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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사랑 (29장/ 사랑의 법칙) <실극화>

지금처럼만 |2006.06.07 13:16
조회 174 |추천 0

 

시간을 확인하고 나자 약속시간보다 이십분은 지나고 있었다.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짜증이 치솟았다.

언니와 앉아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약속시간마저 잊어먹은 것이다.

너무 이야기에 몰입해 버렸다.


레스토랑 풍차가 보여 발검음을 늦춘 유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이곳으로 약속장소를 잡은것이 후회스러웠다.


마땅히 정할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풍차의 위치도를 말해준 것이다.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자책한 유미는 입구에 도착해서 조금 쉬었다 들어가기로했다.

어둑하게 변한 밤거리가 또다른 꿈을 꾸려는지 낮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머? 유미야 너 아직 안들어가고 뭐하는거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바라보니 오늘 동행하기로 한 친구 조은진이었다.

사회에서 만나 이년째 친구로 지내는 그녀는 마른 체형에 발랄한 모습이어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지만 유미에 비하면 철이없고 아이 같았다.


경험이나 성격등 모든면에서 차이가 났다. 유미를 자주 쫒아다니려 애썼지만

유미에게는 은진이 마냥 피곤한 친구였다.

겁이 많고 소심한터라 같이 다니면 모든것을 의지하려고해서 가끔 짜증이 났다.


"응 왔어? 너도 늦었네? 벌써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숨이나 돌리고 들어가려고 이러고 있다. 이제 들어가자."


"그런데 친구들은 착한거지? 아니면 나 그냥 갈래."


이정도였다. 피곤한 스타일이라는게 유미의 결론이었지만 지난번 석호와의 만남때

영진이라는 친구가 하도 졸라대기에 은진을 나오라고 했지만 사실은 석호와 영진을

오늘 혼자 만나기 싫은 핑계가 더 컸다.


"계집애가? 그렇게 겁나면 엄마품에서 안겨 살지 뭐하러 걸어다니면서 살아?"

"그런가? 춥다 어서 들어가자."


풍차 안으로 들어서자 석호와 영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필 앉아도 저곳에 앉아 있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난번 추림과 동석했던 바로 그자리였다.


곧장 다가간 유미가 인사도없이 석호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말고 다른곳으로 옮겨 앉자. 얼른 일어나서 따라와."

"왔어? 아무데나 앉지 뭘 옮겨 옮기긴? 그냥 여기하자. 전망도 좋은데."


"난 싫어. 오던지 마음대로 해!"


유미가 퉁명하게 말하고 곧장 몸을 돌려 다른곳으로 가자 석호와 영진이 뚱한 얼굴로

어깨를 으슥거리며 일어났다.


오늘은 목요일이다.

평일인데 어쩐일인지 석호가 오전에 전화를 해와 무작정 찾아온다고 했다.

와서 전화를 한다고 하고는 막무가내식으로 전화를 끊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하는수 없이 나온것이다.


"얜 친구 조은진. 그리고 이쪽은 김석호. 이쪽은 김영진씨. 인사들 해."


유미가 서로를 소개하자 서로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한 그들이 멀건이 유미를

바라보았다. 어쩌란 것인지.


"술들 마시던지 배고프면 밥먹던지 알아서 시켜."


유미의 냉냉한 말에 석호가 영진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술이건 밥이건 나중에 먹고. 유미 너 왜 이러는데? 지난번부터 너 어딘가 고장난

여자처럼 굴잖아? 어디 아픈거야? 아니면 찾아온게 기분나쁜거야?"


"신경꺼줄래? 술이나 마셔!"

"쳇. 니가 왜그러는지 맞춰볼까?"


빈정되는건지 장난인지 석호가 유미를 바라보며 조금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듣고 싶지않아. 그냥 신경쓰지 말아줘. 나 멀쩡하니까!"

"전혀 멀쩡한 모습이 아니잖아? 너 추림 생각하지?

