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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 할 길

김용태 |2006.04.15 04:25
조회 189 |추천 1


 

  이 글은 2000년도에 썼던 것이다. 이미 지난 시점이지만, 역사와 사회를 돌아보는 눈길은 성이 차질 않는다. 내가 자잘한 상을 하나 받았을 때 그 책자에 실렸던 200자 원고지 약 3백장의 원문을 짧게 추려낸 것이라 문단의 엮임이 어설플 수 있음을 깊이 헤아려주기 바란다.

  한 나라의 역사를 비롯해 정치와 경제, 철학사상, 예술은 서로 이를 굳건히 맞물려 사회발전을 떠받칠 뿐 아니라 국가간의 이해관계를 저울질하고, 디자인이나 관광, 먹거리, 문학, 음악 따위의 문화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무게를 한껏 실어주는 '힘' 그 자체이다. 우리가 익히 떠올리는 문화선진국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앞선 철학사상을 바탕으로 교육과 생활 속에서 '사고하는 힘'을 키워 그 형식과 틀에서 벗어난 여러 활동을 이루어 올 수 있었다. 그런 도전의식과 탐구욕은 사회정서에 깊숙이 뿌리를 박은 채 새로운 사조에 대한 학문적 연구로 탄탄히 이어져 비단 문화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정치, 경제, 학문, 교육 등 사회 전체의 축을 하나로 이끌어왔다. 귀족들만의 향락이기도 했던 영국의 기사도 정신은 베이컨과 콩트의 사상을 통해 사회예절로 다듬어져 산업혁명으로 일그러진 근대사회를 자본민주주의로 일으켜 세웠다.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의 대혁명사상은 현대 정신문화와 순수예술을 활짝 꽃 피워 전 세계에 그 산물(産物)을 퍼뜨렸으며 오늘날의 인권정치로 그 깊은 뿌리를 내렸다. 발트해 연안 3국인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는 영국의 복지제도 위에 학문적으로 연구 발전시킨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사상을 맞물려 사회민주주의라는 그들만의 앞선 정치를 펼쳤다. 뿐만 아니라 민족성마저 합리적이고 비판적이라는 독일인들은 데카르트와 칸트의 사상을 교육제도에 담아 돋보이는 정신문화를 우려냈다. 외래문화를 발빠르게 받아들여 2백 년의 그 짧은 역사를 딛고 오늘날 대중예술과 생활문화를 널리 앞세우고 있는 미국에는 서부 개척정신이 버티고 있었다. 이 모두가 '문화의 힘'을 실로 두텁게 드러내는 역사적 교훈이다.
  일본은 1964년 동경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공영방송사인 엔·에이치·케이의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학자, 탐험가들을 세계 곳곳으로 보내 그 나라의 역사와 지리, 문화, 생활, 자연 생태계 등을 연구하며 생생한 화면에 담아오게 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들여다보는 수많은 화면들이 대부분 그들의 작품이다. 그들은 일찍이 현대사회가 '문화의 힘'이 이끄는 한판 힘 겨루기임을 깨닫고 소위 경제대국만이 아닌 '문화대국'으로 그 자리를 잡으려 했던 것이다. 1990년부터는 미국 영화의 돈줄 노릇에서 벗어나 제작사들을 사들이는 한편 '동경 영화제'를 개최해 막대한 자본을 쏟아 붓고 있다. 오·케이 목장의 결투, 황야의 무법자, 7인의 총잡이 등 미국을 대표하는 서부영화들이 일본의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의 작품을 그대로 옮긴 모방작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첩보영화인 '007 두 번 살다'는 일본을 배경으로 찍혀져 그들을 세계에 보다 널리 알리는 광고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지금도 허리우드 영화는 사무라이, 음식, 의상, 상품 따위에 걸쳐 그들의 문화를 수없이 담아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외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일본은 사무라이라 일컫는 무사문화만 빼면 시체라는 우스갯소리가 종종 오가곤 한다. 전세계에서 종교의 분파와 종류가 가장 많은 나라가 일본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정신문화가 얼마나 메말라 있는 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유치원생과 소학생은 신사, 중학생은 교회, 고등학생은 절, 대학생이며 성인들은 사이비 종교단체에 몰려가지만, 사춘기 소녀들만은 여관이나 누드사진, 포르노영화를 찍으러 가는 현실이 경제대국 일본의 뒷모습이다. 결국 그들은 일만 하던가, 아니면 무언가 하나에는 미쳐야 살 수 있다고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전세계에서 자살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 라는 현실이 일본의 낯뜨거운 자화상이기도 하다. 특히 그 나이가 30대에서 40대로 사회를 떠받들어야 할 소위 엘리트들의 자살율은 하루에 한 명씩 빌딩에서 뛰어내린다는 미국의 맨하탄을 앞지르고 있으며 황혼 자살율 역시 세계 최고 수치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이가 들면 갈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신사를 다시 찾는다고 한다.
  신사는 사무라이문화의 한 단면이며 일본의 역사인 동시에 군국주의의 망령을 대물림하고 있는 요람이다. 그만큼 일본 사회에는 침략과 수탈의 상징인 무사 계급문화가 눅눅히 녹아 흐르고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제패해 통일국가의 기초를 세웠을 때도 여전히 소영주들 사이의 내분과 영토분쟁은 끝이 없었다. 그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그 군사세력을 한반도로 내몰았듯, 1904년에 벌어진 노일전쟁 역시 그 속을 들추어보면 "우리 젊은이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어가고 있다"는 호소로 일본 역사상 최대의 농민반란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대동아 공영권' 사상은 바로 그런 역사의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전통의상인 기모노에도 피로 얼룩진 그들의 역사가, 개방할 수밖에 없었던 성문화의 기원이 그대로 감추어져 있다. 봉건시대로부터 끊임없는 전쟁으로 집안의 대를 잇기 어려웠던 여자들은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남자를 골라 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때 이부자리로 쓰거나 아기를 받는 분만도구가 기모노였던 것이다.
