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은 온통 축제 분위기다. 소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이 미국에 이어 영원한 숙적 일본을 거푸 이기고 세계 4강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당장 우승이라도 할 기세다. 아니, 이미 뭇사람들의 입에선 우승을 못할 것도 없다는 들뜬 기대감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오늘 하루, 사람들의 얼굴이며 걸음걸음마다 막혔던 숨통이 트인 듯 뿌듯한 기분이 한껏 실려 있곤 했다. 뉴스도, 사람들의 이야기도 야구경기로 시작해 야구경기로 끝을 맺었다. 나라 전체가 영락없는 야구장이었다. 질리도록 들어도 싫지 않을, 더 없이 기쁜 소식이다. 군사에서부터 정치, 경제에 이르기까지 늘 눈치만 보면서도 떠받들어줘야 하는 미국의 코를 납작하게 비틀어주었다. 일본은 또 어떤가. 역사왜곡과 외교문제로 항상 골치를 앓으면서도 큰소리 한 번 내지 못해온 마당에 그 능글맞은 얼굴을 구겨줬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미국은 야구의 종주국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프로야구의 역사가 30년 이상 앞선 나라이니 승리의 기쁨으로 그 동안 해묵은 앙금이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었으리라. 어디 그뿐인가. 우리 국민들은 오래도록 지쳐왔다. 지난 8년, 장기적인 경기악화로 병이 들고 정치권 패싸움엔 지겹도록 신물이 난데다 뉴스마저 연일 전국적인 연쇄 성폭행과 살인 등의 강력 범죄로 뒤덮여 있었다. 오랜 간병엔 효자효녀가 없는 법이다. 이런 상황에서 토리노 동계올림픽부터 세계주니어 피겨선수권대회와 세계야구대회에서 우리 선수들의 선전은 응어리가 지다 못해 얼어붙어버린 국민들의 가슴을 한때나마 불끈 덥혀주기에 충분했다.
나도 기쁘다. 이 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얻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만으로도 그야말로 약발은 제대로 받는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러했지 않던가. 그러나 나는 오늘 분개했다. 차마 치가 떨리는 가슴을 참아내기가 힘겨웠다. 달아오른 사람들의 환호성과 얼굴이 역겨울 뿐이었다.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어 기가 막혔다. 기껏 스포츠 따위에나 가슴을 졸이고, 인터뷰마다 국위선양 운운해대며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럽다, 대한민국을 외쳐대는 꼬락서니가 나는 눈꼴 시리다 못해 이가 갈렸다. 너희는 미쳤다.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치고 말았다. 모두가 제 정신이 아니다. 어떻게 너희가 제 정신이 박힌 연놈들이란 말인가. 그 따위 대갈통을 생각하는 머리랍시고 달고 다닐 양이면 당장 떼어버려라. 너희들 심장엔 진정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지 나는 몹시 궁금하다. 너희가 정말 이 땅에 살아가는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주인이냐? 주인은 고사하고 국민은커녕 지나가던 개가 웃다 자빠질, 이 빌어 쳐 먹을 이 똥개 연놈들아!!!
지난 15년간 떠들고 다녔더니 이젠 진저리가 다 난다. 메아리가 된 양 내가 할말들이 아주 줄줄이 외워지는 꼴이 슬프기 짝이 없다. 생각 좀 하며 살라고 잔소리하기도 이젠 지겹다. 차라리 욕지기나 한바탕 퍼부어대며 무섭게 몽둥이를 휘둘러대고 싶다. 너희가 사람이라면 눈뜬장님들이다. 앉은 자리에서 목이 떨어질 판인데도 보질 못하니 장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니, 알아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귀찮아서, 힘들어서, 당장 칼날이 목에 닿기 전까진 나 잡아 잡수라며 꼬리나 흔들어대는 천하의 게으름뱅이 똥개 연놈들이다. 나라가 역사를 찬탈 당하고 국토를 빼앗길 판인데, 경제부흥과 국가 재도약을 위한 지정학적 기득권을 중국에게 고스란히 물어뜯길 상황에, 사회 전체를 들쑤셔대는 정신적 공황조차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서 한심하게 야구경기 따위에나 흥분하는 빌어먹을 국민의식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역사란 나라의 뿌리다. 나라와 민족의 전통성이며 모든 문화와 정신사상의 모태다. 역사 없는 민족과 나라는 국제외교관계에서도 개차반으로 내몰릴 뿐이다. 역사가 흔들리면 정치에서부터 사회 안정과 국민의식도 없다. 봉건왕조는 물론, 현대 정권에서도 그 정통성 세우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던 까닭도 이런 까닭이다. 역사가 비록 승자인 기득권자들만의 기록으로 보이지만, 진정한 힘은 국민에 의해, 국민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는 민중의식에 있다. 그만큼 국민의 관심과 참여야말로 역사를 살려 움직이는 힘이란 뜻이다.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올바른 역사청산과 그 인식은 정신문화로부터 한반도 평화와 국가발전을 통해 정치, 경제, 국제외교, 문화의 발전을 일구어 사회구조를 재정립하고 안정을 이룰 수 있는 바탕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 개떼들아!
두고 봐라, 이대로 가다간 중국과 일본만 좋은 일 시켜놓고 그때 가서 배 아프다며 다시 앙앙거릴 연놈들이 너희들이다. 중국이 역사왜곡을 달래 하는 줄 아는가. 바로 간도 때문이다. 2년도 안 남은 간도의 영토분쟁 국제시효가 다가오는 것에 대비해, 또 어차피 그 땅을 우리가 되찾긴 어렵다는 것을 미리 계산하고 몇 수 앞을 내다보며 북한의 경제개발을 통한 이득과 러시아와의 경제 합작이며 시베리아 철도개발은 물론, 한반도를 잇는 삼각무역의 우선권을 잡기 위한 무서운 꿍꿍이다. 간도는 실질적으로 우리가 찾기 힘들다. 국제법상 영토분쟁의 해석은 첫째가 역사적인 기록고증, 둘째가 실질적인 거주민의 현황이다. 청나라의 힘에 눌려 이 사실들이 철저히 왜곡되었던 과거의 영토분쟁이 현재 또 다른 역사왜곡과 치밀한 술책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너희는 알고나 있는가. 역사기록의 고증은 말 그대로 과거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법이란 어디까지나 힘의 논리를 쫓기 마련이다. 무섭게 자라난 중국 경제의 입김과 자유무역 시대를 맞아 더욱 그 시장경제의 가치가 커진 중국에게 대들 나라는 결코 없다. 일본과의 동해표기 문제를 우리는 이미 겪어보지 않았는가.