연락도 안되고 그러니까 걱정되는거지? 그게 아니라고 말할려고?

니 얼굴에 딱 써있어! 이추림이 걱정된다고."


김석호! 사람을 잘못본 것일까?

마음이 넓고 따듯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기어이 하고싶은 말을 무작정

다해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였던가? 설사 그것을 알고 있다고해도 남자라면 그정도는

숨겨주거나 모른체 해 줄수도 있는 문제인데 보기보다 째째하다.


"이추림? 유미씨도 추림을 알고 있어요? 그놈은 모르는 사람이 없네?

마당발인가 아니면 전국구 바람둥인가?"


영진이 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유미가 영진을 노려보았다.


"어?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말아요. 전 그냥 한 말이니까요. 신경쓰지 마세요."


그냥 한 말인것은 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 꼭 저렇게 끼어들어 분위기를 더 이상하게 만들 필요는 없는것이다.

추림이 바람둥이면 자신은 바람둥이의 좋은 놀이감이라도 된단 말처럼 들리는 것이다.

 

"아니면 말고. 니가 추림을 남다르게 생각하는거 같아서 한 말이다. 나랑 있으면서

그놈을 생각하는게 싫어서 한 말이니 아니면 미안하고. 그만하지 뭐."


김석호 넌 참 너무 앞서가는 남자다.

하룻밤 같이 보냈다고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물론 기분나쁘겠지 나도 나와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생각하거나 한다면 당연히

기분이 좋을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뿐이다. 기분이 나쁠뿐이지 다른것은 아니다.


마치 자신의 소유나 전유물로 여기는건 도대체 어느나라 식이고 사고인지 이해가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세상의 남자들은 그 자신들의 여자가 한둘이

아닐텐데 살아가는 모습은 왜 한여자일까?


"술들 안마셔? 술이나 마시자!"


영진이 호탕하게 소리치며 테이블위에 놓여진 메뉴책을 펼쳤다.


하필 왜 이곳이란 말인가! 다른곳도 있을텐데, 기분이 우울했다.

그와 연락이 안된지 수주가 지나간다. 이러다가 정말 아주 연락이 끊길까봐 두려웠다.


자신이 석호와 잔 사실을 알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실망할까? 당연이 그러겠지? 미친년... 아무리 막나가는 인생이라도 자신을 그렇게

값싸게 내던지다니... 바보같은 짓이었다.


자신이 혹시 욕정에 미친 색녀일까? 아무 남자나하고 자길 즐겨하고 주저하지 않는

그런 여자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것일까?


그는 다른 남자하고 틀리다. 만나도 알릴리 없지만 우연히 알게 된다면?

그는 어쩌면 이해하거나 숨겨줄수도 있는 남자였다. 아니면... 뭐 상관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니 욱하고 반발심이 생겼다.

그도 결국엔 위선자고 똑같은 부르조아같은 남자일수도 있으니까...

내가 왜 그에게 죄책감을 느껴야하고 미안해 해야 하는데? 웃긴다! 언제부터 그에게

내가 맞춰가면서 살려 했는지 이건 너무 웃긴 일이다.


사는게 뭐 별건가? 길가다 잠시 쉬어가고 다른 길로도 갈 수 있는것이 사는건데,

내마음이 편한데로 살면 그게 삶이지 뭐가 달라?

사랑? 내가 언제 그것을 믿었던가? 정말 너무 웃기고 또 웃긴 일이다.


봐! 연락도 안되잖아.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자신에게 연락도 하지 않는 그런 무정한

남자인데 자신은 이게 뭐야? 왜 자신이 그를 기다리고 걱정하고 석호와의 일로 자책감과

추한 마음을 느껴야 하는데? 왜? 웃겨 정말! 난 나데로 살면되는거야 그뿐이야!


