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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 花[설화] . . . [6]

悲... |2006.02.24 08:47
조회 957 |추천 0

[6] . . .

 

 

 


붉은빛으로 이글거리는 태양을 반쯤 삼켜버린 바다는 태양과 같은 붉은 빛이었다. 느껴지지 않을만큼 조금씩 조금씩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백사장엔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있었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짭짤한 소금기가 베어있는 차가운 바람도 함께했다. 그렇게 3월의 바다는 찬미가 기억하고있는 그대로 여전히 슬프고 외로워 보였다.

삼년전 찬미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때도 바다는 지금처럼 가슴저리도록 슬프게 울고있었다. 그 눈물에 발을 담그고 서럽게 울고있는 바다를 위로하며 찬미는 바다와 함께 목놓아 울었었다.

삶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워서… 자신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현실이 두려워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난이 힘겨워서 찬미는 울고 또 울었었다.

 

"그런 내게 당신이 다가왔었지…."

 

삼년전 그날처럼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던 찬미가 철썩이는 파도에게 얘기했다. 너무도 소중하고 소중하여 입밖으로 꺼내면 사라질까 두려워 가슴속 깊이 뭍어두었던 그날의 기억을 너또한 아직도 간직하고 있느냐고….

그녀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잔잔하던 파도는 조금쯤 거세게 그녀의 작고 하얀 발등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런 바다를 바라보며 찬미는 웃음지었다.

바다는 삼년전 그날의 기억속으로 그녀를 초대했고 찬미는 슬픈 미소로 초대에 응한다.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에 찬미의 작은몸은 온통 젖어있었다. 차가운 바닷바람과 끝임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그리고 쉼없이 쏟아내는 눈물로 그녀는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겨울의 바다처럼 차가운 낮은 저음의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일어나"

 

거부할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이끌려 모래사장에 어린아이 처럼 주저앉아 서럽게 울고있던 찬미의 고개가 그 목소리의 주인인 남자를 향해 들려졌다.

이곳에 오기전까지 한올의 흐트러짐 없이 정리되어 있었을 남자의 머리는 바람에 날려 흐트러져 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비지니스 슈트는 잘 다듬어진 남자의 몸을 멋지게 감싸주고 있었고 자신을 향해 명령하듯 내뱉은 그의 입술은 고집스레 닫혀있었다.

단 한번의 거절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듯 서늘한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가 찬미를 향해 내리꽂혀 있었다.

무엇일까? 처음보는 남자의 눈동자에서 찬미는 절대로 길들여 지지않는 야생마를 떠올렸다. 거부할수 없는 어떠한 힘을 느꼈고 그와 동시에 남자의 당당함에 감춰진 쓸쓸함을 읽어냈다. 이상하게도 그것을 느끼는 순간 찬미의 눈물은 거짓말 처럼 멈춰버렸다.

찬미는 남자의 명령대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마주 바라보는 대신 고개를 돌려 넓은 바다를 바라봤다. 왠지 그래야 할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건 그녀만의 착각 이었을까? 그때 찬미가 일어나 바다를 바라봐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바다가 아름다운건 누군가의 추억이 늘 함게하기 때문일거다. 이곳에서 어떤이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소중한 추억을 내려놓고 갔을테고, 또 어떤이는 지금의 너처럼 혼자선 감당하기 힘든 기억을 내려놓고 갔겠지. 누군가는 여기에서 희망을 얻어갔겠지만 또다른 누군가는 저 푸른 바다에 뛰어들어 죽음을 얻어갔을거다."

 

옛날얘기를 들려주듯 한템포 느린 나즈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찬미의 귓속을 파고들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가늠할수 없는 남자의 눈동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남자는 그렇게 찬미와 함께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넌 이곳에서 무엇을 내려놓고 또 무엇을 얻어갈거지?"

 

남자의 짧은 물음에 일렁이는 바다에 고정되어 있던 찬미의 시선이 남자의 옆얼굴로 옮겨갔다. 한동안 아무런 대답없이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찬미의 마음이… 그럴수 없이 복잡했다.

이 남자에게 난 무어라 대답해 줘야 하는 것일까? 난 정말로 이 바다에 무엇을 얻고자 달려왔을까? 병든 어머니를 병원에 홀로 눕혀놓고 어머니의 병원비와 학비를 벌기위해 잠한숨, 끼니조차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동생을 버려둔채 무엇을 얻으려고….

더이상 흐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눈물이 또다시 여자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여자의 눈물을 남자는 마주 바라봐 주었다.

 

"너 스스로 벽을깨고 나오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널 위해 단단한 벽을 대신 깨주지 않을거다. 너 스스로 강해지지 않는다면 아무도 널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을거야. 광활한 대지위에 살고있는 맹수들도 강한자만이 살아남듯 치열한 세상속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무조건 강해져라. 네 힘으로 일어설수 없다면 힘이있는 자를 어떻게든 네편으로 만들어. 그게 법칙이다."