내가 찾기를 바라는 영토회복은 행정법적인 귀속권이 아니다. 경제적인 거점으로써, 그 가치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이용하자는 것이다. 자유무역 시대란 경제의 무한경쟁 시대다. 또 문화정보화의 시대이기 때문에 경제력의 힘이 곧 그 지역과 국가간의 이해관계를 조율한다. 북한의 나진선봉지구가 개발되면 러시아는 우리나라와 중국을 이어가는 교역증진과 자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국경을 접한 블라디보스톡 일대를 경제특구로 선포할 것이 틀림없다. 중국 또한 러시아 시장을 포기할 수 없고, 삼각무역의 이득이 있으니 따라서 간도지역의 문호를 개방하리라 나는 생각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와 중국 시장은 물론 바로 유럽 시장으로 달려갈 수 있는 이해타산이 분명히 있다. 그 개발을 우리 손으로 일구어내면 간도나 블라디보스톡은 무비자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특구가 되어 그 지역에 산개해 있는 고구려와 발해사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역사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더구나 블라디보스톡은 근대사에 있어 사회주의 무장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기도 하다. 이로써 사상과 이념의 희생이 된 역사의 실타래도 풀어가는 발판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경제적 거점 확보와 역사의 정립은 우리에게 하나의 의무이기도 하다. 제 나라가 엄연히 있는 데도 유민으로 살고 있는 우리 핏줄들, 조선족자치정부와 러시아 고려인들의 권리회복과 부흥을 일으켜주며 민족의 정체성과 책임을 풀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중국의 역사왜곡도 조선족 자치정부를 옭아매려는 전략의 하나다. 연변은 간도에서 가깝고 위그르족과 더불어 독립성향이 가장 강한 지역이다. 중국 자본경제 발전의 장애물이자 변수는 과거 일본의 대동아 정복전략이 실패했던 전례 그대로 워낙 드넓은 땅덩이와 150여개가 넘는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라는 데 있다. 우리가 지금껏 그렇듯 곧 지역간, 민족간의 발전 불균형과 빈부격차가 사회와 정치 문제로 떠오를게 뻔하다. 그 대비책으로 연변자치정부가 독립을 내세울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속셈이다.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세계에서 그 경제발전의 잠재력과 시장이 가장 큰 나라로 꼽히는 나라들이 세 나라가 있다.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인도다. 인구가 많고 땅덩이도 크며 모두 우리와 가까운 나라들이다. 그 중에 중국과 인도는 자체적인 경제개발이 가능한 나라고 러시아는 절대적인 원조와 협력이 필요하다. 나라가 소위 몰라트리옴으로 내몰려 아직도 기초 생산품마저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니까! 개발은 뭐 맨입으로 하냐? 15년 전에 소련이 무너지기 전부터 나진선봉지구를 통한 자유경제지구 개발로 러시아와 중국, 한반도를 잇는 삼각무역을 열어 우리 경제시장의 활성화와 러시아 시장의 확보를 이루면 가파르게 성장할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고 그렇게 일렀건만 듣는 척도 안 하더니, 지금 어떻게 되었냐? 러시아 기초시장을 중국이 80프로 이상 잠식하고 있다. 이젠 그 힘을 야금야금 우리에게 돌리고 있는 실정이다. 먹으라고 뼈다귀를 던져줘도 못 먹는 똥개들아!
자체적인 경제개발은 어렵지만,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자원과 철도 운송로 개발이라는 막대한 시장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러시아가 몰라트리옴으로 내몰렸을 때 전세계 거대기업들이 모조리 빠져나갈 때 우리 정부는 외채상환을 끝까지 유보해주고 기업들은 철수는커녕 더 장기적인 투자유치를 했다. 그 은혜에 감동 먹어서 우리와 시베리아 철도개발 문제를 협상하려고 시도해왔다. 물론 장삿속에 밝은 중국이 가만히 당할 놈들이 아니다. 시베리아 개발문제는 한 나라의 국가경제는 물론, 동북아 역사에서 정치, 외교 문제의 해법이자 국제물류시장의 대박을 터트려 경제부흥을 이룩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광활한 영토 지배의 배경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도로망과 마차가 있었다. 동북아의 패권을 장악한 고구려의 영토확장과 지배도 막강한 철기기병대와 성축술의 발달이 뒤를 받쳐 주었다. 바로 거점과 거점을 잇는 물자와 군대 수송의 발달된 체계다. 당시로써는 발빠른 통신 수단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북아에서 대륙을 직접 횡단해 유럽까지, 각 나라를 거치는 물자수송은 전세계 경제구조의 판을 뒤바꿀 만큼 엄청난 경제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당장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지 않은가. 그 개발에 들어갈 인력과 물자, 공사기간만 해도 한 나라를 먹여 살리기에 충분하다. 이것을 우리가 잡는다면 지금의 경제적 고비를 단숨에 벗어날 수 있다. 지난 1970년대 우리나라는 중동 등 해외 건설시장에서의 성과로 경제발전을 크게 일굴 수 있지 않았는가. 그뿐이 아니다. 한반도에서 경의선 철도가 뻗어나가 시베리아까지 이어지면 대북 경제협력을 통한 한반도 긴장완화와 교류확대로부터 역사와 외교에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동질성 회복이라는 오랜 과제가 풀린다. 우리 기업들이 중국과 러시아 시장에 초기 진출했을 때 그랬듯 중국과 러시아의 우리 민족들도 큰 도움을 주어, 우리에겐 여러모로 유리한 점이 많다. 두 말 할 것 없이 점진적 통일로 가기에는 이보다 바람직한 방법은 없다.
내가 입이 아프게, 발이 닳도록 15년이나 떠들었던 이 계획이 지금 중국에게 넘어갈 사태다. 자그마치, 장장 15년이다. 듣는 너희 연놈들도 지겹겠지만, 같은 말 되풀이 해온 나는 더 지긋지긋하다. 듣는 척도 안 하는 똥개들에게 내 이런 욕지기도 짜증난다. 중국은 먼저 북한의 나진선봉지구 개발권을 따낼 공산이 크다. 단 겉으론 국가적인 경제협력이나 지원 형태를 띠지는 못하고, 기업진출을 통한 개발로 흐르기 쉽다. 중국의 국가 주도적 북한 경제개발은 6자회담 취지에 반하는 것이며, 우리야 찍소리 못 한다 쳐도 미국이 한반도 진출을 달가워할 리 없는 데다, 제 속내를 다 까발려 경제적 이득을 줄이는 모험수를 들기엔 너무 장삿속이 밝고, 외교문제로 껄끄러워질 경우에 국제사회에서 정당성 확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남한이나 북한 사이를 저울질하며 6자회담에서의 기득권을 선점할 수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간도의 경제적 이득권 확보도 이미 어렵다. 나진이 넘어가면 간도는 따라서 붙어간다. 왜냐고 물을 연놈들은 혀 깨물고 죽어라. 우리가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임을 잊었냐? 간도는 북한과 국경을 접한 지역이고, 북한도 엄연히 유엔에 가입한 자주국가다. 즉 중국의 계획은 우리나라를 제 3국으로 젖혀두고 있다. 경제개발을 위한 지원이 필요한 북한 입장에서도 간도가 눈에 들어올 까닭이 없고, 그것을 구실로 중국은 역사 가로채기를 정당화하며 경제는 물론, 국제외교에서도 한반도 상황을 이용해 크나큰 이득을 챙길 것이다.