잊어버리면 되지 뭐가 두려워? 그래 잊는거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흔적마저 없앤다면

아무렇지도 않을거야. 목멜필요 없잖아? 그래 어자피 이렇게 되는것이 수순이었어.

만나고 섹스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그게 아니면 뭐야? 잊지 뭐......


"김석호! 술 안시켜?"

"어 그래? 뭐로 주문할까?"


영진과 메뉴책을 들여다 보며 주문할 것을 고르고 있던 석호가 깜짝놀라 대답했다.


"독한 술로! 조니워커로 시켜! 안주는 약간 기름진 것으로 하고."


유미는 그렇게 말하고 금새 아차했다.

방금전까지 속으로 추림을 잊겠다 다짐했는데 또 추림과 연관된 것들을 찾고 말았다.


술과 안주는 금방 나왔다.


"이거 어떻게 마시는거야? 그냥 마시면 되는건가? 영진이 너 아냐?"


석호가 조니워커를 들고 입구를 개봉하며 영진에게 물었다.


"이건 뭐하러 시키냐 비싼건데?"

"새끼가 니가 돈내냐? 내돈내고 내가 먹겠다는데! 이럴때 이런거 먹어보지 언제

먹어보냐? 안그래?"


"하긴... 그런데 이거 추림이 좋아하는건데 이거 말고 버번인가 그 종류를 자주 마셨고..

또 뭐더라? 음... 맞다! 보드카! 러시아제 전통술! 엄청 독한건데... 그래 옵솔루트다.

그걸 추림이 즐겨먹었데 한 이삼년 되었다는데 난 못먹겠더라 엄청 독하고 이상해서.

술하면 그놈이지. 척척박사다. 나도 버번인가하는 종류를 처음 알았고 먹어봤다.

난 양주면 다 같은 것인줄 알았는데 종류만 수백가지가 넘는단다."


영진이 석호에게 술병을 빼앗아들고 추림에게 듣게된 이야기를 꺼냈다.


"이리 줘봐요. 이걸 마시는 방법은... 얼음을 이렇게 채우고 그위에 술을 따라서 살짝

흔들어요. 그리고 첫잔은 십초이내에 마셔주래요. 한번 한잔씩 마셔봐요."


유미가 추림에게 배운데로 술을 믹스해 건네주었다.


"음... 난 똑같은데? 에이 그저 소주가 제일인데! 안그러냐 석호야?"

"아니 난 이게 더 좋다. 기왕이면 좋은 술을 마셔야지 임마!"


"아니 그런데 은진씨는 술 못해요?"

"예. 전 맥주밖에 못 마셔요."


"아니 그럼 말을 하시던가 해야지요? 가만있으면 누가 가져다 준데요 참 나."


영진이 술잔을 들지도 않고있는 은진에게 물었다가 그녀가 술을 못마신다고 하자

웨이타를 불러 맥주를 따로 주문했다.


영진은 피부가 뽀얗고 아기처럼 매끈했다. 성격고 활달하고 밝았다.

웃음이 많고 말을 무척 재미있게 하는 편이라 여자들에게 호감을 살만한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키가 작은것이 흠이었다.


유미는 자신이 믹스한 술을 마셔보고 실망했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 건넨 추림의 술맛은 이렇지가 않았다.

양주 특유의 독하고 쓴맛 보다는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끝맛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이 술맛은 쓰고 독한 맛 그대로였다.


어느새 추림의 습관을 배워가고 있는 자신이라 생각했다. 그의 색깔을 닮아가려했고

향기에 취해가려했다. 추림은 콜라나 쥬스류의 음료는 입에도 안된다.

오로지 물과 무가당 음료만 마셨다. 그는 고기보다 야채류를 즐겨먹었고 스낵대신

과일을 무척 좋아했다.


마른체형이면서 지구력이 강하고 기운도 보기보다 엄청나게 쌨는데 음식을 먹을때

그는 수십번도 더 씹어서 섭취하면 그렇게 된다고했다.