  철저한 계급사회의식이 직업을 대물림하는 장인정신으로 자리를 굳히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들은 지나친 자기중심적 사고에 발목이 묶여 외래사상과 생활양식을 '자기화'하지 못하는 국수주의 사회로 붙박여 있다. 그런 일본 사회의 버팀목은 발달한 교육체제이다. 4년제 대학교로부터 3년제 준학사 대학교와 전문대학교, 그리고 전문학교, 또 직업특수학교로 나누어진 그들의 교육은 학생들의 능력에 맞추어 기능사회를 탄탄히 이끌어 왔다.
  그러나 교육과 사회의 지나친 기능주의는 유동적(流動的)인 합리성을 짓밟아 다원주의라는 세계의 큰 흐름에서 동떨어지게 만들었다. 자연히 앞서 지적한 폐단을 거듭 되풀이하며 그 골만 더욱 깊이 파헤쳐 온 것이다. 역사 교과서 문제는 그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일본은 사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는 나라로 꼽힌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상업주의 대중문화가 발달했지만, 그 역시 철학사상의 바탕이 없는 빛 좋은 껍데기일 뿐이다. 이렇듯 그들의 정신문화는 널리 공유해 세계화할 수 없는 오직 그들만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이없게도 그런 일본이 나는 부러울 때가 있다. 전통사상인 사무라이 문화가 어렵사리 사회의 시작과 끝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분야를 둘러보아도 하나로 묶여 나오는 철학사상이 없다. '효'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역시 사회를 하나로 떠받치기에는 그 힘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 헛걸음은 유교를 정치에 덧붙이되 학문으로 자유롭게 풀어놓지 않고 '신앙'으로까지 비약(飛躍)시켰던 조선시대로부터 이어져왔다. 우리의 유교정치는 중국이라는 강대국을 상대로 '실리주의'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면서도 궁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짖고, 왕조에서 그 관리까지 맡아보았던 엇갈린 통치체제에서 드러나듯, 고대로부터 면면히 내려온 불교를 비롯한 전통사상과 실생활 문화마저 배척함으로써 그 뿌리를 통째로 잃어버린 이른바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의 세계관은 닫혀 있었고,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신분제도로 찌들은 민초들과 선구적 지식인들의 반(反) 유교적 혁신사상은 지배계급에 의해 거듭 짓밟혔고, 결국 불교의 배타적 민간화로부터 지나친 합리주의의 악습에 물들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는 그런 문화와 사상의 커다란 혼란기였다. 계급주의의 팽배와 국론분열은 일제의 수탈과 지도층의 친일행각 등으로 그 골이 끝간 데 없이 깊어졌다. 엇물린 사상과 토착문화는 쏟아져 들어오는 외래문화를 미쳐 다듬지도 못했고,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대립은 해방 뒤의 더 큰 비바람을 만들어냈다. 식민시대의 찌꺼기들을 쓸어낼 짬도 없이 우리 부모들은 미국의 군사문화와 서구문화의 온갖 잡동사니들로 굶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그리고 자식들을 위해 허리띠를 바싹 졸라맨 채 숨 가쁘게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그 발전 위에서 젊은 세대는 먹고사는 문제보다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행복을 누려왔다. 그러나 이 사회는 짚으로 포동포동하게 채워진 허수아비일 뿐이다. 지금 그 속은 새카맣게 썩어가고 있다. 마치 미국의 아동문학가 봄 이 쓴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허수아비처럼 머릿속을 채울 뇌를 찾아 길고 긴 여행이라도 떠나야 할 판이다. 그만큼 이 땅에는 뚜렷한 정신문화가 없다. 그나마 있다면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룬 근면과 성실함, 즉 경제지상주의였는데, 일하는 사람, 돈 쓰는 사람, 국민을 등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시쳇말처럼 정치, 경제, 사회복지는 물론 계급간에 걸친 불신의 골이 가없이 깊게 패여 있을 뿐이다. 세대간에도 다를 바가 없다. 일명 3·8선으로 갈라진 남과 북처럼 뻣뻣하게 얼어붙어 기성세대는 한숨과 잔소리에 입이 마르고, 젊은이들은 어제와 내일을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로지 오늘만 살아가는 소위 유행병 환자로 메말라 가고 있다.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이며 사회학자인 리차드 하버마스는 그의 저서인 '문화의 흐름'에서 우리나라를 가리켜 '세대간의 갈등이 가장 극심한 나라'라고 일컬었다. 또한 가장 앞선 선진문화를 갖고 있던 나라가 지금은 거꾸로 간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모두가 경제지상주의와 독재정치라는 짐승이 할퀴고 간 상처들임에 틀림없다.
  독재정치와 경제지상주의는 '목마른 절규'와 그 잘난 '빨리 빨리'의 폐단만을 낳고 말았다. 부정부패로 치달은 빈부의 격차는 그릇된 합리주의와 억눌린 자기비화만을 이어오며 국민의, 사회의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경제식민사관에 길들은 문화적 사대주의를 낳았고, 전통에 대한 소명의식과 재해석까지 짓눌러버렸다. 전통사상과 문화는 현대의 이념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그 씨가 말라버리기까지 했다. 외래문화는 그런 우리의 사회를 온통 뒤덮어 과거의 유물만이 남아 있을 뿐, 도시에 즐비한 빌딩의 건축양식과 가옥구조, 순수와 대중예술 등에서는 전통을 현대화시킨 우리만의 문화적 산물과 사상이 여전히 없다. 오직 개인작업인 회화나 조각 따위의 미술 분야나 독립기념관 같은 기념비적인 건축양식에만 그 맥이 남아 있다. 자연히 우리의 국민의식은 그 민족적 정서와 겉도는 외래사상의 물결 속에서 '한국적 사상과 문화의 발전성'이라는 고운 때깔을 마냥 잃어온 것이다. 무릇 책과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 문화는 이미 그 상품성을 잃은 죽은 문화, 즉 과거의 것이지 현대의 문화가 아니다. 거듭 현대화시켜 사회 자체에 겹겹이 쌓여 보여지고 들려질 때, 문화는 비로소 그 생명이 살아 숨 쉴 수 있다.