이제 남은 기회는 시베리아의 자원과 그 철도 개발권에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불안하다. 러시아가 경제회생을 위해 우리나라에 원조를 요청해 온 지가 어느새 10년이 넘었는데, 우리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6자회담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정말 답답한 탁상공론이다. 주변 국가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나도 모르진 않는다. 북한에 대한 지원이나 경제 교류증진이 절대 쉬운 일도 아니다. 하나가 되어도 부족한 마당에 대통령을 몰아세우더니, 패를 갈라 나라와 국민을 놓고 밥그릇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똥개들이 독이 오를대로 올라 있다. 하나만 보질 말고 전체를 봐야 한다. 집안 싸움을 할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지금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 경제적 특수상황과 주변국가들의 이해갈등을 둘러보다 보면 우리의 가슴 아픔 역사가 자꾸 떠오르곤 한다. 조선시대 말기,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대립이다. 이는 지금과 같이 수구파와 개혁파의 싸움이었다. 국가경제는 무너진 채 민신안정은 물 건너 가고, 임오군란으로 제국주의 열강이 침투할 구실만 제공했던 모양새가 너무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지금도 그 겉모양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제국주의는 살아 있다. 과거의 제국주의가 식민지 영토 지배를 통해 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갈취하고 그것을 가공한 생산품을 되팔아 먹었다면 지금은 곧장 경제로 침투하는 시대다. 자유무역시대란 강대국들이 잉여 생산물을 팔아먹기 위한 시장을 확보의 일환이기도 하다. 중국은 정치, 경제에 있어서 항상 역사를 돌아보며 짚어 나가는 이해에 밝은 민족 기질을 살려 자본주의 개방 이후, 꾸준히 한반도 정세를 이용한 경제적 이득을 살펴온 것이다. 역사란 그래서 현재를 풀어가는 길잡이요, 열쇠다. 북한과 러시아를 상대로 물밑작업이란 것을 우리 정부는 해보고나 있는 것인지 나는 몹시 궁금하다. 집안싸움에 떠밀려 앞을 내다보는 정치행정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제 러시아가 손을 내밀 나라가 누구겠는가? 중국밖에 없다. 만약에 시베리아 개발권마저 중국에 넘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기도 싫지만 결과는 끔찍하다. 당장 우리가 경제부흥을 맞이할 기회를 잃고 만다. 경제력이 국제사회에서의 발언권인 이상, 이로써 중국의 역사왜곡은 그 정당성을 확보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에서 유럽을 잇는 물류시장은 중국이 차지한다. 한반도를 끼지 않고도, 아니 되려 우리를 젖혀둠으로써 중국의 입지는 더욱 유리해진다. 종내 우리는 중국 물류시장에 빌붙어야 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16조원을 들여 개통해 지금도 매년 4, 5조의 적자를 낳고 있는 고속철도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동북아 허브시장을 열겠다고 국책사업으로 벌인 인천국제공항도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국민혈세만 잡아먹고 민생안정에 대한 투자를 무시한 꼴이 되고 만다. 부산항의 외국선박 입항도 중국으로 돌아설 게 당연하다. 북한의 경제개발이 중국 주도로 이루어질수록 남북한의 긴장완화와 동질성 회복은 또 다시 반세기 넘길 민족의 숙원으로 후손들에게 그 아픔과 빚을 떠넘겨줘야 한다. 이 사태에 대해서 과연 너희 똥개들 중에 누가 책임지겠다고 나설 것인가.
역사에 무관심한 민족은 발전하지 못한다. 너희들의 무관심은 저만 잘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이다. 옳다 해도 나서지 않다가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 사건이 벌어질 때만 발끈 하는 개 같은 성질은 또 얼마나 이중적인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획일화와 양극화는 이기심의 사회적인 반영이며, 구조적인 취약성과 불안정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단면이다. 현재 우리나라엔 부산, 천안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 마포, 화성, 신림동 등 전국에서 각각의 동일범 소행으로 보이는 연쇄성폭행사건, 영등포 일대에서 일어나는 새벽길 젊은 여성을 상대로 한 무차별 난도질 역시 동일범에 의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만큼 연쇄범죄가 기승을 부린 사례가 없다. 무슨 이유일까, 궁금하지 않는가? 나는 이 모두가 양극화와 획일주의라는 집단적 이기심 속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불특정다수에 대한 ‘묻지마 범죄’라고 풀이한다. 우선 이들 범죄의 피해자들이 사회적 부유층이거나 기득권 계급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하거나 가난한 일반 서민들이다. 소위 ‘막가파’와 같은 특정대상에 대한 범죄가 절대 아니다. 신림동 일대의 성폭행은 나이를 불문한 채 그 가난한 동네의 주민을 공포에 떨게 하며, 마포 발바리로 불리는 범인은 젊은 여성을 노려 범행을 가하지만, 대구 발바리가 그랬듯 장기화될 조짐과 치밀성과 잔인함에서 도를 더하고, 부산과 천안의 살인사건은 오리무중 용의자조차 찾지 못한 상태로, 영등포 칼잡이는 금품보단 사람 자체를 가해하는 데 미친놈이라는 점들을 살펴야 한다. 섹스 자체에 미친놈이라면 젊거나 예쁜, 여자다운 여자를 노리지 할머니까지 공격하진 않는다. 사람까지 찌를 놈이라면 무언가 그만한 대가를 뜯어가야 하는데 아니다. 서로 연관도 없는 사람들이 살인 피해자로 죽어간다. 마포 발바리는 대구가 그랬듯 여성, 아니면 특정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적인 보복심리일 가능성이 크다. 그도 아니면 성적 충족이 비뚤어진 변태성욕자일 것이다.
이쯤에서 머리가 그나마 좀 돌아가는 연놈들이라면 짚이는 게 있지 않는가. 절대다수이거나 여성에 대한 무차별적인 자기 욕구불만의 불출, 피해의식의 물리적 충돌, 가학적 이기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범인들은 저대로의 정당성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의 원인이 바로 그런 망상에 젖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라. 아니, 이런 범죄가 전국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사회학적으론 도덕성의 상실과 이성의 마비, 즉 정신적 공황 사태를 뜻한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물리적으로라도 자신의 욕구를 풀어내는 행동양상은 일단 타인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인간과 현실에 대해 배타적이고 획일적 사고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제 딴엔 그럴 수밖에 없는 자기 합리화에 빠져 있다는 증거다. 범인 개개인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가지각색이겠지만, 이는 곧 범인들이 그만큼 현실생활에서 욕구불만과 피해의식이 키워져 전체 다수에 대한 불만과 갈등이 부풀려졌음을 가리킨다. 그럼 우리 사회 전체의 병리현상이 무엇인가? 바로 양극화와 획일화로 장기적인 경기침체 속에 가정이 무너지고, 일용직 근로자가 태반이며 30대 백수가 비일비재해 경제생활은 물론, 선택적 독신이 아니라 결혼상대 기피자로 전락한 남자들이 부지기수라는 점이다. 그에 비해 부유층의 고가품 소비나 자본축적, 비리는 날로 더욱 심각하다. 이 모두가 여성과 사회 전체에 피해의식을 곱씹을 수 있는 배경이다. 또 범죄자들이 부유층과 기득권 계급을 노릴 만큼 배포가 크진 않다는 점은 집단범죄가 아니며 자기 욕구를 과시하는 데 빠진 단독범일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결국 양극화와 획일화가 몰고 온 소외감으로부터 빌미가 제공된 극단적 이기심이 범죄의 원인이지 싶다. 결국 그들과 너희는 똑같은 범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자기만 알고, 생각하는 힘보단 자기 욕구만족과 소비욕구충족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기과시로 빠진 작태가 뼈다귀 앞에서 이를 으르렁거리는 똥개들과 똑같지 않는가.
