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들은 내일부터 가야하는 학교 때문에 일찍 잠이 들었고, 누나는 조카들을 나에게 맏기고는 아는 집사님 댁에 김「?가지러 갔다. 평소에는 한국가게에서 사먹지만, 김치가 다 떨어져 간다는 누나의 푸념을 듣고는 같은 교회에 다니시는 할머니 한 분이 김치를 주겠노라고 가지러 오라고 했단다. 공짜로 얻는 김치라서가 아니라, 정말 김치다운 김치를 먹을 수 있게 됐다면서 너무 좋아하는 누나다.
금방 온다던 누나는 찾아간 집에서 수다 꽃이 피었나 부다. 조금 늦을 거란다. 아이들의 안부만 묻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곳은 어린 아이들을 혼자 집에 내버려 두는 것이 불법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항상 같이 동행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어른이나, 베이비 시터와 함께 있게 해야 한다. 내게 아이를 맡긴 누나는 오랜만에 짧은 자유를 누리고 있을게다. 매형 없이 혼자서 아이들 돌보고 살림하자니 어디 혼자만의 시간이 있었겠는가. 날이 어두워졌지만 누나의 귀가는 늦어지고 있다.
커피 한잔이 생각났다. 원두커피가 든 커다란 빨간색 통을 찾고, 흰색의 주름진 거름종이를 끼우고, 투명의 수돗물을 받아 커피메이커에 채우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버튼을 누른다. 오랜 기간동안 거의 매일 해온 동작이건만, 오랜만에 해서인지 왠지 서툴고, 생소한 느낌마저 든다. 나는 커피 중독자다. 아니 중독자였다. 몇 달 동안 커피를 입에도 안 댔으니 말이다. 대신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으니 또다시 담배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를 알게 된 것도 커피 때문이였다.
대학원 졸업 후 선배의 소개로 시내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가르친다는 것이 내 적성에 맞는다는 걸 알았다. 때 마침, 강남의 한 입시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대학 동기의 제의가 있었고, 그때부터 투 잡이란 걸 뛰게 되었다. 일주일에 이틀은 강의를 몰아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나머지 날들은 강남에서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입시관련 과목을 가르쳤다.
가르친다는 게 적성에 맞는다고는 하지만, 하루 종일 서서 떠들다 보면 다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때론 목소리가 잠기기까지 했다. 그래서 늘 입에 달고 산 게 커피였다. 동료 강사들은 다른 차를 마시라고 권했지만, 피로도 풀고, 잠긴 목도 부드럽게 하는데 에는 커피만한 것이 없었다. 그날도 잠시 강의가 없는 시간을 틈타 학원 건물에 붙어있는 스타벅스에 갔다.
커피를 주문해서 받아들고는 어디에 앉을까 두리번거리다 오후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았다. 아픈 목을 어루만지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무엇인가 잊어버린 듯한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깜빡하고 핸드폰을 강의실 교탁 위에 두고 왔다. 누가 가져가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커피와 들고 온 교재를 자리에 내버려둔 채 서둘러 강의실로 올라갔다. 다행히 핸드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핸드폰을 챙겨 만지작거리며 다시 커피숍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열려고 밀던 커피숍의 유리문에 무엇인가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에 가있던 고개를 재빨리 드는 순간, 누군가 들고 있던 take-out 커피컵이 내용물을 쏟아내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커피컵을 쏟은 그 사람의 옷은 커피로 얼룩졌고, 뿐만 아니라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그 사람의 핸드폰도 쏟아진 커피로 인해 온통 커피 투성이였다. 말 그대로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너무 황당한 사건이였다. 잠시 멍하니 서있던 나는, 허리를 굽혀 떨어진 커피 컵을 줍고, 옆에 있던 휴지를 한 뭉치 집어 그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괜찮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못보고,,,,,,,,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죄송하단 말을 해야 했다. 커피에 얼룩진 블라우스와 치마는 둘째치고라도, 핸드폰이 커피에 젖어 버렸으니 정말 큰일 이였다.
“저기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데 없으세요? 죄송합니다.~·”
아무 말 없이 휴지를 집어 옷에 묻은 커피를 닦아내는 그 여자에게 다시 한번 죄송하단 말을 하고, 뜨거운 커피에 데이지는 않았는지 다시 물었다.
“아~~, 괜찮아요. 저도 앞을 제대로 못 보았는걸요.”
옷과 핸드폰에 묻은 커피를 닦아내며 그녀가 말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안절부절하며 서있는 내가 안되 보였는지, 짧은 미소로 괜찮다며 다친 데는 없다고 말해주었다.
핸드폰과 세탁비에 대한 변상을 하겠다고 말했지만, 옷은 빨면 되고, 핸드폰은 작동이 안되면 수리를 맡기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옷만 그랬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핸드폰은 분명 작동될 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 받고는 그 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그때, 그 곳에서, 그녀를 그렇게 만났다. 그 당시에는 너무 당황한 탓에, 그녀에 대한 인상이 어떻고, 외모가 어떻고 그런 걸 느낄만한 여유가 없었다. 다만 ‘오늘은 재수 더럽게 없는 날이구나’ 하고 일진 탓만을 하고 있었다.
2006년 4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