  꿈이 없는 사람에게 발전이 없듯 한 나라는 국민의식과 발을 맞추어 가는 정치이념으로 살림이 꾸려져야 하는데, 지금도 우리나라는 정치인이건 경제인이건 하나같이 제 밥그릇 싸움에만 매달려 있다. 보복정치와 정경유착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대립으로 이어졌고, 당리당략만 앞세울 뿐 차근차근 이어져야 할 국민생활 안정은 언제나 입에 발린 선전문구였다. 그 동안 사회는 기회주의와 출세지향주의, 금권만능으로 몸살을 앓아오며 국민의식을 시커멓게 물들여 왔다. 뿐만 아니라 그 시커먼 악습을 고스란히 대물림하고, 소위 '갖은자'들과 정치에 대한 불신은 국민 모두의 열등감으로 그 터를 넓혀 오며 삐딱한 교육관과 인생관을 낳는 '불륜'마저 서슴지 않았다. 때문에 오늘에 이르러 정치와 엮어질 국민의식조차 없이 서로를 헐뜯거나 나 몰라라 물러서 있을 뿐이다.
  두루 살펴보면 이런 상황을 몰고 온 가장 큰 문제점이 메마른 대화에 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사회와 교육제도 어디에도 토론문화가 없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이기만 하면 프랑스인은 철학을, 영국인은 문학을, 독일인은 교육을, 중국인은 장사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 있다. 무릇 그들에게는 항상 무언가를 생각하며 말하고 쓰는 생활이 배어 있음을 잘 드러낸다. 서구의 토론문화는 사회학적으로 '광장문화'라고 일컬어진다.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로부터 전해 내려온 광장문화는 그 나라 국민의 의식 형성과 정치 참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왔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역사적 광장이 있는가, 없는가는 정치선진국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에게도 한 때 광장이 있었다. 서구의 광장이 목축생활과 기사제도에 의해 축제의 장소로부터 발달했다면 우리는 유교정치와 농경생활의 영향으로 시장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시장은 물건을 사고 팔며 값만 흥정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농사일에서 벗어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는 대화의 장이자 풍물패의 공연을 즐기는 공연장이고, 민의(民意)가 모아지는 투서란(投書欄)이기도 했다. 이밖에 전통 굿과 마당극, 보부상 등이 우리네 광장문화와 한 데 엮어져 있었다. 기미년 3·1 만세운동은 바로 이 시장을 기점으로 전국에 널리 퍼져나갔다. 무력으로 만세운동을 진압하자마자 데라우찌 총독은 제일 먼저 시장을 폐지 시켰다. 그리고 상권은 일본 상인들에 의해 장악 당했다. 이때 조만식 선생님의 국채보상운동에 의해 그 싹을 키웠던 민족기업과 상인들까지 무너지고 말았다. 살아남은 자들은 결국 일제에 빌붙었던 민족의 쓰레기들뿐이었다. 눈치 좋은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역사 청산에 대한 국민의 바램은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그에 대한 사회분열은 40년에 걸친 독재와 경제발전 지상주의로 이어져 이 땅에서 투쟁과 불신만 낳았을 뿐, 대화를 통한 합리주의, 즉 생각하는 힘은 키워내지 못했다. 오직 기회주의와 정격유착, 출세지향주의라는 악습만을 남겼다. 사슬에서 풀려난 동네 강아지가 멋모르고 날뛰듯 독재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그 기쁨에 취해 스스로 생각하기를 잊어버렸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도 몸부림치며 빠져 나온 과거의 악령에 넋을 몽땅 내던진 셈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른바 제물포 역 앞은 인천대학교와 인천전문대학이 들어서 있는데, 밤낮없이 한쪽은 키보드를 두들기고, 한쪽은 오락실에서 발을 바꿔 방방 뛰며, 다른 한편 에서는 술잔을 들기에 바쁘다. 대학교 앞에 번듯한 서점이라곤 없다. 컴퓨터 한 대로 전 세계인을 만난다는 젊은이들이 과연 그 화면 뒤에 제 얼굴을 꼭꼭 숨긴 채 '사람냄새'라는 단어의 뜻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지 나는 몹시 궁금하다. 머리가 이성이고 가슴이 감성이라면 컴퓨터는 곧 머리에 지나지 않는다. 감성과 이성의 적절한 어울림이야말로 사람의 아름다움과 미래를 비쳐 볼 수 있는 거울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꿈은 있다. 문제는 사상, 즉 생각과 노력이 모자란 꿈이 수두룩하다. 자신들의 꿈이라고 내세우는 것들은 한결같이 컴퓨터 관련사업이나 벤처기업, 프로 게임머, 증권 메니저, 스포츠 스타, 연예계 진출 따위들이다. 그 모두가 사행심과 요행심으로, 상업주의 대중문화에 길들여져 유행을 쫓는 한때의 흐름인 경우가 많다. 그 일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인생의 유차평가보다는 소위 스타의식에 물든 채 돈벌이와 사회적 지위, 권세에 대한 탐욕만이 판을 치고 있다. 이는 우리 젊은이들의 잣대가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가를 잘 나타낸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또 하나의 장벽으로 그 높이를 층층이 쌓아가고 있다. 기업과 대학 등 사회의 중추기관도 자본의 환원이나 참교육은커녕 부의 축척과 신분을 대물림할 뿐이고, 정치인, 학자 나부랭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몸뚱이는 21 세기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머릿속은 19세기 봉건시대를 헤매고 다니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현실을 쫓기에만 바쁘다. 꿈이란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보다 멀리 깊게 내다 볼 때 그 밑그림이 그려지며, 세대와 세대를 이어 대물림되고, 그 뜻을 더욱 알차게 남길 수 있는 법이다. 더불어 뭇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과거의 문화유산과 학문연구 등의 업적이 오늘에 있어 유용하게 쓰이고, 그 바탕으로 미래의 발전을 약속 받을 수 있듯 우리 모두의 꿈은 사회로, 세계로 이어져 후손에게까지 이른다. 이것이 바로 '사회의 연속성'이고 '역사의 지속성'이다. 사람은 항상 10년 전과 10년 후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시쳇말대로 100년 전과 100년 후를 돌아보는 나라야말로 세계사를 이끌어 갈 수 있다. 몇 해 전, 텔레비전에 나오던 공익광고 중에 내가 몹시 좋아하는 문구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는 이 땅을 후손들에게서 빌려 온 것입니다"라는 짧지만 정말 가슴 벅찬 내용이었다. 그 뜻은 아주 분명하다.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자손들이 살아갈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나눔의 삶'이다. 한 개인과 사회의 이상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꿈은 더욱 소중하게 떠오른다. 뜻이 아무리 좋아도 노력이 따르지 않는 꿈은 그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만을 위한 꿈 역시 결코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며, 다음 세대로 면면이 이어질 수 없다. 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올곧은 철학사상을 바탕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때 국민은 탄탄한 현실을 디디고 내일의 꿈을 이루어 간다. 더불어 '나라의 꿈'이 실현 될 수 있다. '로마의 휴일'이나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담아냈던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의 아름다움은 세월과 함께 시들어버렸지만, 지금껏 사람들이 그녀를 천사의 미소로 새록새록 떠올리는 이유는 '헵번 재단'을 이끌고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위해 평생을 봉사했던 그 '나눔의 삶' 때문이다.