역사나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수준은 그 나라의 철학과 사상으로부터 사회제도며 각 분야의 특이성 및 생활문화와 국민의식의 힘을 드러낸다. 결국 지금 우리에겐 머리가 없다. 그 역할을 떠맡을 매체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뉴스나 신문기사 어디에서도 전체의 통찰을 통해 우리의 현실문제를 살피는 눈길은 찾아볼 수 없다. 언론다운 언론이, 언론문화가 없다는 뜻이다. 야구경기 소식은 신문이고 텔레비전, 인터넷을 도배하다시피 지랄발광에 온갖 수선을 떨어대면서, 제 신문사 여기사 성추행 사건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법정까지 끌고 갈 기세면서 국제법 시효가 2년도 채 남지 않은 중국과의 간도 영토분쟁 문제는 가십거리 기사로도 다루질 않는다. 백두산정계비의 영토권 해석이 강압에 의한 불법임을 가르치면서도 학계와 지식인들은 또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 스스로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는 권리는 보호 받지 못한다. 정부 책임이요, 정부의 무능력함이라 탓하기 전에 목을 내놓고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왜, 꼭 정부에게 바라기만 하는가. 정권의 무능력함이야 어디 한두 번 당해보고 속아 온 일도 아니면서 아쉬울 때만, 눈치 보일 때만 위정자들을 찾는 근성이야말로 똥개들이나 할 짓이다. 국민이 관심을 갖지 않는 문제가 어떻게 쟁점이 될 수 있겠는가.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발전은 대중의 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들의 폭 넓은 참여야말로 진정한 주인의식이다. 내가 주인이고 아니고는 오직 스스로 그 의식을 품고 꿋꿋하게 실천을 하는 가에 따라 드러난다. 결국 정부만 바라보는 짓은 민주주의 사회의 국민이 아니라 봉건제의 신분에 묶인 노예근성에 지나지 않으니, 너희가 똥개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언론은 사실만을 보도하는 데 그치는 기관이 아니다. 그 책임과 의의는 국민을 깨우치고 앞서서 나아갈 바를 드러내어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시대적 사명감으로 통한다. 그것은 학계와 지식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연구는 폼으로 하고, 대학교수는 철가방으로나 깔고 앉아 있는 자리가 아니다. 끊임없는 연구와 그 성과를 알리고 내세워 우리의 권리를 지키며 동시대인으로써 그 책임을 다 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하지 않으면 그 누가 하겠는가. 지금도 초등학교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지리 교과과정에서 가르치는 90프로 이상의 내용이 일제시대 일본학자들이나 친일어용학자들이 연구해놓은 자료들이다. 어이가 없다 못해 시쳇말로 저해가 온다, 이 똥개 잡종들아! 역사란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기에 관점의 차이만으로도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한 나라, 한 민족의 역사를 식민지배사관의 망령에 매어 놓고도 역사학자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역사청산이라는 말이 잘도 나오겠다, 이 개떼들아! 그런 역사를 스스로 깨우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주제에 이 나라의 국민이라고 내세우는 너희들도 똑같다. 그러고도 ‘대한민국’ 타령이 나온단 말인가, 이 똥물에 튀겨 죽일 연놈들아! 일본의 망언이 나올 때만, 독도문제가 불거질 때만,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의 전초가 이미 20년 전부터 발해사를 시작으로 엿보였음에도 발등에나 불이 떨어져야 복날 불에 그슬려지다 도망치는 똥개들처럼 짖어대는 근성이라니, 차라리 모조리 자살해라. 그게 그나마 덜 수치스럽다.
기업 하는 놈들, 특히 문화재단이랍시고 자기 마누라에 딸내미들 때깔 좋은 자리나 만들어주고 거들먹거리는 너희들은 더 징글맞은 똥개들이다. 딸내미 하나는 꼭 미술을 전공시켜 자사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에 값비싼 미술품을 사들여 자본축적과 검은돈 세탁에 눈이 벌건 주제에 문화사업입네 하는 짓거리는 이제 우습지도 않다. 무릇 돈이란 돌고 돌아야 제 힘을 우뚝 드러낼 수 있다. 대학으로부터 학계며 연구기관에 대한 투자는 기업의 기술발전과 인재양성을 통한 국제경쟁력을 끌어올리는 필수조건이고, 이것은 비단 이공계 기술 분야에만 그치지 않는다. 철학과 심리, 사회, 역사 등 기초학문의 발전은 기업운영의 가치철학과 그 대외적인 정체성, 소비자의 구매요건 및 기호도 조사와 연구, 나라며 민족, 지역, 문화 등 조건에 따른 상품 디자인과 광고의 의식반영으로부터 기업문화의 가치추구를 무섭게 살려낼 수 있는 분야다. 특히 돈만 버는 데 그치지 않고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 지, 그 길을 짚어준다. 곧 상품 하나에서부터 사회와 나라에 이르기까지 머리 역할을 떠맡는다. 우리나라엔 기업문화도 없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다스릴 가치철학과 사상의 힘이 생활 곳곳에 비어 있지 못한 채 돈독들만 올라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치고 학원재단을 굴리지 않는 연놈들은 없다. 겉으론 자본의 환원과 공영성을 내세우지만, 그 속내는 전혀 다르다. 교육사업은 국가에서 주는 40프로의 세금감면 혜택을 노린 개밥그릇에 지나지 않다. 불법자금을 세탁하기에도 안성맞춤인 철통 금고다. 이러니 자본의 투자가 이루어질 수 없고, 학생들의 머리 숫자가 곧 학교를 굴러갈 자금줄이니 매년 이 핑계, 저 핑계로 등록금이나 줄줄이 올려댄다. 가뜩이나 경기악화로 기피 학과가 되어버린 인문사회의 기초학문 분야들은 연구비마저 끊겨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미친 연놈들 염병하고자빠진 짓이다. 제 집안 하나 지키지도 못하는 주제에 주인 밥그릇이나 거덜 내는 똥개들이다. 국민을 똥개로 아니까 국민을 상대로 돈을 벌어 그 자녀들을 가르쳐주는 대가로 세금감면을 받으며 교육에서조차 돈놀이나 일삼는 썩은 놈들이 아닌가.
방송연예, 연극, 영화랍시고 하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연극은 쥐약 먹은 꼴로 나자빠진 데다 그나마 간질병 발작 일으키듯 이따금 좋은 공연을 하기 위해 발악하는 짓은 눈물겹다. 그러나 너희도 현실을 올바르게 살피고 들여다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무릇 예술은 사람과 그 생활을 담아내는 각기 다른 모양의 그릇이다. 그만큼 연극을 비롯한 모든 예술이 제각기 현실문제들을 추스려 담아 일반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어 우리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끌어주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너희는 그저 가난하다, 배고프다며 손을 놓고 있는 주제에 누굴 탓할 것인가. 전통 정극은 설 자리를 잃은 채 대학로 바닥은 국적불명의 코미디가 뒤덮은 지 벌써 10년째다. 그 뿌리 자체가 상업성인 뮤지컬에만 투자가 몰리고 있다. 이젠 갈수록 대형화, 초호화판으로 꾸며진 무대에만 관객의 관심이 쏠리니, 뮤지컬도 연극이기보다 하나의 쇼나 이벤트가 되어버린 실정이다.
방송은 가면 갈수록 외설에 엽기다. 보기 좋은 고깃덩어리들이 모여 끼리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 마냥 놀아대는 모습을 재미 있다고 시청자들은 난리다. 생활 속에 놀이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몸으로 부딪히며 사람이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돈벌이에 쫓기고 메마른 일상의 유흥에 찌들어 텔레비전 프로그램 따위에서 대리만족을, 욕구불만을 털어내는 자위행위와 같은 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방송은 갈수록 더 난잡해지고 저급해진다. 노출에 선정성으로 청소년들 자극이나 하고, 시청자들의 이성심리를 대리만족으로 휘어잡아 단세포동물로 만들며 말장난이나 시시덕거리는 짓이야 방송생명인 시청률 유지라 치자. 드라마는 뻔한 삼각관계로 서너 번만 보면 남은 줄거리가 훤히 내다보이니, 점점 불륜과 자극적인 영상이 판을 친다. 현재 국가와 사회가 직면한 현실 문제를 제대로 녹여낸 작품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아주 놀아도 싸게 놀고 있다. 역사문제는 그저 시청자 휘어잡을 사극의 소재거리로만 보이냐? 언론문화를 주도하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는 놈들이, 가장 대중에 대한 주도력이 강한 매체가 돈놀이에만 빠져 진정 알리고 이끌어야 할 사명은 깡그리 엿 바꿔 먹었냐? 자고로 방송문화는 그 나라 국민의식과 정서, 즉 그 생활문화의 지표라 이른다. 너희들의 수준이 과연 똥개 수준임을 익히 알 수 있지 않는가.
