에 혼자놀기가 가능한 건 아무 것도 없었죠.
좀 더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나를 비웃었던 아이들이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껴
" 미안해. 다신 안놀릴게.. 우리 같이 놀자." 하며 다가오면
난 못이기는 척 하고 슬그머니 낄 작전이었던 건지도 몰라요.
그런데 저 멀리.. 예닐곱명씩 무리를 지어 노는 병아리떼들은
날 한번 쳐다봐주지도 않고
자기네들 끼리 삐약삐약 거리면서 잘도 노는 거예요.
마치 나란 아이는 원래부터 이 유치원 안에 없었단 듯이..
괜히 겸언쩍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아이들에게로 다가갔어.
" 이.. 이.. 있잖아... 너.. 너.. 너희들... 뭐... 뭐.. 뭐해?"
하지만 어렵사리 내뱉은 내 말은
연기보다 빠르게 허공 속으로 숨어들어 갔고
날 향해 고갤 돌려 쳐다봐주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어요..
난 석고상처럼 한참동 그렇게 .. 가만히 서 있었어요.
아이들이 제각기 흩어져버리고 난 뒤에도..
<2> 말 좀 똑바로 해 봐 !!!
" 이 지지배가 대체 왜 이래! 말 쫌 똑바로 몬하겠니!! 진짜... 속 터지겠네. "
방빗자루를 거꾸로 쥐고 마주앉은 엄만
손잡이 부분을 내 허벅지에 대고 화가 난 듯 탁탁 내리쳤어요.
탁. 탁. !!!
" 으앙~~~"
" 여. 섯. 시. 삼. 심. 분!!! 이렇게 또박또박 따라해봐."
" 여...여...여..여...여섯시 사....삼십분!! .... 흑흑"
" 어이구~~ 참나.. 그 게 그렇게도 힘드니? .. 엉?....
다시 한번 똑바로 차근차근히 말해봐. 여.섯!!!"
" 여... 여.... 여섯!!..."
순간 어머니 손에 쥐어진 빗자루가 찰싹 찰싹 ...
내 몸을 인정사정 없이 타박하였어요..
찰싹. 찰싹.. 찰싹...
"으앙~~~~!!! "
" 네 애비, 애미.. 누구 하나 말 못하는 병신이라곤 없는데 네가 왜 이래?.... 엉?"
난 너무 서러워서 목놓아 펑펑 울었어요.
내가 똑바로 말하기 싫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고
엄마를 약올리려고 그러는 건 더더욱 아니고
어떤 낱말이 머리 속에서 출발해서 주욱 내려와 목구멍까지 다다르고...
맨 마지막, 입 속에 당도하면
두 입술이 시멘트를 바른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단단히 굳어져버리는데
그래서 하고자 했던 말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맥없이 윙윙거리는데!!
나도 그 게 너무 답답해서... 왜 그러는진 나도 잘 몰라서.. 미쳐버릴 것만 같은데
" 안. 녕. 하. 세. 요!!"
" 아... 아..... 아... 안녕.... 하... 하...."
찰싹. 찰싹. 찰싹... 으아앙..
하루에도 몇번씩 반복되는 보리타작.
하루도 빠짐없이..매일매일.. 계속되는 일과 중 하나가 되었지요.
엄만.. 어쩌면.. 이렇게 매를 들면서까지 가르치는데
언젠가는 내가 말을 잘 하게될 거라 굳게 믿고 있었던 걸까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 말문은 자꾸 닫혀져만 갔어요.
언젠가 다락방에서 자다 굴러떨어지면서 쿵쾅 쿵쾅... 수차례 나무계단에 머릴 찧은 적이 있는데
그 때 뇌가 이상해지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단 추측에서 부터
내가 귀신을 봐서 너무 놀란 나머지 어버버거리게 되었단 추측까지..
온갖 추측들이 난무한 가운데 난 점차 말 수가 적은 내성적인 아이가 되어 갔습니다..
http://www.cyworld.com/perry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