자신이 그를 닮아가고 있다. 그의 흉내를 내려고 했고 습관을 가만히 되집어가면서

하나 하나 기억하려 애쓰고 있다.


술잔을 들고 조용히 홀짝거리던 유미는 석호와 영진이 은진에게 말을 건네면서

농담으로 호감을 사려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또다시 추림을 떠올렸다.


그는 농담과 우스개 소리를 할때도 조용하고 진지했다.

저렇듯 큰 몸짓과 과장된 움직임을 극히 절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목소리가 부드럽고

낮았다. 성격이 급한 편이면서도 자신을 통제하려는 노력은 그가 생각이 얼마나 깊은

남자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였다.


가만히 있다가 한마디 툭 던지는 말들은 온통 시같았고 어느 소설에서 나오는 구절같아

가끔 놀라게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리웠다. 잊으려... 피하려 해야 하는데 그가 몹시도 그리웠다.

그와 같이 있으면 시간은 너무 짧게 지나가고 무료한것을 몰랐다.


회사로 찾아갔어야 했는데... 어쩐지 여사무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 같아서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자신이 너무 안이한 행동을 한것 같았다.


문득, 수연이 떠올랐다.

지난번 그렇게 헤어지고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어 연락을 한번도 못했다.


술에 정신없이 취해 석호에게 안기다시피 한채 헤어졌었다.

그 모습을 보고 수연은 자신을 비난하고 추하다 여길지도 모른다.

자존심이 강하고 깐깐한 김수연에게만큼은 빈틈을 보이지 말아야 했는데,

자신이 실수했다.


학창시절 맡언니 같이 행동했던 수연은 자신과 비교의 잣대가 되곤 했었다.

밝고 활동력이 강한 수연과는 반대로 조용하고 지켜보기를 즐겨했던 자신은 묘한

경쟁의식 같은 사이가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서로가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수연이 자신을 욕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미 추림을 좋아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을텐데... 그때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같은 여자로서 한쪽이 다른 모습을 지니면 다른 한쪽을 맹비난 하는 습성을 지닌

여자들이다.


수연이 추림과 혹시 연락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부담이 덜되고 허물없는 사이일테니 지금이면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그녀에게 전하해서 물어보면 순전히 알려줄까?


김수연! 난 안다. 그녀도 추림을 남달리 생각하고 있음을.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여자의 느낌은 대충 웃고 넘길것이 아니다. 유독 추림의 이야기만 나오면 긴장하고

침묵하는 너... 눈빛이 뜨거웠고 정이 가득했다.

그것을 아니라고 한다면 넌 정말 이중인격자겠지?


자존심이다. 강한 자존심이 부정하는척 하지만 결국에 그것으로인해 힘들어지고

후회하는 일이 많을 것이다.


"나 전화좀 하고 올께. 술들 마시고 있어."


유미가 일어나며 말하고 홀로 나섰다.


"어 그래! 야 유미야 너혹시? 아니다. 빨리와라 분위기 타는 중이니까."


석호의 말을 철저히 무시하기로했다.

날 너의 여자쯤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난 나일뿐이고 누구의 소유물이

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설사 사랑한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일것이다.


김석호 오늘 넌 나와 자고싶겠지? 하지만 한번뿐이야.

날 그렇게 가졌으면 이제 그만해도 될거야. 네가 만약 끝까지 참아주고 지켜주었다면

넌 더 멋지고 좋은 남자가 될수도 있었지만 넌 스스로 포기했고 실패했으며 성급했어.


사람은 다양한 선택을 한다.

내가 만약 추림을 잊고 다른 사랑을 해야 했다면 그것이 네가 될수도 있었어.

하지만 김석호 넌 그 가능성마저 잃어버렸다. 날 못되고 더럽다 욕해도 돼!

몸을 가져도 마음은 못주겠어. 이게 여자거든... 멍청한...

