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수고했다, 이제 그만두란다지…‘늙은 아버지’최불암

김지영 |2002.10.25 09:03
조회 237 |추천 0

TV에서 고향이 사라진다. 시청률이란 ‘불도저’가 정든 땅, 정든 언덕을 밀어내고 있다. 낡았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것들이 낯익은 풍경을 몰아낸다. 지도엔 없지만 우리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 양촌리. 순박한 사람들이 땀과 눈물로 적어가던 ‘전원일기’의 일기장이 이제 덮어지려 한다.

“전원일기는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야. 농촌현실을 제대로 못그린다고 하는데 드라마가 어디 농사교본인가. 전원일기는 우리 마음에 농사짓는 법을 알려주는 거야. 종영이 최선책인지 모르겠어. 다른 대안도 많을텐데 왜 연구들을 안하는지…”

이젠 따로 노인 분장이 필요없는 김회장역의 최불암(62). 마흔살에 시작, 22년 동안 양촌리 김회장으로 대한민국의 아버지상을 그려온 그는 ‘전원일기’ 종영 방침에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가 마루에 앉아 “파!”하고 웃기만해도 우리 마음이 환해지고, 그가 말없이 아들의 어깨를 다독거릴 때마다 무뚝뚝하지만 속깊던 우리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던 전원일기. 그 드라마가 ‘소재 빈곤, 시청률 저조’란 이유로 내년초에 막을 내린다는 소식에 그는 목이 메는지 자꾸 헛기침만 한다.

 

요즘은 주요 내용이 그의 손자 세대인 영남, 복길 등의 사랑이야기로 바뀌어 그는 그저 “오냐” “수고했다”란 대사뿐이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연출자가 바뀔 때마다 “최선생님, 너무 화면이 지루하니 좀 자리를 바꾸시죠”라고 제안했지만 고집스럽게 방 아랫목을 절대로 내놓지 않는다. 어머니(정애란 분)조차 밥먹는 장면에서나 잠시 앉아있고 부인(김혜자)이 아플 때도 그 자리에 눕지 않도록 했다. 아랫목이란 표현을 위해 장판이 오래 땐 군불에 조금 탄듯 보이도록 갈색 스프레이를 뿌린 다음 반들반들하게 문지른 것도 최씨의 아이디어다. ‘간 큰 남자 시리즈’가 유행할 때도 그는 아랫목을 굳게 지켰다.

 

그는 이 드라마가 생활교과서란 마음으로 연기를 해왔다. 어머님께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 마루에 올라서서 신발을 제자리에 정돈하는 것, 그리고 밥상에서 숟가락 드는 것 하나하나를 시청자들은 물론 외국인들까지 보고 한국문화를 배우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선거운동 때 3개월을 비운 것 외엔 22년을 지킨 전원일기. 이제 실제로 며느리도 보고 전원일기가 처음 시작될 때의 김회장 나이와 같아져 최불암과 김회장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그. 최의원, 최반장(‘수사반장’), 캡틴박(‘그대 그리고 나’) 등의 숱한 호칭 가운데 자신의 성도 아닌데 ‘김회장’이 가장 편하다는 최불암. 그래서 스무해 넘게 입어온 김회장의 옷을 벗어야 하는 종영소식이 더더욱 쓸쓸하기만 하다.

“사실 김회장이란 무게가 너무 무거워 지긋지긋할 때도 있었지만 아버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텼어. 요즘은 너무 젊은작가들이 쓰니까 줄거리도 그렇지만 대사도 영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아. 어른들이 쓰는 말이 따로 있잖아. 전원일기는 삶의 신산함이랄까, 인생을 좀 아는 중후한 작가들이 써야 하는데. 하긴 뭐 끝나는 마당에 이런 불평이 다 무슨 소용이야”

 

최불암만이 아니라 ‘전원일기’의 가족들은 모두 실연당한 모습이다. 10년 전 폐암선고를 받고도 안방을 지켜온 할머니 정애란은 종영 결정 소식에 “마지막 회에서 곱게 숨지는 장면으로 ‘순직’하고 싶고 극중에서라도 ‘그 할머니 곱게 살다 가셨다’는 말을 듣고싶다”고 밝혀 후배들을 울렸다. 맏며느리 고두심은 “종영결정을 듣고 계속 녹화를 하자니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연습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한숨을 내쉬던 어머니 김혜자는 “인터넷에 전원일기 폐지반대 모임까지 결성됐다”고 하자 이렇게 구시렁댔다.

“그러게 진작 좀 많이들 보지…”

고향을 등진 우리들은 이제 ‘마음속 고향’마저 등지려 한다. 우리 시대 어머니와 아버지의 주름살도 깊어만 간다.

 

 

-[취재수첩]그래도 유일한‘고향프로’였는데…전국 시청자들‘폐지반대’목소리 높여-

“전원일기는 어머니와 아들, 우리 가족 3대가 함께 보는 유일한 TV프로입니다. 이젠 방송에서조차 농촌과 고향을 느낄 수가 없다니 너무 안타깝습니다”(38세 직장인)

“고향이 미치도록 그리울 때마다 전원일기 비디오를 빌려보며 향수를 달랬습니다. 그래, 이맘때면 모내기할 때다, 우리 마을 호박도 저렇게 탐스러웠는데 하면서요. 이제 전원일기가 끝나면 어디서 고향을 찾아보나요”(48세 재미교포)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종영 결정에 전국의 남녀노소 시청자들과 해외동포까지 폐지 반대에 가세하고 나섰다. 하루 평균 5, 6회 미만의 사연이 올라오던 전원일기 인터넷 게시판에는 종영방침이 보도된 후 “전원일기를 살려달라”는 호소 등 매일 수백여건의 글이 빗발치고 있다. 또 다움 등 인터넷 카페에서도 전원일기 종영반대 모임들이 속속 결성되고 있다.

청소년 시청자들도 이구동성. 한 중학생은 “서울에 살지만 ‘전원일기’를 통해 농촌현실과 정겨운 풍경을 보고 배웠다”며 “불륜·폭력을 다룬 드라마는 오락프로에서까지 선전을 해주면서 전원일기는 늦잠을 자거나 교회에 가면 못볼 수밖에 없는 일요일 아침에 방영하며 시청률을 따지는건 모순”이라고 꼬집었다. 시청자들은 평일 저녁으로 방영 시간대를 옮기고 농촌현실을 제대로 아는 역량있는 중견작가를 기용하면 시청률이 올라간다고 제안한다. 또 등장 인물이나 시대 배경 등을 변화할 수 있는데 노력도 하지 않고 폐지결정을 내리는 것은 방송사의 횡포라는 의견들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폐지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입장. 김승수 TV 제작1국장은 “매우 유감이지만 내년 가을쯤 부활시킬 새 농촌드라마를 기대해달라”고 밝혔다. MBC측은 ‘전원일기’ 종영에 즈음해 22년 결산 하이라이트 방영과 김회장집 할머니의 100세 생일잔치로 맺는 결말, 소품·사진전 이벤트 개최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흙을 지키며 흘린 땀방울이 졸렬한 영농정책으로 배신만 당해온 우리 농촌. “22년간 청춘을 바쳤는데…”라는 ‘전원일기’ 출연진들의 한숨이 우리네 농촌과 너무 닮아 있다.

 

 

 

경향신문

추천수0
반대수1

공감많은 뉴스 연예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