  지금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또 다시 자신만의 생활과 출세, 돈벌이에 눈이 멀고만 '일벌레'로 움츠러든다. 우리나라에는 중산층이 없다는 말 그대로 3, 40대 장년문화가 텅 빈 채 나동그라져 있다. 중산층과 장년층은 그 나라가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를 가늠하는 잣대이자 안팎의 모양새를 갖추는 뼈대이고, 자동차의 엔진 마냥 사회를 움직이는 힘, 그 자체이다. 사회의 허울과 믿지 못할 교육제도는 부모와 학생들을 '대학 중독증'으로 들볶고, '사교육'은 그들의 주머니를 털어 뼈대마저 일그러뜨린다. 암기 위주의 교육은 자신의 생각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멍청한 명문 대학생을 키워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악순환이다. 다람쥐가 아무리 쳇바퀴를 열심히 돌려도 우리에서 빠져나갈 수 없듯이 아직도 우리 사회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마냥 겉돌고 있다. 나라의 운전기사인 정치·경제인들은 신호와 교통안전 표지판을 보기 위해 속도를 늦출 생각도 없이 그저 내달려 가기에 바쁘다. 툭하면 편을 갈라 비아냥대며 몸싸움을 벌이기까지 한다. 자신들이 피땀을 흘려 쌓아올렸던 탑이 위로는 썩고 아래로는 흔들리는 동안 부모세대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만 태우며 안간힘으로 그 탑을 부둥켜안고 있다. 가정이 그렇듯 대화가 없는 사회는 겉돌 수밖에 없다. 사회의 올바른 발전은 시대에 따라 각 분야가 그 배턴을 서로 주고받으며 발을 맞추어 나가는 '이어달리기'이다. 무릇 그것은 세대와 계층간의 높은 벽을 허물어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출구를 뚫는 작업이기도 하다.
  지금 전세계는 경제와 문화가 한 물결로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이른바 더글라스 맥도날드사의 체인점은 우리의 거리를 뒤덮은 채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는 130여 개에 달했던 파리의 명물인 일명 노천까페를 불과 40여 개로 줄여놓으며 천문학적인 로열티를 받아 챙기고 있다. 이제는 우리도 '문화혁명'을 일으켜야 할 때이다. 굳이 '문화경제대국'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서지는 못하더라도 이 땅의 상처를 스스로 감싸안아서 자손들에게 똑같은 아픔을 대물림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선배로써 벗어 던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이다. 우리에게는 역사와 함께 해온 빛나는 전통문화가 있다. 그러나 전통은 외래문화의 방파제가 절대 아니다. 외래문화를 잘 얼싸안아 우리만의 것으로, 또 다른 소재로 발전시켜야 한다. 따라서 전통에 앞서 그런 문화가 있음을 다양하게 풀어내 읽혀지게 하고 보여주며 들려주어야 한다. 예술 역시 서로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국악인 김덕수 선배님이 술자리에서 들려줬던 재미있지만, 나에게는 뜨끔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있다. 1986년에 미국의 카네기홀에서는 '전세계 타악기 대축제'가 있었다. 공연 프로그램이 따로 정해지지 않은 채 순서만 맞추어 자유롭게 두들기는 무대였는데, 우리 '사물놀이패'의 연주가 끝나자 공연장은 관객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로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무려 열 한 차례나 쏟아지는 앙코르를 받아주는 동안 관객들이 스스럼없이 일어나 절로 우리의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더라고 했다. 나중에 무대감독이 찾아와 너희 나라는 땅덩어리도 작은 데 어떻게 그 많은 멜로디와 박자를 단 네 개의 악기로 쳐낼 수 있는가, 하며 자못 신기한 듯 물었다. 그때 김덕수 선배님은 싱긋 웃으며 우리말로 이렇게 내뱉았다고 한다. "야, 이 새끼야. 너희는 기껏 2백년이지, 우리는 반만년이야, 이 새끼야."
