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새로 맞췄습니다.
도수도 많이 바뀌었고 기분 전환도 할 겸...
테도 마음에 들고 렌즈도 잘 맞는 것 같은데
문제는 시력이 몹시 안 좋은 탓에
경제적 부담이 심각하다는 겁니다.
대체 다음 달까지 뭘 먹고 살지.
======================독자분들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살....(퍼억) =======================
철수
- 만약 이 일이 잘 되면
같이 프로방스로 여행을 떠나자.
보랏빛 라일락 들판에서 향기에 취해 휘청거려도 보고
꽃밭에 누워서 뒹굴어도 보자.
하늘에 태양이 얼마나 찬란히 빛나는지
풀숲을 지나는 바람이 얼마나 상쾌한지
온 몸으로 느껴보는 거야.
탁자에 마주 엎드려
두 손을 포개 잡은 철수와 선희는
앞으로 펼쳐질 행복한 앞날을 그리며 빙긋 웃었다.
보랏빛으로 출렁이는 라일락꽃의 파도,
아늑히 멀리 펼쳐진 지평선과 하얗게 밝아오는 여명.
그 모든 것들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철수
- 떠나기 전엔 흰색 드레스를 사자.
눈이 부실만큼 하얀 순백의 드레스를...
자긴 흰색이 어울려.
선희 - ...... 그럼 자기는?
철수 - 난.... 자기만 있으면 돼.
선희 - 피... 나도 자기만 있으면 된다, 뭐.
철수 - ...... 사랑해.
선희 - ... 나도.
이 세상 어느 연인들보다 자연스럽게
사랑을 속삭이는 두 사람을 보는 순간
가슴 한 쪽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기억 - 쿡...쿡쿡쿡.
박사는 늘.... 이런 기분으로 웃고 있던 걸까.
난 잠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손으로 눈가를 덮어 기분을 진정시키고
다음 등장을 준비했다.
배경은 자정의 거리.
불안한 마음에 철수를 따라 나온 선희가
그의 손을 꼭 잡고 어스름한 무대 한 쪽에서 등장했다.
선희 - 여기서 만나기로 한 것 맞아?
철수 - 약도를 보면... 여기가 맞는데.... 아, 저기 있나 보다.
선희 - 응? 어디?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조금 밝아지는 무대 반대편.
그곳엔 내 흰색 가운 끝자락이
희미한 조명 속에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철수 - 저... 실례지만..... 오늘 아침에....
박사 - 아.... 와주었군요.
철수 - 예, 저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박사 - 쿡쿡..... 근처에 좋은 술집이 있거든요. 자세한 이야기는 그곳에서...
난 여전히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철수를 유인하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선희의 손을 놓고
앞서 다가오고 있는 철수,
그가 어느 정도 사정거리에 들었다 싶은 순간
난 슬며시 조명이 비추는 곳으로 걸어 나왔다.
선희 - ........히익?!
내 모습이 보이는 순간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옅은 비명을 삼키는 선희.
선희는 온힘을 다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선희 - 철수씨!!!
철수 - 응?
그녀의 절박한 부름에
철수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내 손엔 예의 검은 단도가 들려 있었다.
필사적으로 철수를 향해 뛰어오는 선희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시 나를 돌아보는 철수.
철수 - ..... 흑?!
그때 이미 내 단도는 그의 등을 꿰뚫고 있었다.
더듬더듬...
자신의 가슴과 등 중
어디를 만져야 할 지 고민하던 철수의 손은
이내 힘을 잃고 밑으로 축 늘어졌다.
풀썩 무릎을 꿇고 앞으로 쓰러졌다가
옆으로 완전히 누워버리는 철수.
선희는 그런 그의 몸을 감싸 안으며
절망적으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선희 - 안돼, 안돼! 안돼, 철수씨, 안돼, 안돼....
보랏빛 프로방스.
그리고 새빨갛게 물든 현실.
선희는 자신의 손에 묻어나오는 붉은 피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손을 치맛자락에 닦아내며
철수의 몸을 일으키려 했다.
선희 - 왜..... 왜.... 왜........
기억
- 쿡쿡쿡......이미 보지 않았나.
내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다.
이제 한 명만 더 있으면 돼.
후우..... 하아.....쿡쿡쿡.
난 당혹감에 거칠어진 숨을 푹푹 내쉬며
천천히 그녀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선희 - .......
선희의 시선이 천천히 나를 따라 움직였다.
끝까지 철수를 품에서 놓지 않은 채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
연기라기에 그것은 너무나 잔인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이 무대에 서기 전까지만 해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했잖아.
어째서..... 내가 그런 표정의 널 봐야 하는 거야.
다른 공간에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나의 사랑.
그 순간,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서
지독한 이질감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민아가 아니다. 그녀는 선희일 뿐....
이 연극이 끝나야지만.... 민아는 내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 빌어먹을 연극이 끝나야지만...
난 천천히 단검을 머리위로 들어올렸다.
선희를 죽이고, 민아를 되찾기 위해.