영화하는 연놈들은 더 생각이 없는 종자들이다. 돈독에 눈과 귀가 멀어버린 똥개들, 그 자체다. 지난 10여년 스크린쿼터 제도의 보호를 받는 동안 너희들이 한 짓이란 게 무엇이냐? 자신들의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져 영화가 부흥기를 맞게 되자 몇몇 인기배우들의 몸값이나 천정부지로 올리고 허리우드 시스템을 옮기기에 급급했지, 너희는 당장 우리 실정에 맞는 영상분야의 체계를 세우는 데 희생이라곤 하지 않았다. 촬영보조나 조명보조 같은 일꾼들의 생계는 여전히 일당 노동자만도 못하다. 무체계도 전통이고 체계냐? 관객 7백만을 넘어선 영화의 피땀 어린 시나리오는 신인이라는 구실로 단돈 천만원에 떼어가는 짓이 날강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천만 돌파 운운하며 기획자와 투자자들, 감독과 배우들은 입이 벌어진 사이 그 작품의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도맡았던 업체는 두 달에 한 번 끊어주는 2백만원 결제로 똥구멍이 찢어지다 결국 다시 디즈니 영화사의 하청업체로 돌아서는 실정이다.
영상문화를 위주로 우리 사회의 폐단은 현재의 병리현상들과 매한가지다. 돈이 돌지 않고, 사람이 돌지 않는다. 획일화요, 양극화다. 당장 돈벌이가 되는 분야와 소제에만 돈이며 사람이 몰린다. 기초분야엔 투자가, 돈이 없다. 기업의 투자만이 문제가 아니다. 정부는 관심만 높을 뿐 포괄적이며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대안을 세워 전체 시장의 흐름을 짚어주기는커녕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만 바란다. 이러니 공급과잉은 지역과 학교, 기업마다 하나의 유행사조처럼 번져 있다. 교육정책마저 개판이라는 소리다. 연극영화과는 물론, 방송연예학과 등 관련 전공학과는 대학마다 들어서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영화나 방송 따위 영상분야만 지원해 순수 연극무대에 대한 열정은 꺼져간다. 문예창작학과도 마찬가지다. 전국에 불과 서너 개 대학뿐이었는데, 겉만 번드레한 영상문화 붐을 타고 돈벌이가 될 만하니까 우후죽순 들어서서 죄다 방송극본이나 시나리오만 지망하는 퉁에 앞으론 학과의 정체성 자체가 나는 의심스럽다. 이것이 획일화요, 양극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오로지 돈이 목표다. 젊은 세대의 꿈이란 게 그저 돈을 많이 버는 것이지, 그 돈을 어떻게 쓰겠다는 인생의 가치판단은 없다. 철학이 없고 사상이 없으며, 한마디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라곤 없이 비뚤어진 현실에 길들은 똥개들이다.
인간들이 넘쳐대니 무명배우나 스탭들의 적당한 계약과 급여산출 등의 영화 경영의 체계는 고스란히 무시할 수 있다. 그보단 돈독 오른 투자자 관리와 그 자본의 회수가 우선이다. 투자금 배당이 클수록 성공한 영화, 잘 나가는 기획자, 인정 받는 배우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이니 몇몇 배우들에게만 돈이 몰린다. 역시 그런 소재만 잡아야 한다. 배우와 작품에서 창의적인 작품성을 위한, 우리만의 소재나 문제의식을 키워낼 실험과 도전정신은 메말라간다. 있어도 대게 연극무대에서 옮겨온, 이미 걸려지고 다듬어진 작품들로 순수한 영상 자체에서의 실험은 드물다. 인기배우들의 몸값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보니, 전체 제작비에서 힘없는 자들의 희생만 커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양극화요, 획일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결국 우리 사회의 전체의 문제는 하나하나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마다 제각기 그 병리현상의 원인을 제공하며 서로 맞물려 더 병을 키우고 있다. 원인은 일단 하나다. 우리 사회 현실의 전체를 보고 그에 맞는 궁극적인 목표와 가치이념을 정치로부터 사회제도, 생활문화로 이끌어가야 하는데, 지나치게 하나하나 저마다의 욕심에 매달려 서로 경쟁과 갈등을 낳기 때문이다. 상호유기적인 관계로 굴러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상황에선 기초분야인 단편영화나 다큐멘터리, 저예산 독립영화들이 자생할 자리는 없다. 성공한 감독이나 배우들부터 자신의 배경이 되어준 연극이나 단편영화에 적은 돈이나마 투자를 하는 꼴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는 심보냐? 연극으로, 독립영화로 실력을 쌓고도 이름값이 높아지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양 철저하게 외면한 채 돈만 쫓아다니는 꼴이라니, 너희들이 그러고도 인간이길 바라냐? 그러니 사람과 돈이 연극으로 돌 수 있는 기회가 차츰 사라진다. 연극은 물론 영화와 텔레비전까지, 무대의 형식에 걸리적거릴 것 없이 배우들이 설 수 있을 때 보다 많은 기회제공과 기초분야에 대한 관심이며 투자가 늘어날 것이 아닌가. 이로써 대형 기획사의 횡포와 지나친 상업주도의 악습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다. 그런데 너희 똥개 연놈들은 자신들의 대가에 대해선 철저하게 움켜쥔 채 베풀지 않는다. 무섭게 이기적이다. 이것을 자본주의의 생리고, 프로의식의 당연한 대가라고 내세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당하진 않다. 자신은 베풀지는 않으면서 계속 얻기를 바라는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심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본과 기득권의 횡포이자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체계와 정치경제 문화의식의 수준이며 불투명하고 비공정한 사회구조를 조장하는 이중성이다. 이중성만큼 무서운 이기심은 없다. 겉 다르고 속 다르며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아나는 것이다. 아닌 말로 있는 연놈들이 더 지독하다. 그만큼 자신에게 직접 이익이 되지 않으면 아쉬운 줄 모르다가도 정작 제 밥그릇이 깨질 판이면 우르르 떼 지어 거리로 나서는 저들의 획일적 이기심이다. 너희들이 그렇게도 한국영화를 사랑한다면 스스로 자신부터 변해야 한다. 당장 자신에게 이익이 되진 않는다 해도 영상문화의 체계와 구조적인 안정, 그 희생이 커지지 않도록 기초분야와 경영체계 발전, 교육의 질적 향상과 인재관리를 위한 투자문제부터 자생력을 길러냈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들은 요지부동 변화를 거부하면서 발전하겠다는 욕심만큼 겉 다르고 속 다른 속셈은 없다. 이것이 결국 제 밥그릇만 놓치지 않으려는 똥개들의 개싸움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영상사업은 그야말로 종합예술이다. 의상으로부터 미술, 음악, 첨단기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또 전체 문화예술 장르가 모여드는, 그래서 연극무대로부터 방송미디어와 영화로 인력과 자본, 소재의 공급이 돌고 돌면서 각기 발전적 형태를 띠어갈 수 있는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 데도 우리나라는 오직 영상 위주로만 치우쳐 있다. 획일적인 잣대다. 문학 등 활자예술이 발달한 나라는 스스로 생각하는 정신문화의 힘을 우뚝 키워 신문 등 언론보도의 공정성과 다각적인 접근이 이루어지며, 이로써 사회 전체에 참여와 실천의 생활문화가 피어올라 전체 예술분야는 물론, 정치사회의 발전을 끌어올리는 무서움을 드러낸다. 순수예술과 기초학문이 발달한 나라치고 정치 현실과 사회발전이 뒤떨어진 경우는 없다. 개 연놈들, 너희가 언제 시름에 겨운 농어촌 문제를 다룬 작품이나마 담아낸 적이 있다고 이제 와서 그들까지 내세워 제 밥그릇을 지킬 속셈인가! 관객동원이 안 된다며, 돈벌이가 안 된다고 현실 문제를 피하기만 해온 놈들이 무슨 얼어 죽을 시대적 사명감인 양 스크린쿼터제도를 내세울 염치가 있단 말인가.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다. 아니, 당장 나라의 역사를 도둑맞을 상황에도 그깟 밥그릇 싸움에 눈이 먼 꼬락서니가 이 나라, 대한민국의 문화인이라는 연놈들의 현실인식 수준이라니 나는 치가 떨린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이중적인 돈벌레들의 배타적 이기심이다.