  그때 사물놀이는 막 국내 무대에서 벗어나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가던 참이었다. 만일 한 발 앞서 우리 영화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작은 소재로나마 사물놀이를 담아주고, 하늘을 울리며 땅을 두들기는 그 소리를 들려주었더라면 더 빠른 발걸음으로 세계를 누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만들어진 영화에 우리의 소리가 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흔히 한 맺힌 가락이나 판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리곤 했는데, 생활문화가 기독교로 채워진 외국인들에게 굿과 판소리는 아직 덜 익은 열매나 다름없이 너무 앞선 소재였다. 우리 예술인들이 암울한 시대의 아픔에 휩싸여 한 맺힌 가락만 찾고 있을 때 김덕수 선배님은 신명이야말로 전 세계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우리만의 소리임을 외래문화 속에서 엿보았던 듯하다. 미국의 팝송이 앞장 선 서구의 음악은 우리들처럼 한 해가 다르게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다. 각 장르가 지역문화와 연령, 계층에 걸쳐 사뭇 폭 넓게 퍼져 있다. 그 중 에서도 그들의 역사와 철학사상, 사회변천사가 물리적 힘이라는 과학문명의 발전이었던 만큼, 또 현대 대중음악의 뿌리가 흑인들의 '애가'에서 나왔으므로 당연히 비트가 강하고 리듬과 템포가 빠른 음악에 쉽게 빠져든다. 더불어 정신문화의 발전이 기독교적 윤리관으로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동양의 신비적인 분위기를 새삼스레 훔쳐보기도 한다. 바로 이런 점들이 사물놀이와 그 맥이 맞아떨어졌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지금 가까이하는 연극, 영화, 문학, 음악 등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은 서구사회로부터 받아들인 그들의 문화였다. 대충 둘러쳐도 그 역사가 백여 년씩은 뒤떨어져 있다. 우리의 지난 50여 년은 서구사회가 전에 내세웠던 문화와 사상, 정치, 경제를 따라잡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들은 한참 앞서가고 있었지만, 우리는 먼저 배고픔부터 면해야 했다. 한 나라의 문화는 경제생활 개념을 따라간다. 자연히 우리의 예술작품은 그들이 이미 18세기부터 써왔던 소재를 그대로 옮겨 담을 수밖에 없었다. 문화수출은 꿈같은 일이었다. 문화는 현재의 생활과 맞물릴 수 있을 때 그 힘을 무섭게 펼칠 수 있다. 당연히 경제가 그들의 생활과 맞아 떨어져야 한다. 세계인이 함께 느낄 수 있는 정서의 보편타당성이 깔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문화선진국들 역시 빈곤에 의한 국민폭동이나 경제 우선주의 의 길을 걸어 왔었다. 단지 우리나라만큼 그 변화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으며, 개척정신 하나만으로 일어섰다는 미국의 경우도 속속들이 파헤쳐 보면 식민시대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의 앞선 문화와 사상이 이미 깔려 있었다.
  역사문제도 그 흐름에 한데 엮여 있다. 우리가 오늘을 얼마나 부끄러운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 지 다시금 새겨보기 바란다. 일일이 늘어놓지 않아도 너무나 많은 부끄러운 상처들이 주위에 널려 있다. 그 아물지 않는 상처들은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 전해질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 책임은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 우리들에게 있다.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상처는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한다. 상처는 너무 꽁꽁 싸매 놓아도 덧나기 마련이다. 지난 역사 속에서 감춰 두었던 상처들이 그 터를 넓혀 사회를 송두리째 뒤흔들었음을 익히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자신의 부끄러움과 숨바꼭질하는 동안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너무 많이 잃어 왔다. 후회 없는 삶을 영위하기는 실로 어렵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바쁘고 알차게 꾸려가기는 한결 쉽다. 노력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얽어맬 수 있으며 '내가 곧 세계이고, 세계는 나를 필요로 한다'는 거시적인 안목과 자신감만 있다면 사뭇 즐겁고 보람 있는 삶을 꾸려 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세계사의 흐름은 또 다시 냉전으로 치달아가고 있다. 2030년대에 이르러 이번에는 그 잠재력을 한껏 키워낸 중국과 미국의 대립이 찾아올 것이다. 그로 인한 민족주의적 갈등은 러시아라는 거대 시장을 두고 벌이는 경제와 군사력의 힘겨룸에 이어 문화의 소용돌이로 드세게 일어날 터이고, 우리나라는 그 싸움의 전초기지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떠오를 터이다. 그때 남북한의 물꼬가 드넓게 터 있지 못할 경우, 웅덩이의 물이 썩어가듯 우리는 또 다시 중국과 미국의 편 가름으로 그 길고 질긴 이데올로기의 몸살을 앓아야 하며, 통일은 영원한 '우리의 소원'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이 경제로부터 문화, 교육, 학술 등 여러 가닥의 나뉨을 하나의 외교정치라는 굵직한 동아줄을 엮어 낸다면, 민감한 극동아시아의 정세를 이용해 세계를 어우르는 드높은 나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때문에 남과 북이 민족주의로써 자결을 이루어 공존의 방법을 모색해 나가야 함이 당연하다.
  유럽연합은 지난 역사 속에서 정치와 경제, 문화, 철학사상 등 사회발전의 흐름을 함께 해왔고, 그 물결이 지난 세기 동안 전 세계를 휩쓸곤 했다. 연합전선도 미국 주도의 경제와 군사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으로 지난 1960년대부터 논의되어 왔던 자본경제사관과 소위 냉전시대의 산물이다. 그 속내를 들추어보면 지난 세기의 영광과 국가적 자존심 회복이라는 보수성과 민족주의의 잡음이 짙게 깔려 있다. 일본과는 달리 변화는 할 수 있지만, 그 한계를 곧 드러낼 체제이다. 러시아라는 거대 시장은 그들의 입맛을 당기는 보기 좋은 먹거리임에 틀림없다. 동유럽의 독립국가에 막대한 자본을 쏟아 부으며 오리엔트 특급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을 발 빠르게 벌이고 있는 그들의 속셈은 동유럽을 거점으로 러시아의 경제특수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하나의 시소를 놓고 그 한 가운데에는 유럽연합이, 중국과 미국을 내세운 구 이데올로기의 세력이 그 양쪽에 들어앉아 있는 삼각구조요, 거대자본인 다국적 기업의 침투로 경쟁은 가속화되고 있다. 세계의 경제구조만 살펴보더라도 이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북미경제 협력 기구가 남미를 껴안아 유럽 경제협력기구와 편을 가른 채 러시아,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경제협력기구는 그 틈바구니에 겨우 끼어 들어가 있는 판이다. 그 구도 안에서 각자의 이익을 쫓아 사상과 정치외교도 같은 흐름을 타고 있다. 단지 중국만이 따로 떨어져 저 혼자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을 뿐이다.
