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입시, 그 중에서도 미대, 그 중에서도 발상과 표현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사진은.... 내가 한창 입시하던 때에 오른손이 엄지손가락 빼고 전부 살갗이 벗겨져서 쓰리고 아파서 홧김에 찍었던 것. (푸하하)
지금 생각해보니 난 어이없는 오기를 가지고 있었다.
입시 말 쯤 되면 손이 아파서 그리을 못그리게 되니까, 손을 잘 보호해야 되는건데, 입시 초부터 "빨리 손이 까져야해!!" 이러면서 이를 악물고 종이에 문질러 댔었다. 무슨 생각으로 한 행동인지...
어쨌든 그렇게 수백, 수천번 문지른 손은 파스텔이 지워지지도 않아 거뭇거뭇 지저분해지고 피부가 벗겨진 손은 굳은 살이 베길 틈도 없이 또다시 터지고 터지는 반복이었다.
덕분에 1년, 2년 발상을 준비한 아이들보다 단지 4개월 준비하면서 더 빨리 진도를 뺄 수 있었던게 아닐까, 생각이 된다.
(3학년 10월 중순부터 발상과 표현을 시작했으니까.)
처음 학원을 옮기고 파트를 옮겼을 때의 그 긴장감.
석고 수채화, 석고 소묘를 그리던 잔재가 남아있어 터치가 보이는 수채화랑 거친 연필선은 수도 없이 지적을 받고 고쳤었다.
하나씩 하나씩 예쁘고 뽀얗게 파스텔을 깔 수 있을 때의 그 기분.
처음 미술을 시작할 때, 물을 많이 써서 터치가 죽는다고, 그걸 고쳤었는데 다시 물을 많이 써서 붓터치를 없애야 할 때, 그 지난날을 떠올려 순식간에 해냈을 때의 그 기분.
지우개라곤 4B연필 사이에 대고 문지르고, 포인트를 주고, 명암을 만들어 새카맣게 만드는것 밖에 몰랐던 내가 모서리를 세워 효과를 주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걸 배웠을 때의 그 기분.
처음 발상을 시작할 때는, 나 혼자서 뒤에 앉아 발상을 시작할 수 있게 기본을 배우고 다른 친구들을 바라만 봤었는데 어느새 하루하루 따라잡아 그 애들을 제치고 가장 많이 벽에 걸린 그림의 주인이 되었을 때의 그 기분.
원서를 쓰고, 꼼꼼하게 체크된 머릿속 생각들과 도구함을 가지고 든든한 자신감으로 시험장으로 들어설 때의 그 기분.
자리를 뽑는 자리표, 그렇게 해서 앉게 된 자리, 내 행운의 숫자였고 시계를 깜빡했던 나에게 정면으로 벽시게가 또렷히 보이는 자리가 걸려서 뭔가 잘될 것 같다는 나만의 그 기분.
주제가 나오고.. 정말 운이 좋게도 그렸던 그림들 중에 주제에 맞게 써먹을 수 있는게 생각이나서 30분만에 밑그림을 다 그리고, 초벌을 깔 때의 그 기분.
그리고...... 몇시간 동안 학원도 못가고 안절부절 하면서 발표를 기다렸을 때, 모니터를 가득 메우는 합격 발표.
불과 수능이 끝나고, 11월 중순부터 1월 중순까지, 2개월 동안 내가 겪었던 수많은 생각, 기분의 교차.
슬럼프에 빠져 내 맘대로 그려지지 않는 그림을 붙잡고 참 많이 울었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마음껏 울고 싶었는데 마땅히 생각나는 사람도 없고, 선생님에게 호소하기엔 너무 내 존재가 약해지는게 싫어서,
일하고 계시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던 적도 있다.
살색이 아닌 빨갛게 피로 물든 손가락 끝을 바라볼 때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손이 부들부들 떨려 견디지 못했을 때도 있다.
일주일에 한장씩 그림을 그려오다가, 하루에 한장, 4시간에 한장, 점점 시험에 맞춰 수업은 진행되고, 그에 맞춰 하나씩 망가지는 내 몸.