예술은 사회학이나 철학과 같은 학문과 달리 그 이야기 전개나 설정 자체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기에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력의 힘을 가꾸어낸다. 때문에 예술사는 사회사에 비해 항상 1, 2백년의 시간을 앞서서 발전해오며 세상을 이끈 숨은 힘을 지니고 있다. 현실을 제대로 살피고 뜯어보기는커녕 돈벌이만 될 이야기거리를 쫓느라 우리의 예술은 사회적 염원과 당면과제와는 동떨어진 채 소재빈곤이라며 제 무덤에 갇혀 지낸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써야 하는 지 그것을 받쳐주는 철학과 사상의 굵은 줄기, 즉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기본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스크린쿼터제도의 폐지가 그 시작이다. 기초를 무시한 영상사업의 발전은 결국 거품이며 제풀에 꺼질 수밖에 없다. 스크린쿼터제도의 폐지는 우리 스스로 거품을 하루라도 빨리 걷어내고 영상분야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 발전을 위한 종합예술로써 상호 유기적 관계로, 기초분야에게 지원과 관심을 널리 돌리며 역사와 외교부터 농어촌 문제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사명감과 그 책임을 고르게 펼칠,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살려내야 한다. 현재 영상 독주의 상업적 부흥은 전체 문화시장 구조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다. 그에 비해 얻어지는 허리우드 모방의 기술발전과 몇몇 대박 작품들의 흥행수입은 전체 영상시장의 연간 적자를 도저히 메우지 못한다. 관객동원 1백만으로도 흥행수입을 남기던 때가 엊그제인데, 이젠 4, 5백만을 돌파해도 적자에 허덕이는 작품들이 부지기수다. 배우와 감독의 몸값이 너무 크다. 도무지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
현실과 우리 전통문화의 반영을 통한 소재의 개발이 뒷전이니, 스케일만 커져 툭하면 해외촬영이네, 특수효과네 해서 외국에 나가 돈을 퍼주고 다닌다. 특이성이 없으니 ‘보여짐’만 가지각색으로 꾸며 보려는 얄팍한 잔머리다. 나도 연출가인데, 그 잔머리를 모를 것 같으냐, 이 덜떨어진 연놈들아! 잘 나가는 배우와 감독으로 파벌이 생기고 그들에게만 투자가 몰려 작품의 창의성은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 1960년대의 일본이, 70년대의 프랑스가, 80년대의 홍콩 영화가 왜 그 찬란했던 황금기에서 맥없이 추락했었는지 지켜보고도 그대로 따라가는 꼴을 보면 정말 한심하다. 스크린쿼터제도의 폐지는 획일화와 양극화로 무너진 문화시장의 구조를 벗어나 한국의 영상분야가 진정 살아남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돌고 도는 세계 문화시장의 흐름에서 겉치장만 요란한 소위 ‘한류’는 그 끝이 뻔하다. 허리우드를 비롯한 대중문화 선진국들의 소재빈곤과 식상함, 그리고 약소국들의 경제생활의식이 높아지면서 몰려온 틈입시장이고, 문화란 역사나 유행과 같이 돌고 돌기 마련이며, 우리의 문화상품엔 미국의 그것과 같이 정서와 의식까지 감화시킬 정신문화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은 툭하면 인도를 내세우곤 한다. 인도와 같은 영화시장이 들어설 때까지 스크린쿼터제도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 대가리 속에 뭐가 들었는지 나는 몹시 궁금하다. 인도는 한 해 1천여 편의 영화가 생산되며 망하는 작품은 없을 만큼 자국의 작품을 아끼고 많이 본다. 그 이유가 뭘까? 대가리에 똥만 찬 연놈들아, 이걸 먼저 생각해봐라. 전체를 살피는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문제의식을 갖으란 말이다. 인도에 대해서라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정보만 살펴봐도 영화시장을 비롯한 각종 문화상품과 프랑스 파리까지 뒤덮어버린 미국의 맥도날드 같은 다국적 기업조차 발을 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일단 인도는 아시아의 허리우드로 불린다. 그만큼 영화가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음을 뜻하는데, 이는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며 방송미디어의 더딘 발전과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률이 전체 인구에 비에 한참 뒤떨어진 탓이다. 더불어 그들은 종교 중심의 생활문화를 지니고 있다. 이는 다시 가족 중심의 사회제도며 관습을 뜻하고 대가족 제도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와 같이 소가족 제도의 개인 중심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가족 중심은 사회적으로 종교제도와 묶여 집단연대의식의 생활문화가 흐르고 있음을 나타내는데, 때문에 인도인들은 함께 보고 느끼는 영화를 더 좋아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인도는 지나칠 만큼 전통성이 강한 나라다. 그런 역사, 즉 뿌리를 지니고 있다. 19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는 나라라는 말을 흔히 하지 않던가. 오죽하면 법적으로 금지된 카스트제도의 전통과 그 관습이 아직도 면면히 지켜지는 나라다. 그만큼 인도인들에게 생활 곳곳에 흐르는 자신들만의 정신문화가 짙게 배어 있다. 자연히 서구의 물질문명에 대한 턱없는 동경과 흉내 내기보단 그들의 역사의식과 정신문화가 차지한 힘이 크다. 비록 민족분쟁과 종교 갈등, 빈부격차, 카스트제도의 악습 등이 정치와 경제발전의 걸림돌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 전통성이 지나치게 강한 단면으로, 우리처럼 온통 서구에 대한 동경과 덜떨어진 흉내 내기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런 장애물들을 하나하나 걷어내기 위한 느긋한 변화가 우리처럼 급변에 의한 전통과 발전의 충돌도 피하는 해법이 될 것이다. 삶의 고통과 고뇌마저 신의 뜻으로 여기는 사람들, 그런 정신세계를 지닌 국민들이 콜라에 피자, 햄버거나 씹으며 자신들의 정서며 의식과 전혀 맞지 않는 외국영화를 볼 것 같은가? 당연히 안 본다. 자신들의 정신문화와 생활이 고스란히 녹아 흐르는 자국의 영화에서 즐거움을 찾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인도엔 소위 스크린쿼터제도란 것 자체가 없다. 만들 구실도 없는 나라다.