  중국은 사회주의를 쉽게 버리지 않는다. 이는 구소련의 붕괴가 민족국가 독립으로 이어졌고, 그 여파가 지역경제의 몰락을 가져와, 종내 국가경제를 뿌리째 넘어뜨렸음을 그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역시 다민족국가인 만큼 사회정치의 개편을 섣불리 할 수 없다. 오히려 지금 그들은 그 시소 놀이를 눈치껏 잘 이용해 국가 경쟁력을 든든히 길러내고 있는 무서운 나라이다. 문제는 중국이 신문화의 침투를 과연 얼마나 막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데, 중국이 가장 민감하게 대처하고 있는 분야도 바로 문화 개방과 신사상의 태동으로, 그것은 체제와 어긋난 문화의 흡수가 사상의 전이를, 결국 한 나라의 붕괴로 내달려 왔음을 그들이 역사 속에서 절절히 깨달아 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계사를 이끌어 온 사상의 근간은 식민사관이었다. 15세기부터 식민지 개척에 나섰던 유럽 열강의 영토확장은 결국 무력경쟁으로까지 이어져 극단적인 민족주의 사관에 의한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이후, 영토분쟁은 모양만 바꾼 채 소비시장과 원자재 공급이라는 경제 기득권 찬탈로 이어졌다. 한 나라의 시장구조를 길들여 대량의 소비자를 확보하기 위한 자본주의 경제사관은 약소국의 경제와 정치적, 사상적 약점을 이용해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한편 교육과 문화에 걸쳐 강대국이 주는 대로 받아먹는 '돼지 사육장'을 만들어 왔다. 미국과 구소련의 냉전시대에 이르러서 그 폐단은 극으로 치달았다. 약소국(弱小國)은 스스로 돼지이기를 원하는 독재와 민족사관에 눈을 뜬 반독재의 노선을 오가며 크고 작은 내전(內戰)과 사회불안을 겪어야 했다. 거대 자본주의 국가의 하청업체로, 그 경제구조의 체질은 영양실조환자나 다름없었다. 자연히 스스로 험한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기보다 코앞에 던져주는 먹거리를 쫓아 길이 아닌 길을 걸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 뿐 아니라 국가간의 악순환은 그 사회에까지 맹독을 퍼뜨렸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그 모든 분야가 흐름이 엇갈린 개울 마냥 흐트러졌고, 민족의 정체성(正體性)마저 뒤흔드는 뿌리 깊은 불신만을 낳았다. 즉 한 나라의 시장경제를 갈아먹기 시작한 거대 자본은 그 생명인 문화와 사상까지 고스란히 파헤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세계사의 흐름은 중국과 미국의 대립, 그로 인한 한반도의 정세변화와 유럽연합의 세력 확장이라는 폭풍우를 내비치고 있다. 한반도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냉전을 잘 뛰어넘으며 당분간은 손해를 보더라도 러시아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그들과 손을 맞잡아야 한다. 유럽연합은 러시아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 침투를 넘어서 중국과의 신경전으로 치달아 극동에 불어올 또 하나의 태풍이다. 그것을 미리 막아 우리에게 유용하게 이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폭풍우 속에서 우리가 또 다시 저 과거의 악순환을 되풀이한다면 세계평화는 물론, 국가발전과 통일이라는 민족염원은 바다에 가라앉는 난파선의 이름으로 새겨질 것이다.
  이후, 세계는 문화의 대립과 공존을 모질게 겪으며 하나의 단일체제로 묶어갈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것을 역사에 있어 다시 한 번 거듭되는 문화의 르네상스 운동이라 부르고 싶다. 17세기의 르네상스는 고전주의, 감상주의, 낭만주의에 이르러 근대 철학과 자연과학의 기초로 자리를 잡았고, 그 후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21세기의 르네상스 운동은 과거에 대한 반성과 함께 발달한 과학문명을 범 우주적인 세계관의 확립으로 이끌어내 인류공존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더불어 민족주의는 절대 대안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지나친 민족주의는 국수주의를 불러와 사회발전을 가로막는다. 각 민족의 정통성과 객체성을 인정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문화와 철학사상을 추려냄이 민족주의의 올바른 실현이다. 먼저 경제 식민사관으로 얼룩진 각 나라 전통문화의 근간을 새로이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 걸음이 대중문화에 이르렀을 때, 민족자결의 정신문화가 하나로 뭉쳐질 수 있다. 현대 21 세기의 사회는 '문화 정보의 시대'라고 일컬어진다. 종교와 경제의 이해관계를 넘어 민족마다 간직한 고유한 문화와 정서, 그 사상을 하나로 보듬어 안아 국가간의 특이성을 바탕으로 알맞은 경제협력을 이끌어 나갈 때, 비로소 세계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인류공존이라는 배를 만들어낼 터이다. 때문에 그 운동을 이끌어 전 세계를 어우르는 나라에는 성숙한 정신문화가 깊이 깔려 있고, 타 민족문화에 대한 유동성과 수용성이 유기적으로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진정 그런 나라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기다리던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제 우리 사회는 해일과 같은 변화에 휩쓸릴 것이다. 당장은 경제로 불어 닥치겠지만, 이데올로기의 꼭두각시였던 정치와 문화를 향해 넘어오는 물결은 그 기세가 한층 더 드세어질 수밖에 없다. 통일을 위한 남북의 교류는 정치 안정을 바탕으로 꾸준히 이어져야 함으로, 이제 국민정서는 정치 싸움을 눈감아주지 않을 것이다.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은 어쨌든 민족의 동질성 회복운동이겠지만, 멀리는 급변할 사회정서를 어떻게 감싸 안아 통일을 향한 미래지향적인 주제로 풀어내느냐가 더 큰 불길이다. 그 전에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싸워나가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문학만을 보더라도 지나친 개인성향의 문제의식으로 독자들의 입맛이나 맞추려 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대적 사명감을 잊어버린 제 배나 채우기에 바쁜 치졸한 작태이다. 더 이상 지난 시대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 예술인들이 보다 멀리 보며 큰 걸음을 디뎌가야 할 때임을 절대 잊지 말기 바란다. 과거의 구습에서 벗어나 싸워야 한다. 뚜렷한 인과관계로 자신과 사회에 문제의식을 갖고 부단히 싸워나갈 때, 그 싸움은 보다 빨리 잦아들 수 있다.