계속 서서 그림을 그리느라 허리가 너무 아파서,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왔는데도 열이 펄펄나 시야까지 몽롱했을 때도, 집에 가고싶어 까마득한 정신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어도 나도 모르게 손은 움직이고 있고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국민대 입시가 끝나고, 나군과 다군을 준비하면서,
하나씩 들려오는 친구들의 불합격 소식과 점점 안좋아지는 상황에 위축되기 싫어 외면하고 모른척 했을때도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터지는 울음으로 부모님께, 가르쳐주셨던 선생님께, 담임선생님한테, 친지들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내 합격소식을 알릴 때의 그 기분.
그걸로 겨울 내내 어디에도 못가고 힘들어도 힘든 내색 못하고 아파도 참고 이를 악물고 견뎌낸 입시가 모두 보상된다.
손가락이 심지어 엄지까지 벗겨지고, 나중엔 손바닥, 손등, 팔까지 만신창이가 되어도 한숨한번 쉬고 다시 그림위로 엎어져 문지르고 또 문지르고.....
빨리 낫게 하려고 바세린을 잔뜩 바르고 면장갑을 끼고 잠들었던 하루하루가, 그렇게 간신히 아물려고 하는 손을 다시 새하얀 종이에 문질러서 하나씩, 색을 입힐 때...
얇아져서 여려진 손끝이 결국 찢어져 종이에 피가 베어 나올 때.
정말 눈물이 나고 포기하고 싶었던 그때...
그랫던 때가 어느덧 일년전 얘기가 되어 간다.
내가 유일하게 바라던 것을 얻기위해 정말 힘겹게 싸워왔던 날들.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바빠서 지칠 때도 그 때를 생각하면서 견디고 또 견딘다.
지금쯤 나의 모습을 다시 되밟고 있을 후배들아.
힘내자.
참고, 참고, 또 참는 방법밖엔 없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도 우린 다른 이과, 문과 학생들에 비해 바쁘고 힘든 날들을 보내야 하지만, 이미 발을 들여놓았고 우린 우리만의 길터를 이미 다지고 있잖니.
솔직히 말하면, 난 내 최고의 목표였던 국민대에 입학하고서도 디자인이라는 전공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입시때 했던 고생들, 그때의 그 부푼 꿈과 참아왔던 아픔들을 생각하면서 좀 더 버텨보자, 떨어지고 떨어져서 나에게 남겨진건 바닥밖에 없다고 해도 좀 더 버텨보자고 생각해.
그만큼 입시는 짧은 시간에 큰 존재로 남을 거다. 조금만 더 힘내자.
후에, 대학에 들어가서 그렇게나 힘들게 익혔던 파스텔, 콘테, 수채화가 쓸모없게 되더라도 그걸 버티고 이뤘던 정신은 매우 유용할 것이다.
어느 후배들보다 더 눈에 밟히고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도,
내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 만큼 너희도 힘이 들걸 알기에.
몸도 마음도 정신도 이를 악물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걸 아니까.
하지만 나중에, 공부만 하느라 하루종일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었던 주변의 다른 입시생들보다 더 나은 대학, 더 좋은 합격률을 이뤘노라고 뿌듯해할 때가 올거다.
난 고등학교3년동안 풀었던 수학문제가 20문제도 채 안될 테지만,
다른 학생들이 수능 끝나고 마셨던 술잔의 수 만큼이나 3절, 4절을 채웠다.
3년동안 내가 베고 누워 잤던 책의 부피 만큼이나 파스텔, 콘테가루들 속에서 숨을 쉬었어.
누군가가 높이 사주기를, 큰 고생이라고 위로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이 입시를 해내는게 훗날까지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만큼 큰 존재.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라고 좌절도 많이 하고, 포기하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라고 끊임없이 외친다.
하지만 훗날에 당당하게 내 실력으로 합격증을 따고, 나군과 다군의 연달은 합격소식을 들을 때, 발갛게 핏물이 베인 손이 어느덧 아물어서 굳은 살이 벗겨지고 멀쩡해진 손으로 전공과목의 과제를 또 해나가고 있을 때,
모든걸 보상받을 수 있을거다.
이제 12월, 두달 반만 더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