인도만이 아니다. 문화적 공생관계이거나 경제생활의식이 같은 수준인 경우를 빼고, 허리우드 영화나 우리나라의 값싼 한류라는 상품이 떠벌여지는 나라나 민족치고 정신문화의 힘이 강한 나라가 있더냐? 중국을 빼곤 정신문화가, 그 전통성이, 그 역사가, 국민의식이 뒤쳐진 나라와 민족들일 뿐이다. 중국만 해도 전체 경제생활 개념은 아직 우리에게 쳐져 있다. 또 자본시장만의 개방으로 대중상업문화의 발전은 아직 못 미치며, 일본은 과거로의 회구와 같은 문화적 틈입시장이고 그 흐름일 뿐이다. 이래도 그 대가리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나가 죽어라! 한마디로 일시적인 상업적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문화유행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특히 가수 보아를 가리켜 한류상품이라 말하는데,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 아이가 부르는 노래는 우리 노래가 아니다. 소위 ‘제이팝’이라 불리는 일본풍이다. 철저하게 일본시장에서 팔아먹기 위한 상품으로, 국제경쟁의 시대에 자국의 정신문화가 깃들지 못한 상품은 우리 것이 아니다. 정서의 감화와 동경을 통한 연쇄적인 시너지효과가 한참 떨어지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 그림을 그린다, 음악을 한다는 둥 다른 분야의 연놈들도 대가리에 똥만 차기는 매한가지다. 뭐, 글을 쓸 소재가 없어? 입에 침이나 바르고 변명해라. 굳이 긴 말하지 않아도 글로 풀어가고 읽혀줘야 할 문제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널려 있음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현실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하는 것들이 무슨 글을 쓴단 말인가. 책상머리만 지키고 앉아 있으니, 세상이 제대로 보이고 들릴 턱이 없다. 발로 뛰어다녀라! 우리 사회엔 정신문화의 요체인 문학이 비춰줘야 하는 상처와 아픔들이 널리고 널려 있다. 때문에 나는 지식인일수록, 문화예술인일수록 현장에서 노동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세상과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머리로만 알고 가슴으로만 느끼는 지식을 검증 받아 더 가파른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너희들은 방구석에서 신변잡기 타령에 그치거나 우리 문학의 무대를 넓힌다면 외국에 나가 모양내기, 생색이나 내고 지랄들이다. 나도 자신을 스스로 욕한다. 서툰 계집질에 인간적인 믿음까지 훌러덩 날려버린 채 이젠 글쟁이 노릇도 올곧게 못하는 병신이 되었으니 욕을 먹어도 싸다. 그래도 너희 연놈들처럼 작가로써 정신세계까지 팔아먹진 않는다. 펜이 칼보다 무섭다는 말을 증명할 수 있을 때 그 나라와 사회의 발전은 가팔라지는데, 도통 우리나라에서 펜대를 굴리는 연놈들은 그저 이름이나 팔아먹으며 독자들 우려먹기에 바쁘다.
모든 예술은 펜이 될 수 있다. 그 힘이 있었기에 현대사회의 모태가 된 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림과 음악 등 모든 분야엔 세상을 들여다보는 자기 철학이 버텨줘야 남과 다른 문제접근이 이루어진다. 곧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얄팍한 직관적인 감각이나 내세우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감성에 매달려 징징거리니, 현실이 제대로 보일 리가 있으며 자기발전이 있겠는가. 자기극복은 못하면서 자기과시만 하려는 꼴이다. 자기극복이라는 더디고 어려운 과정은 눈치껏, 요령껏 피해 다니며 겉멋에 물들어 ‘똥폼, 개폼’ 잡는 데 진만 빼고 밥그릇 싸움에 빠져 있는데, 어떤 정신문화가 자라나서 국민을 이끌겠는가. 책 읽지 않는다, 미술관이나 음악회 한 번 찾지 않는다고 국민만 탓할 자격이라곤 없어, 이 썩을 것들아! 자기들 스스로 해야 할 책임을 다 하지 못하는 주제에 바라기만 바란다는 게 말이 되냐? 너희들이 언제 한 자리에 모여 사회 현상을 주제로 진진한 토의를 하고, 예술철학적인 고찰을, 아니 이 땅에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써 머리싸움을 제대로 한 적이 있다면 내가 말을 안 한다. 편 나누고 서로 헐뜯기 바쁜 이 비루먹을 똥강아지들아! 이렇게 개판이니 초현실주의며 표현주의 등 다양한 성격의 작품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저 듣기 좋고 보기에만 좋은 껍데기들이 판을 치지 않는가. 다양한 표현은 세상을 들여다보고 풀어내는 여러 갈래의 목소리다. 나와 너가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 합리적인 합일을 찾아가는 다원주의의 바탕이다. 다를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함은 그만큼 새로운 주의나 주장을 듣고 살펴볼 자세가 갖추어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자연히 실력보다 파벌과 연줄이 판을 친다. 세계 무대에서나 인정을 받으면 그때서야 마지 못해, 강자에겐 약한 똥개근성으로 기가 죽어 눈치를 본다. 이 역시 확일화요, 이중성이다.
예술 전공 학생들부터 예술가랍시고 깝죽대는 연놈들이 공부라곤 안 한다. 걱정스러울 만큼 책을 읽지 않는다. 눈과 귀가 이기심으로 막힌 채 제 욕구불만을 드러내는 감수성 자극이나 해대며 폼만 잡아대니, 각 장르와 모든 분야가 상호유기적으로 돌아감을 모른다. 시는 시만, 소설은 소설만, 시나리오는 시나리오만, 그림은 그림만, 음악은 음악만 알면 그만이라는 똥개 수준에 딱 맞는 발상들이다. 전반적으로 우리 문화예술의 현실이고 수준이 이렇다. 문학을 비롯한 그림, 음악 등 각 분야의 작품들을 면면이 살펴보면 제대로 창작자의 실천적 철학이 녹아든 작품세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유행이나 쫓고, 선진국 주도의 주류나 꽁무니 빠지게 따라가느라 우리 것이 없다. 우리 것이 가장 세계적인 산물이라면, 자기 자신이 깊이 있게 검증 해낸 가치철학과 작품세계야말로 가장 세계적인 것임을 왜 모르는가. 이기심과 이중성 때문이다. 제 마음 속에 스스로 갇혀 있다 보니, 생각하는 힘이 올곧게 키워지고 세상이 보일 리 없는 이치다. 비록 문학 중심의 시대는 아니라 해도 세계는 다시 정신문화의 힘이 주도할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이는 구소련의 몰락과 냉전의 종식이 전세계를 경제 중심으로 돌려세워 상업주의로 뒤바뀐 흐름의 귀결이고, 경제발전을 따라 파괴된 환경보호운동이 등장한 이치이며, 판타지도 소재빈곤에 허덕이다 예술의 기원으로 그 자취를 쫓아갔듯 물질문명의 폐해와 세계가 다원주의로 나아갈 시점에 있어 합리적인 사상이나 정치체계의 발전이 필요한 까닭이다. 전세계는 이미 국경이 무너지고 있다. 자생력이 없으며 강대국의 상품을 소비하고 그들의 생활문화를 동경며 몸과 마음이 길들어 끌려갈 수밖에 없다. 이런 다원주의 체제로 가는 길목에 제 나라와 민족의 고유한 전통성을 살려낸 문화의 힘을 키우기 위한 민족주의가 다시 떠오르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그것이 고유한 상품이며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상을, 전체를, 여러 갈래로 세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다양한 관심과 실천의지가 중요한 시기다. 정신문화의 시대에 이르러, 그때 우리는 또다시 외래문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말 것인가. 제발 오늘만 보고 사는 하루살이 짓은 그만해라, 이 떨거지들아! 앞을 내다보고 살란 말이다.