선희 - 철수씨를 살려줘요.
단검을 막 내려치려는 순간,
그녀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만약 그녀가 말하는 게 1초가 늦었다면
난 대본과 무관하게 그녀를 향해 단검을 꽂았을 것이다.
선희
- 내 생명이 필요하다면 줄게요,
그러니까... 철수씨를 살려줘요.
박사 - ...... 진심인가?
선희 - 그래요.
두려움도,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
그 다부진 의지에 눌린 난
주춤주춤 물러서 그녀를 겨누던 단검을 내렸다.
그때 답답하다는 듯 무대로 뛰어나오는 악마.
악마
- 뭐하는 거야! 어서 저 여자를 죽여!
그리고 은하와 행복하게 사는 거야!
박사 - 그래....은하..... 은하를 살려야 해.
잠시 잊었던 목적을 다시 일깨우는 악마의 말에
난 늘어뜨렸던 단검을 다시 굳게 거머쥐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 앞을 막아서는 천사.
천사
- 안돼요! 이제라도.... 이제라도 그만 둬요.
이런 희생 위에 이룬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리 없다고요!
박사
- ....... 그래도 난 행복해질 거야.
다시... 예전처럼... 행복하게 살 거야...
천사
- 당신이 늘 말했잖아요, 이제 와서 돌이킬 순 없다고!
과거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와서 돌이킬 순 없어요!
박사
- 난... 대가를 지불했어.
아홉을 죽이고, 그 장기와 사지로 은하를 고쳤지.
그러니까.... 다시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어.
천사 - 당신은 변했어요, 이젠 더 이상 그 때의 당신이 아니예요.
박사
- 쿡쿡쿡...... 바뀐 건 없어.
난 은하를 사랑했고, 지금도 은하를 사랑해...
그러니까 꺼져!! 모두 사라지라고!!
더 이상 날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천사와 악마가 사라진 무대 위,
다시 선희에게 접근한 난 단검을 든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선희 - 약속해줘요, 철수씨를 살려주겠다고.
박사
- 쿡... 그게 무슨 소용이 있지?
어차피 죽으면 끝이야,
철수가 살아나건 말건, 너와는 상관없다고.
선희 - 아뇨, 상관있어요.
박사 - 어째서?
선희 - 사랑하니까.
그녀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박사 -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다는 건가.
선희 - 다른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게 사랑이니까...
박사
- 그런가..... 난.... 내 자신을 못 버렸군.
그러니 이렇게 될 수밖에.
이제야 뭐가 잘못됐는지 깨달은 난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넌지시 물어보듯 중얼거렸다.
박사 - ..... 그거 알고 있나? 넌 내 아내와 닮았어.
선희 - ....
박사 - 내게 사랑한다 말해주겠어?
핏빛 추락을 기다리는 길로틴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는 단검 아래
선희는 아랫입술을 다져 물었다.
선희 - ....... 사랑해요. 여보.
박사 - .... 나도 당신을 사랑해.
난 웃었다. 선희도 웃었다.
그리고 난 내 가슴을 향해 단검을 찔러 넣었다.
선희 - ...... !!
박사 - 허....허억.....은하야 사랑해,... 미치도록... 사랑한다.
짧은 순간, 잘못된 사랑과 후회스러운 과거.
그 모든 것을 용서 받으려 몸부림치는
박사의 마지막 감정이 격정적으로 온 몸을 휘감았다.
지금 바닥에 떨어지는 붉은 물감이
참회의 눈물처럼 가슴에 와서 박혔다.
털썩......
파도 앞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쓰러지며
철수의 가슴에 단검을 옮겨 꽂는 나.
철수 - 허억?!
선희 - 철수씨!!
철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뜬 순간
선희는 그를 와락 끌어안으며 눈물을 쏟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부축하며 무대에서 퇴장하고
홀로 무대 위에 남겨진 나.
기묘한 자세로 거꾸러진 채
조용히 피 흘리며 죽음을 맞이하는
말 그대로 쓸쓸한 최후.
서서히 사그라지는 조명 속에 내 모습이 희미해져갈 때 즈음
다시 무대 양쪽에서 천사와 악마가 등장했다.
악마 - ....바보 같은 녀석.
천사 - 잘 했어요...조금... 늦긴 했지만.
악마 - 네 녀석 때문이야.
천사 - 이제 넌... 물러갈 때가 되지 않았나?
악마 - ....칫.
악마가 퇴장하고....
내 머리맡에 조심스레 무릎을 꿇는 그녀.
흰색 베일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넓게 퍼졌다.
천사
- ......여보... 여린 당신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요.
이젠 헤어지지 말아요, 언제까지나.. 영원히.... 사랑해요.
그리고 그녀는 날개로 알을 품듯
천천히 나를 감싸 안았다.
어두운 무대 안 은은한 핀 조명이 우릴 비추었다.
그 순간 코끝이 찡해온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박사... 당신은.... 구원받았다.
그렇게.... 연극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