  이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이다. 그것은 작지만, 그 동안 너무 움츠려 있었기에 한층 커다란 움직임으로 다가와야 한다. 경의선 철도가 다시 놓여지면 평양과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 심양, 시베리아에서 타슈켄트, 이스탄불까지,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우리 역사의 아픔을 낱낱이 주워 담아 파리와 런던으로, 전 세계를 잇는 문화혁명의 비단길이 다시 이어질 것이다. 그것은 지난날 우리의 발목을 잡아끌었던 이데올로기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나는 그 길을 걸어서 가련다. 삼베옷에 흰 고무신을 꿰어 싣고 한 손에는 막걸리 병을 든 채 서러운 기쁨만큼 미친놈처럼 큰 소리 내어 울부짖으며 터벅터벅 걸어가리라.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쓰다듬으며 고구려의 세계관을 이 덜 떨어진, 멍청한 위정자들에게 들려주고 보여 줄 터이다. 타슈켄트의 그 황무지를 가꾸어 저 북지인(北地人)들을 먹여 살렸던 이름 모를 우리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스탈린 그 붉은 콧수염에게 내몰려 얼어 죽고 굶주려 죽어간 내 핏줄들, 고향 하늘만 바라보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낯선 동토(凍土)에 파묻힌 그들을 위해 잘 생긴 돼지머리 한 놈 받쳐놓고 제를 올려드리리라. 그리고 길 가던 그 땅의 농부를 불러 세워 혹시 아리랑을 아는가 물어보고도 싶다. 극심한 정신분열로 우리말은 고사하고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 못하던 고려인 할아버지가 타슈켄트 정신병원의 쇠창살에 매달려 불러대던 그 아리랑을 아느냐고 말이다. 김복남 할아버지, 서울에서 왔다는 말에 "나 데려 가, 나 가야 혀. 어무이가 기다려"하며 쇠창살에 달려들던 그 모습, 그 분이 목놓아 부르던 '어무이', 바짝 쪼그라든 그 얼굴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 어무이를 그리다, 고향 땅에 향수병이 걸려 정신을 놓쳐버린 복남이 할아버지를 우리는 미친 사람이라고 절대 부를 수 없다. 이 땅에서 우리는 너무나 큰 죄를 짓고 산다. 왜, 우리는 그들을 모른 체 하고 있는가. 러시아의 고려인들은 민족자치를 인정해 그들만의 권익을 보장받고 있는 중국의 조선족과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처해진 상황이 사뭇 다름을 알아야 한다. 그들 대부분은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버려졌던 이들과 그 후손들이다. 또 '의혈단' 등,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믿었기에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자 연해주로 모여들었던 무장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적지 않다. '백러시아 전쟁'에 참가한 후, 무장해제를 당한 채 시베리아의 혹한보다도 더한 나라 없음의 한을 곱씹던 부모들의 죽음을 지금껏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다. 구소련의 위성국가들이 독립을 이루면서 지금 그들은 농토를 빼앗긴 채 강제이주의 한이 맺힌 사할린으로 다시 모여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피눈물을 훔치며 울부짖는다. "조국이 그만큼 잘 살고 있는데, 왜 우리를 버려두고 있는가. 원인 제공자인 일본은 모른 척해도 조국은 우리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냐"며 말이다.
  복남이 할아버지는 이미 3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 분의 아버님은 북로군정군 소속의 독립투사이셨다. 민족을 위해, 조국을 위해 살다 천장지구 전투에서 전사하셨지만, 조국은 그 분의 아들을 내팽개쳐 두었다. 러시아가 문호를 개방했을 때 그나마 복남이 할아버지 같은 분이라도 모셔왔어야 했다. 지금도 정부는 아무런 정책방안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기껏 내놓은 방안이 제 1세대만의 영구귀국이다. 우리 스스로 그들에게 또 다시 이산의 아픔을 심어주며 광복 몇 주년이다 해서 행사만 요란하게 벌이고, 말로만 역사청산을 떠들어댄다. 조상을 잘 섬기는 동방예의지국이라니, 웃기는 소리다. 나는 기필코 타슈켄트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복남이 할아버지를 이 더럽고 치사한 '어무이의 땅'으로 모셔올 것이다. 그 분들의 한풀이를 해드려야 한다. 이 한은 일본에 대한 반감과 함께 열등감만 불러일으키며 두고두고 물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열등감도 부끄러움의 하나다. 이 어긋난 '감정싸움'을 이겨내 냉철한 판단력을 세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절대 과거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없으며, 이제 겨우 고개를 치켜든 내일을 향한 '탈바꿈'까지 여지없이 꺾여버리고 말 것이다. 일본은 이겨야 하는 나라임과 동시에 극동의 지역문화 만들기와 경제, 정치외교 나누기로 우리가 껴안아야 할 나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남이 할아버지가 불렀던 아리랑, 그 아리랑은 본래 광명(光明)의 세계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뜻한다. 바로 우리민족의 이상향이다. 모진 세월을 이기고 저 가파른 인생의 언덕을 걸어 오르면, 이윽고 낙원에 이르리라는 민초(民草)들의 염원이 담겨져 있다. 나에게는 다시금 열릴 비단길이 그 광명의 고갯길로 보인다. 우리에게 통일은 지금껏 풀지 못했던 지난날의 상처들을 차근차근 추리고, 우두커니 지켜보기만 했던 이 사회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기회이다. 때문에 통일은 우리 민족에게 이 시대의 문제이자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교류를 통해 남과 북이 화합할 수 있을 때 통일에 이를 수 있으며, 그 과정에는 자연히 뿌리 깊은 과거와 현재의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필연성이 들어앉아 있다.