한 나라의 정신문화의 총체이자 요체가 활자예술이라면 그 문화적 중심엔 대학생과 그 또래 젊은이들이 지키고 있어야 한다. 특히 대학생은 그 나라의 예비 지성인이라 불리는, 한마디로 사회의 떡잎이다. 젊은 세대는 그 이전 세대를 뛰어넘어 세대의 반전으로 사회의 발전을 앞세우는 역사의 순환을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떡잎부터 싹수가 누렇다. 현재 대학 도서관의 대여 1위 서적들이 무협지와 판타지 작품들이라고 한다. 어이가 없다. 나는 무협지나 판타지 자체를 문학 장르로써는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술술 읽기에 좋을, 재미거리일 뿐임을, 그저 권선징악의 줄거리만 들어앉아 있지 간접경험으로써 정신세계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풀어가기 보다 아무 생각 없이 잊는, 회피와 외면의 수단이다. 책 읽기부터 제 입맛, 자기욕구, 그저 재미 위주다. 현실에 대한 진진한 사고가 없는 이기심이다. 힘들고 어렵게 읽히거나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서 그 의미와 맛을 헤아리며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가는 읽기를 싫어한다. 아니 아무리 좋은 작품을 읽어도 전체를 못 보니, 제대로 그 문제의식이나 작가의 의도를 짚어내지 못한다. 제 입맛대로 읽는다. 엉뚱한 책 읽기가 너무 흔하다. 나 자신부터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우선 읽기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는 너무나 어이 없는 현실에 맞닥뜨리곤 한다.
그만큼 생각하기를 꺼린다. 단순사고에 매달린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라 말과 행동이 따로 놀기 일쑤다. 머리로만 알고 가슴으로 느낄 뿐 굳은 신념으로 제 삶을 만들기 위한 실천과 자기희생이라곤 모른다. 양보도, 타협도 모르는 뇌세포의 기형아들이다. 하나둘 낳아 귀하게 떠받들어지며 자란 티란 티는 죄다 내고 다닌다. 게임과 영상처럼 이미 그 심리적 반응까지 다 계산되어 보여주는, 그런 가시적인 만족도가 없으면 접하질 않는다. 지하철 안의 풍경을 떠올려보면 나는 입맛이 항상 쓰다. 그나마 무료신문이나 책 비슷한 것이라도 활자를 읽고 있으면 양반이다. 음악 듣는 것까진 그나마 고맙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노인네만 아니면 핸드폰들을 들고 게임에, 문자 보내기에 바쁘다. 도구란 진정 도구일 뿐이라야 한다. 길들임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도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이 스스로 불쌍하지도 않는가. 인간이라면 도구를 도구로써 바르게 이용하되 생활의 편리가 자기만 아는 이기심과 단순하고 획일적인 사고에 물들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극복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자기개발과 발전의 힘이다. 핸드폰으로 게임에 무선인터넷과 텔레비전 시청을 하는 것이 무슨 귀족문화인 양 떠벌이고, 그 자투리 시간마저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채 삐뚤어진 상업주의의 순한 양이 되어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무관심이다. 세상과 사회 돌아가는 현실에 관심이 없다. 관심이 쥐꼬리만큼 있다 해도 행동이 따르질 않는다.
너희들의 무관심은 이중성이며 우리 사회의 악이다. 이 땅을 개차반으로 만드는, 개 싸움터로 만드는 똥개 연놈들이 툭하면 현실은 잘도 비판한다. 교육이, 정치가, 재벌이, 사회구조며 풍토, 역사가 바로 잡히질 않았다며 얼굴을 붉히고 못마땅하다 욕을 퍼부어댄다. 너희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는가. 그렇게도 잘못된 현실을 바로 세우기 위해 우리와 후손들의 뿌리인 역사에 대한 관심이나 가져봤는가 말이다. 친일파들을 욕할 것도 없어, 이 연놈들아!!! 그 무관심, 무책임이 바로 세대의 양극화요 획일화다. 세대간에 서로 헐뜯고 비난하면서도 바라기만 하지 스스로 나서서 전체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니 병폐적인 문제들이, 그 갈등들이 더욱 날뛸 수밖에 없다. 역사가 바로 세워지지도 않고 현실이 올바르게 자리 잡히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이기심이자 이중서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만 좋고 편하자는 속셈이다. 너희들은 자신이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바라기만 바란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이 땅의 정신문화가 발전하기를 바라냐? 그러면서 순수예술과 기초학문이 육성되기를 바라나? 연극 한 작품, 문화상품에 대한 자기 선택적 소비도 못하면서 우리의 문화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크게 내세워지기를 바라는가? 그러면서 정치를 못한다, 나라가 개판이다 욕할 자격이 있나? 이런 풍토 속에서 우리의 역사관이, 우리의 주체의식이 제대로 키워져 진정 ‘대한민국’을 목 놓아 부르짖을 날이 오겠는가. 너희 스스로 ‘나는 똥개요’하고 왈왈거리고 다니는 꼴이다.
현실을 탓하기에 앞서 너희는 어그러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먼저 반성하고 비판해야 한다. 이 양심도 없는 똥개들아! 너희는 머리론 옳다고 끄덕여도, 가슴으로 느낀다 해도 편리하고 쉬운 것만을 쫓기 일쑤다. 이중성이고, 순수하지 못하다. 시험처럼 점수가 따져지는 눈앞의 이득이 있어야 억지로나마 받아들인다. 너희가 그렇게도 욕하며 비판하는 현실에 스스로 목을 매고 있다. 똥개로 살아가는 주제에 현실이고 누구를 비판하겠는가. 들리는 소리는 그저 똥개들의 왈왈거림일 뿐인데! 대학만 들어가면 그저 겉멋에 사로잡혀서 국적불명의 음악카페에 들어가 몸을 흔들고 칵테일이나 홀짝거리며 몸치장이나 해댄 채 계집질, 사내질에 눈이 멀어 과제는 받아쓰기하는 양 너무나 열심히 베끼는 대학생, 제 나름의 가치철학도 세우지 못한 채 잘해야 일찍이 취업준비 필승전략이나 세우는 너희들이 있는 한 이 나라는 아주 잘 나가는 똥개 사육장일 뿐이다. 그럴 바에 뭐 하러 부모 뼛골 휘게 그 비싼 등록금을 쳐 들이며 대학씩이나 다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아, 현실이 그러니까. 대학 간판이 없으면 사람대접 받지 못한다는 볼멘소리를 늘어놓겠지! 맞는 말이다. 현실은 개판이다. 그렇게 개판인 현실에 끌려 다니며 배를 채우는 연놈들이니까 똥개가 맞지 않는가. 차라리 스스로 먹이를 찾는 늑대나 하이에나가 될 엄두도 내지 못하니, 이중적이고 위선적이며 말 다르고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너희야말로 부모를 등에 업고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 연놈들이다.
지금 우리나라엔 이른바 대학 문화가 없다. 그나마 학생운동이 민주화부터 노동과 참교육운동을 이끌어온 현대사의 핵이었는데, 개풀 뜯어먹을 6・29선언 이후 등록금 단결투쟁운동마저 시들해진 지 어언 20년이 다 되어 간다. 술자리, 미팅엔 침을 질질 흘리는 것들이 집회를 열어도 나 몰라라 목줄 풀린 똥개처럼 도망이나 다닌다. 민주화는 아직도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올곧게 들어앉은 상태가 아니다. 환경문제, 사회적 병리현상, 역사청산과 각 분야의 비리척결, 사회적 투명성 확보 등등 예비 지성인들의 순수한 열정이 관심을 갖고 풀어가야 할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데도 잘난 너희들은 외면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과 그 인식이 곧 역사의식이며 주체성이다. 이 모든 문제들이 오늘날 갑자기 이르러 불거진 현상이 아니라 지난 독재정치와 경제발전 지상주의가 불러온 폐단이지 않던가. 세상을 읽지 않아도 뻔히 보이는 당면과제였다. 1990년 구소련의 붕괴가 사회주의의 끝이라고 속단한 획일적인 사고가 학생운동과 이 나라 지식인들이 설 자리를 스스로 잃어버린 결과를 만들었다. 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똥개들아! 사회주의는 절대 죽지 않는다. 죽어서도 안 된다. 정치제도로써는 비록 설 자리를 잃었다 해도,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그 가치가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