 

누군가를 이용해서라도 강해지라는 잔인하도록 냉정한 남자의 말에 찬미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처음보는 내게 이런말을 하는거죠? 그냥 못본척 지나칠수도 있었는데…."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는 찬미의 심장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힘차고 격정적으로 뛰고있었다. 그런 그녀의 심장소리가 들린다는듯 남자는 여자의 물음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널 살아 숨쉬게 하고 싶다. 그 누구도 아닌 나로인해!"

 

"……!"

 

무엇때문에? 이토록 초라하고 가진것 없는 나에게 무엇을 얻고 싶어서? 처음보는 내가 어떤 여자인지도 모르는 당신이 왜 내게? 남자에게 당연히 물어야할 질문들은 찬미의 마음속을 휘젖고 다닐뿐 언어가 되어 입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남자는 너무도 당연한듯 자신의 지갑에서 자신의 명함을꺼내 무엇인가를 적어 찬미의 손에 쥐어주었다.

 

"선택은 네가 하는거다."

 

그리고… 남자는 찬미에게서 멀어져 갔다.

 


호텔의 룸넘버가 적혀있는 성민의 명함을 받아들고 무엇인가에 홀린듯 혹은 어떠한 힘에 이끌리듯 그녀 스스로 그곳을 찾았을때…. 불안함과 수치심에 덜덜 떨고있던 찬미를 한번의 망설임도, 단 한마디의 말도없이 그가 자신의 품안에 안았을때…. 남자를 처음 받아들인 그녀가 피곤에 지쳐 잠들고 난후 단 한장의 메모도 없이 그저 하룻밤 쾌락의 댓가로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수표를 확인했을때…. 그 밤이 성민에겐 거래였겠지만 찬미에겐 힘겨운 사랑의 시작이었던 그밤에…. 그녀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 지도 몰랐다.

자신은 그가 원할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줘야 하는 존재인것을…. 절대로 그에게 자신은 사랑 할수도 감히 사랑 받을수도 없는 존재인것을…. 그것을 알면서도 사랑했다. 사랑해 버렸다. 어리석게도….

 

 


그래요, 당신 말처럼 선택은 내가 한거였어. 내가 원해서 나스스로 당신에게로 간거였어. 나에게 단 한번도 당신을 사랑하라 강요한적 없었는데 내 마음이 당신을 사랑한거야. 떠나고 싶을땐 언제든 떠나도 좋다 얘기하는 당신곁을 떠나지 못하고 끝까지 당신주위를 맴돌며 질척거린것도 나였어. 내가 이렇게 아픈건 나때문인데…. 당신을 원망할 자격조차 없는 나인데…. 그런 나인데도 당신이 참 밉네요.

이렇게 버릴거면서 영원히 당신곁에 머물지 못하게 할거면서 왜 당신을 내 마음속에 품게 했나요. 아무것도 주지않고 상처만 남게 할거면서 왜 내게 사랑이란 감정을 흘렸나요. 차라리 못본척 그냥 지나쳐 주지않고 왜 내게 그런말을 했나요!

당신이 죽으라 하지 않아도 당신없인 이제 숨조차 제대로 쉴수 없게 되어버린 나인데…. 삼년전 당신의 말처럼 오로지 당신으로 인해 숨쉴수 있게 되어버린 나인데….

그래도 당신을 향한 원망은 가져가지 않으렵니다. 좋았던 기억만, 아름다웠던 추억만 가지고 갈꺼에요. 추억이 있어 아름다운 바다에서 당신말대로 난 소중한 추억을 내려놓고 죽음을 얻어가려 합니다. 내게… 이것만은 허락해 주세요.

 


꿈을 꾸듯 흔들리는 찬미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아름답게 미소짓는 그녀의 입술끝을 적신다.

조금쯤 거세게 파도치는 바다가 마치 두팔벌려 그녀를 감싸안아 주듯 그녀의 여린몸을 적시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 바다를 향해 걸어들어가는 찬미의 머리속으로 성민과의 추억이 한편의 영화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저 바다끝… 이젠 태양을 완전히 삼켜버린 바다끝에서 이상하게도 성민의 목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처음부터 네가 있어야 할곳은 이곳이었다고 그러니 망설임 없이 어서 오라고 네가 품을수 있는 모든것을 품에안고 이곳에서, 이제그만 편히 쉬라고…. 한번도 들은적 없었던 너무도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쫒아 찬미의 무거운 발걸음이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 지고 있다. 어느새 그녀의 어깨까지 차오른 바닷물이 그녀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었지만 너무도 평온해 보이는 찬미의 표정이 아름답다.

 

'내가 갈께요. 당신에게로 내가 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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