여자를 그렇게 단순하게 대하려 하다니 너도 결국 졸장부였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차례는 없는거야.

홀 한쪽에 놓여진 공중전화에 다가가니 이미 한 여자가 전화를 사용하고 있어 조금

기다렸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전화벨이 한참을 울린끝에 누구낙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연의 목소리다.

심호흡을 한 유미가 수화기를 입에 댔다.


"여보세요? 수연?"

-누구? 유미구나? 어쩐일이니? 잘 지냈어?-


밝은 수연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응 잘지냈어. 너도 잘지내고 있지?"

-그럼. 난 항상 똑같지뭐.-


한동안 이런저런 잡담으로 통화를 이어나갔다.


-그날 잘들어갔니? 많이 취한거 같아서 걱정되더라.-


예상한 말이지만 가슴이 뜨끔했다.


"응. 조금 늦게 들어왔어. 왜 먼저갔니? 난 술 깨느라 조금 늦게 왔어."


거짓말이지만 어쩔수 없었다. 친구지만 숨길것은 숨겨야했다.


-그랬구나. 다행이야. 밖인거 같다. 음악소리가 들리는데? 누구 만나는거야?-

"응. 아는 사람좀 만나고 있어."


하나같이 마음에 안드는 질문만 해오고 있다.

자신은 계속해서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한다.


-좋겠구나! 한가하게 놀고 있으니.-

"좋긴 뭐. 그냥 일 때문에 만나는건데 뭘... 수연아 사실 나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거

있어서 전화했어.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고."


-그래? 아니야 말해봐. 들어줄께. 대답할 수 있으면 해줄께.-

"그래 고맙다. 그냥 다른게 아니고 추림씨하고 연락 되는지해서.

연락해본지가 오래되고 지난번에 석호가 한 말도 있고... 갑자기 생각나서 말이야."


정작 어려운 말이지만 술술 잘도 흘러나왔다.

수연이 잠깐 말없이 침묵했다. 유미는 수연이 알고 있음을 눈치채고 말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전에 네게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 너 추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대답해 줄래? 이거 진지하게 물어보는거야.-

"......!"


이번엔 유미가 침묵해야했다. 의도가 무언지 살필 필요도 없다.

이기회를 이용해서 자신과 추림의 관계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대답하기로했다. 죄지은 것도 아니고 언젠가 알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 추림씨 좋아해. 추림씨도 그렇고... 미안해 이런말... 듣고있니?"


침묵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동전히 한번 떨어지고 날때까지 수연은 말이 없었고 유미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침묵을 지켰다.


-너 추림을 좋아하고 있는거 대충 알고 있었어. 하지만 추림이 너를 좋아한다는건

정말 놀라운 말이다. 내가 좀 당황스럽고 기분이 그렇다. 어쨌든 고마워.

솔직하게 말해 주어서. 나 이틀전에 추림을 만나고 왔어.-


수연의 말에 유미의 가슴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과연 왜 여지껏 연락이 안됐고 정말

여자 문제로 소식이 끊겼었는지 알 수 있게 된것이다.


"그랬구나! 그는 잘 있는거야?"

-유미야. 이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내가 하는 말 잘듣고 너도 생각해봐.

거짓을 말하거나 보태서 하는말 아니야. 어떤 오해가 있을수도 있고 좀 엉뚱한 일

일수도있어. 알았니?-


무슨 의미인지 이정도 말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일단 듣고 판단할 일이다.


"그래 알았어. 난 듣고만 있을께 말해봐."

-이틀전에 추림의 회사로 전화를 했었어. 몇번이나 해도 안되길래 뭔가 있다고

생각해서 마구 따지고 들었거든, 그래서 결국 추림의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수연의 말이 흘러 나오는 동안 유미는 입을 틀어막고 쏟아지는 눈물과 흐느낌을 최대한

감추려고 했다.


* * *


"그만 들어가봐야 하는거 아니에요?


