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 없는 주택가를 비추던 카메라에 한 여인이 들어온다. 고층 빌딩에서 떨어진 것같은 자세로 엎어져 있던 여인은 갑자기 일어나 두리번거린다.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깨진 휴대폰과 지갑 따위를 만지작거리다 걷기 시작한다. 두려움에 휩싸인 창백한 얼굴, 김혜수다.오는 23일 개봉하는 한국·태국·홍콩 3국 합작 공포영화 ‘스리(three)’ 중 김지운 감독의 ‘메모리즈(memories)’에서 김혜수는 낯설다. 그래서 더 매혹적이다. 달라진 김혜수가 궁금했다. 검은 블라우스 차림으로 블랙커피를 마시는 그에게서 영화 속 매력이 묻어났다.
“영화 무섭더라, 봤어요?”(기자)
“아유, 제가 원래 무서운 영화를 못 보거든요. 첫 시사 때는 소리가 무서워서 귀막고 봤는데 김 감독이 음향점검 좀 해달라고 해서 두번째는 꾹 참고 봤죠. 오싹하던데요. 그런데 저 쓰러진 포즈 멋있지 않아요?”(김혜수)
역시 밝다.‘메모리즈’의 변신이 새삼 놀랍다.‘김혜수의 새로운 발견’이라 부를 만하다. 고층 아파트와 공사장이 혼재된, 휑한 느낌의 신도시와 포장만 그럴싸할뿐 속으로 곪은 중산층 가정의 문제를 미스터리 호러형식으로 풀어낸 이 영화에서 ‘건강 섹시 발랄한 김혜수’는 없다. 그 대신 ‘불안 창백 혼란의 김혜수’가 있다. 배우가 직접 소리 지르고 놀라는 공포영화식 표정연기 대신 혼돈스러운 분위기로 묘한 공포감을 자아낸다.
김혜수는 무엇보다 김지운 감독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 번 강조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저를 봐준 게 무척 감사하죠. 제 안의 다른 모습들을 끄집어내줬거든요.”
‘당당함과 자신만만함’의 대명사 김혜수도 아쉬운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다른 캐릭터에 대한 욕구였다. “제작자들이 김혜수에게 원하는 건 섹시, 건강 뭐 이런 만들어진 이미지의 차용 같은 거죠.” 한마디로 변신할 기회가 없었다. 온몸에서 뿜어내는 자유로움에 비해 ‘깜보’에서 ‘닥터 봉’‘찜’‘신라의 달밤’으로 이어지는 필모그라피는 비슷비슷해 아쉬움을 준 게 사실이다.
“데뷔 이후 철 들고나서 처음으로 편안하게 연기했어요. 대사 한마디 없는데 말이죠.대상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김 감독 덕분이에요. 규격화한 연기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도 알게 됐어요.”
김 감독에 대한 찬사기에 “처녀 총각인데 그러다 스캔들 나겠다”고 놀렸더니 “아직 안 났느냐”며 유쾌한 웃음을 날린다. STV 토크쇼 ‘김혜수 플러스유’에서 익히 발휘됐던 순발력 있는 말솜씨에 한방 먹었다.
32세. 그 또래가 흔히 하는 미래계획을 묻자 “없다. 지금 잘 사는 게 중요하다. 현재가 미래로 이어진다”고 주저없이 답한다. 과거 몇 년과 앞으로의 몇 년이 인생의 아름다운 시절임을 아는 그는 결과물보다 일하는 과정의 즐거움을 누리기로 했다. 커피를 계속 리필해가며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으냐”고 기자보다 더 이날의 데이트에 열성을 보인 것만 봐도 그렇다.
“연기욕심이 이제서야 샘솟는다”는 김혜수. 원작 뮤지컬을 보러가고 싶을 만큼 재미있게 봤다는 록뮤지컬영화 ‘헤드윅’의 주인공 같은 파격적인 역을 해보고싶다니 욕심의 강도를 알 것 같다. 김혜수의 변신이 ‘스리’와 10월 개봉예정인 휴먼코미디 ‘YMCA야구단’를 거쳐 쭈∼욱 계속된다면 우리 영화계도 더 건강해질 게 틀림없다.
성정은기자 moira@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