  그 '아리랑 길'을 함께 가고 싶지 않은가. 그 길을 가려면 먼저 지금껏 우리를 떠밀어 왔던 사상과 식민사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즉 배움의 자세로 우리의 전통과 서구의 철학사상, 정치, 교육제도를 연구해 민족 정서와 현실에 맞는 미래지향적 체제를 만들어가야 한다. 나는 더 이상 우리나라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세계사의 흐름에 뒤쳐져 허우적거리기를 바라지 않는다. 일찍이 백범 김구 선생님이 남기셨던 말씀을 떠올려 본다. "통일이 없이는 진정한 평화와 자유가 올 수 없으며…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닌 강대국의 하수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군사력으로 강대한 나라가 되기는 바라지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우리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여건이 그러하며…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라는 말씀, 선생님은 100년 앞을 내다보셨다. 선인의 가르침조차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을 무릎 끓어 사죄드리며 이만 끝을 맺는다. 다가오는 6월 26일은 백범 선생님의 서거 51주년이다. 죽는 날까지 민족을 위해 사셨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나아갈 바를 가르쳐주신 큰 어른이요, 스승이시니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딱 한마디만 한다. 나는 원래 말은 많지만, 함부로 지껄이지는 않는 사람이다. 단지 글이랍시고 끼적거릴 때는 퍽 거칠어진다. "빌어먹을, 정신 차려 이 썩을 연놈들아!" 

                                                         2000년 6월 17일
                                  제물포 잠만 자는 방에서 말 많은 놈이...

  그리고 2002년 여름, 한반도가 몸부림 칠만큼 '대한민국'의 함성은 드높았다. 내가 좋아하는 아리랑이 바라던 대로 희망의 노래로 불리며 한 때나마 젊은이들은 민족의 긍지로 이념과 사회계급이라는 높디높은 장벽을 뛰어넘었고, 그 감격에 설레는 가슴을 쓸어 내리곤 했다. 그러나 광화문 사거리를 가득 채웠던 태극기와 그들의 함성은 한 때의 축제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내 나라가 그저 스포츠 따위에서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 아직도 이 땅에 피맺혀 있는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타슈켄트에 가면 '고려인 예술극장'이라는 곳이 있다. 타슈켄트 시청 사옥의 일부를 빌어 공연예술과 '고려인 신문'을 통해 민족의 정서와 자긍심을 꿋꿋하게 지켜온 곳이다. 1993년 우리 기업들이 북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그곳에 현지법인을 세워 한창 경제활동을 꾀하고 있을 때 고려인 예술극장은 한 달에 50달러가 채 안 되는 임대료를 내지 못해 쫓겨날 처지였다. 그들은 우리 기업인 대우, 쌍용, 기아, 현대 법인들에게 공문을 돌려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잘난 우리 기업들은 그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말았다. 그때 어느 나라의 대사관과 문화원에서 그들에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주었다. 일시적인 지원이 아니라 지속적인 지원사업으로 그들이 다시는 길거리로 나앉을 어려움에 쳐하지 않도록 든든히 뒤를 받쳐 주었다. 바로 터키였다. 소위 6·25 전쟁에 참여해 피를 나눈 형제의 국가이기에 그 나라의 민족을 도와주었을 뿐이라는 것이 그 당시 터키 문화원 원장의 소박한 답변이었다.
  스페인에 가면 안익태 선생의 거리와 기념관이 있다. 안익태 선생님, 그 분이 누구인가? 평양고보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해 일경에 쫓기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났고, 평생을 음악으로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이다.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과 협연을 할 때 그 분은 항상 두 가지 조건을 까다롭게 내세우셨다. 애국가의 원곡인 '코리아 환타지'를 반드시 마지막 곡으로 연주할 것, 그리고 합창단원 전원이 필히 우리말로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조건이 수락되지 않으면 당신께서는 지휘를 절대 맡지 않으셨다. 그 분께 음악은 단순한 예술 활동을 뛰어넘어 목숨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조국 독립을 위한 피울음이었던 것이다. 요한 시트라우스 이후, 후기 낭만파 음악의 거장이셨지만, 광복 이후에는 조국의 현대음악 발전을 위해 그 명성과 지위를 송두리째 내팽개친 채 이 땅에 달려 오셨다. 비록 친일파들로 구성된 사회 권력층들이 조장한 금권과 패권주의와 싸우느라 제 뜻을 펼쳐보지도 못했지만, 스페인 자택에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조국을 그리셨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그 분과 같은 선인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10년 전 그 자택이 임대료 체납으로 매각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선생의 가족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우리 대사관을 찾았다. 그때 우리 정부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아무 것도, 단 1달러도 말이다. 그저 정부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다행히 그때 스페인을 여행 중이던 어느 독지가가 정부에 항의하다 지쳐 자신이 그 건물을 통째로 사들여 가족들에게 헌납해주었다. 한 나라의 국가를 작곡한 예술가요, 건국훈장을 수여하신 독립유공자에 대한 우리 정부의 끔찍한 예우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애국가를 부를 자격이 있는가.
  이제는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부끄럽다, 죽고 싶을 만큼. 내 자신이, 그리고 잘난 이 나라가, 이 땅에서 목청만 키우는 위정자들이 말이다. 그러나 죽기로 마음먹고 이 어그러진 현실과 싸우기 위해 살아남아야 함을 혀를 깨물며 다짐해오곤 했다. 다시 한 번 거듭 말하지만, 민족주의는 방법일 뿐 대안이 아니다. 국수주의가 아닌, 우리의 목소리를 키워 세계 발전의 흐름을 올곧게 쫓아가야 함을 절대 잊지 말기 바란다. 그래야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우리말과 글로 우리의 의사를 세계에 알릴 수 있을 것이다. 문화란 되짚어보면 그 나라의 생활 자체이다. 향후, 우리의 생활이 강대국의 부산물들로 채워져 정신마저 좀먹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주 명확하다.
  이젠 정말 술이나 퍼마셔야겠다. 술이라도 마음껏 마셔야지 그 무엇으로 복받치는 이 시린 가슴을 달래겠는가? 그리고 한시름 잊고 푹 자고 싶다.
                                                       (2002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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