목발을 집고 기우뚱하게 선 추림을 이시연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석양이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날이 저물어가고 있는 오후무렵이었다.

하루종일 날이 음침했다가 저물어 갈때쯤 날이 개였다. 그 덕에 오랜만에 붉고 노랗게

저물어가는 겨울의 석양을 볼 수 있었다.


추림은 달랑 환자복에 외투 하나만 걸친 채 한시간여를 병원 정원에 서 있었다.

이렇게 거동하기 시작한 것은 어제부터였다. 처음 섰을때 심한 현기증을 느껴 쓰러질뻔

했었는데 이제는 목발을 짚고 곧잘 걸어다녔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기겁해서 말렸는제 추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멋대로였다.

선주는 점심무렵 추림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추림의 집과 병원을 오가고 있었다.

불안한 생활이다. 곧 개학을 앞두고 있어 할일이 많을테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이시연이 초밥을 사들고 조금전에 찾아왔다.

벌써 네번째 방문이었다.


추림은 그녀가 오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고 이시연도 특별히 참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추림의 머리가 무척이나 길어져서 목 아래로 쳐져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릿결을 나붓기게 만들며 지나쳤다. 그림을 그리다가 머리모양이

방금전 바람에 쓸리는 것이 어울려 다시 그리기 시작한 시연은 추림의 얼굴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석양의 노을빛이 환상처럼 느껴진다 생각했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요. 이십분이면 되요."


벌써 두번째 말이지만 조금 있으면 또 들어가봐야 하는거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전 이렇게 노을이 사라져 가는 시간을 가장 좋아해요. 많은것을 주고 약속하는거

같아요. 아무리 힘겹고 어려워도 저 노을을 바라보노라면 기운이 나고 작은 희망을

느낄 수 있을거 같아요. 보세요! 수시로 변하는 모습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확연히

변하면서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잖아요."


추림의 얼굴 형태가 그려지고 눈과 코 입이 차례로 생겨나며 어느정도 그를 닮아가고

있는 그림은 추림의 실제 모습보다 더 선이 가늘고 날카로웠다.


"어릴때 전 가끔 이렇게 노을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들어가곤 했어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그리운 것도 노을에서 보곤했죠. 노을의 생명은 길어야 한시간

안쪽이지만 그 순간은 정말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고 가지요. 제 가슴속에 저런것과

비슷한 노을이 수백개는 들어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당연히 안믿어요! 전 추상적인거는 멀리하는 편이에요. 시시하죠. 현실 그대로만

믿고 반영하죠. 미신도 안믿고 꿈따위는 더더욱 안믿어요."


시연의 말에 추림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려했다.


"움직이지 말아욧! 그대로... 아니 조금더 돌려요. 됐어요. 좋아요. 그렇게."


다시 고개를 원 상태로 돌린 추림이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은 매우 차갑습니다. 그 마음 제게 들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거짓말인거 다 알아요. 원래 자신을 냉정하게 포장하려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그렇지가 않죠. 그런 약한 자신의 모습을 강하게 보이려고 흉내내는것에 불과하지요."


"아니요. 전 원래 이렇게 태어났어요. 부모님이 물려주신 재산이죠. 전 만족하고있고

변하고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요. 자 다 되어가네요. 조금만 더."

"그래서 아직 남자친구가 없는거예요? 스믈여섯이면 시집가서 아이가 둘쯤은 있을

나이면서 당신이 얼마나 어리게 보이는지 알기나 하세요?"


"내가 추림씨보다 어른이고 난 여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어른에게 그런 말은

가당치 않고 여자에게 또 그런 말은 실례인거 몰라요?"

"그렇게 어른이어서 제게 찾아와 이야기 해달라 떼쓰고, 여자라서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 화장실까지 따라오는 건가요? 전 그런 여자가 있다는 말 못들어 봤는데요?"


"단지 난 어른이고 여자라는 말이지 그것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며 살고 싶지는 않아요.

아셨어요? 이추림씨? 아 짜증나네!"

"짜증이 나요? 왜 그럴까요?"


시연이 말하다 말고 짜증난다 말하면서 정말 그런 얼굴을 하고 추림을 바라보았다.

추림도 고개를 돌려 마주 응시했는데 혀를 불쑥 내밀어 약올리는 모습이었다.


"야! 너 나안테 누나라고 불러. 자꾸 요요거리고 씨씨 거리니까 이거 능글거려서

못해먹겠네! 알았어?"

"결국 그거였어요? 그런데 어쩌지요? 전 여자를 누나라고 부르지 못해요.

친누나나 혈연관계외에는 그렇게 불러보지 않았어요. 제가 싸가지 없다거나 버릇없다고

생각하려면 마음데로 하시던지... 그것도 싫으면 아주 좋은 방법이 있는데 들어 볼래요?"

 

"말해봐... 세요."


추림의 어려운 점이 저것이었다.

농담을 해도 진지하게 하는것,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느껴지는 분위기여서 어떻게

대해야할지 종잡을수가 없는 것이다.


"저를 그만 찾아오는겁니다. 아주 좋은 방법인데 어때요? 사실 이유도 모르고 찾아올

까닭도 없잖아요? 안그래요?"


"아니 전혀 안좋은 방법인데? 난 계속 찾아올거고 이유야 아주 그럴듯한 것이 있지.

내가 미쳤다고 귀중한 시간 버리면서 먼길을 달려오는줄 알아?

어때 이유를 들어볼거야?"


"흠. 재주가 좋네요. 어느새 말을 놓아버리고 말입니다. 좋아요 그건 인정해 드리지요.

이제 이유에 대해 들어볼까요?"


"잠깐만... 이제 터치만 하면 되니까... 이거 끝나고 말해줄께!"


한동안 연필을 부지런히 놀리던 시연이 십분쯤 지나서 스케치북을 들고 다가왔다.


"어때? 멋지지? 사실 이정도 그림은 아닌데 내가 솜씨가 워낙 출중하지 않겠어."


멋졌다. 환자복을 입고 외투를 걸친 한 남자가 바람을 맞으며 석양이 지는 하늘을

올려다 보는 배경의 그림이었는데 고독하면서도 무언가 그리워하는 느낌이 강렬하게

살아있는 그림이다.


"이게 나예요? 생각보다 못하네요. 여기 턱선은 실제 나보다 더 날카롭고.

코는 더 두드러지고 눈썹은 더 길고... 결정적으로 내 입술은 보시다시피 이렇게 두툼한

남자의 표상같은 것인데... 이놈은 계집처럼 얇고 가느네요.

땡! 사십점 밖에 못드리겠어요."


"말도 안돼! 내 그림실력은 홍익대에서도 특채로 입학시키려던 실력이라고!

너무 오버하 는거 아니야?"

"알았으니까 이제 이유나 말해봐요."


추림이 특유의 큰 웃음을 보이며 말하자 시연이 귀엽게 마주웃었다.


"좋아. 귀좀대봐. 가만있어봐. 몰래 이야기해야 재밌는거니까. 치사하게 피하지말고."

"놀릴거면 그만둬요!"


"아니야 놀리는거. 듣기싫어? 그럼 말고."

"좋아요. 하지만 놀리지는 말아요."


시연이 추림에게 다가갔다. 추림과 거의 엇비슷하게 큰 키는 그녀가 구두를 신은

덕이었다. 추림은 그리 큰 키가 아니다.


"뭐야하면... 나 니가 아주 좋아! 네게 반했어. 이렇게 해보고싶어."


추림의 귀에다 대고 소곤거린 시연이 추림의 볼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


"호호! 얼굴 빨개진거봐! 무슨 사내가 그만한 일로 그렇게 부끄러워하누... 남자맞어?"


정말 얼굴이 벌개진 추림이 시연이 입맞춘 볼을 문질러 닦고 시연을 화난 얼굴로

노려보았다.


"장난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거 성희롱인거 아세요? 정말 이러기에요?"


시연의 행동들은 모두 당혹스럽고 느닷없는 것들이었다.

힘겹게 화장실을 들어가니 따라 들어와 도와준다고 하고 옷을 갈아입으려니

선주대신 나서려하고 밥을 먹을때도 먹여주고 싶다는둥 너무 막무가네였다.


마치 진화한 선주를 보는것 같았다.

하지만 선주보다 더 구체적이고 도전적이면서 원색적이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멋대로 구는데는 기막힌 재주를 타고난 여자였다.


"나 놀린적 없다. 이건 내 진심이고 마음인데, 그렇게 모독하다니 이렇게 로맨스를

모를수가 있다니! 좀 더 배워야겠다. 내가 많이 가르쳐 줄께 기대하라구!"

"뭐예요! 말도 안되는 소리 마시구 도대체 진짜 이유가 뭐예요? 하루같이 찾아와서

선주의 심술만 잔뜩 돋구고 가고... 대체 뭘 원하는거냐고요?"


"두말하게 만드네. 난 이추림 네가 마음에 들어! 여자로서 남자인 네가 마음에 든다고!

이해가 안가? 다시 말할까? 난 여자고 넌 남자지? 고로 우린 이성이고? 나한테 넌 연구

대상이고 남자란 말이야 알아들어?"


"......?"


"왜 안돼? 다른 여자는 돼고 난 안되는거야? 그건 말이 안되는거고. 내게도 기회를

줘야 하잖아? 그렇지? 칼을 든 건달들에 둘러쌓이고도 굴하지 않던 그 사내대장부의

넓은 마음으로 내게도 기회를 줄거라 믿어! 이거 장난 아니다!"


"그러니까 왜 저를 마음에 들어하냐고요? 다른 남자들 투성이고 나같은 놈은 하루만

찾아 다녀도 열트럭쯤은 골라낼텐데? 지금 장난하는거죠?"


"또 장난이라고 한다! 아무리 남자들이 많아도 세상에 이추림은 한명이지.

난 그 이추림이 마음에 들어. 아니 멋져! 이추림이 싸우는 장면을 처음부터 목격하고

반해버렸지. 이건 내 자유니까 하지말라, 싫다 강요할 생각마! 내 의지니까!"


추림은 이시연을 이해할 수 없는 여자라고 규정해버렸다.

자신의 어디가 어떻다고 이렇게 뻔뻔하게 구는지 도대체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신을 좋아하는것은 그녀의 말처럼 그녀의 자유이고 막을 권리는 없다. 하지만 너무

웃긴 일이다. 자신을 얼마나 알고 이해한다고 처음 보고 좋아하느니 멋지니 한단

말인지 어거지로 들렸다.


짜증이 났고 귀찮았다.

놀림당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그럴거라고 생각한 추림은 목발을 짚고 몸을 돌렸다.


"가려고? 같이 가야지. 내가 부축해줄께!"

"관두실래요?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역시! 이추림씨는 그런 강한 카리스마가 어울린다니까! 자 이렇게 하자. 어때 편하지?"


추림의 곁으로 다가와 한쪽 목발을 빼앗고는 왼팔을 들어올려 자신의 어깨에 걸치는

그녀였다. 몸을 기대지 않아 기우뚱거리는 것이 불편했다.


"제가 혼자 갈께요. 그냥 두세요."

"누나가 말할때 들어. 괜히 좋으면서 튕기긴!"


"......!"


골치가 아파진 추림은 인상을 와락 구기고 하는수 없이 그녀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상대하기 귀찮아진 것이다.


석양이 완전히 기울여져가는 오후... 바람은 여전히 차갑고 날은 을씨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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