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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가 우리땅인 근거

허혜숙 |2006.04.20 14:21
조회 171 |추천 2

* 역사

독도의 내력은 일찍부터 기록에 오르내린 울릉도와 관련지어 살펴보아야 한다.본토 유민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울릉도의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된 것은 6세기 초 (512) 후였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512)년에 "6월에 우산국이 신라에 속했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울릉도라는 명칭이 정착됨에 따라 그 부속 도서인 독도로 우산이라는 명칭이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 1432년 (세종 14)에 편찬된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서도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동해 상에 무릉과 우산의 두 섬이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531년 (중종 26)에 편찬된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 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다.

1694년 삼척청사 장한상이 울릉도의 300여리 근처에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의 섬을 발견한 기록을 담은 를 펴냈다. 이것은 한국 문헌에 나오는 울릉과 우산(독도) 의 지명은 모두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울릉도와 그 부근에 있던 독도를 우리가 17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생히 입증하는 것이다. 18세기 에 나온 정상익의 에 이르러서는 울릉도와 우산도의 위치와 크기가 정확하게 표시되었으며, 조선 후기의 지도첩에는  으레 울릉도 옆에 우산도 또는 자산도를 표기하고 있다. 일본 스스로도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인정한 자료가 줄을 잇는다.

독도는 512년 울릉도와 함께 신라에 귀복되었으며, 고려에서는 행정 구역에 편입시키고 백성을 옮겨살게 하는 등 울릉도와 독도 경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었다. 조선시대에는 독도를 '우산도', '삼봉도', '가산도', '가지도'등으로 불렀다.조선은 한때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든 섬에 공도정책을 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가 잦아지자,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 받고 일본 어부의 어로 활동을 금지토록 하였다.1667년 일본인이 편찬한 , 1869년 일본 외무성 고관들이 편찬한 , 1876년 일본 내무성에서 만든 결정서, 1876년 일본 해군성이 작성한 , 1905년 동경박물관에서 펴낸 , 1936년 일본육군참모본부에서 나온 등의 자료 등에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밝혔다.기인 1899년(광무 3년)에 당시 중등과정 신식교육기관에서 활용됐던 제 1권에 삽입 돼 있는 지도 대한전도에는 울릉도 옆에 '于山'이라는 표기와 함께 섬이 그려져 있으며 좌 측 상단에는 '光武 3년 12월 15일 學部 편집국 刊'이라는 표시가 선명히 적혀져 있다.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있던 독도를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 41조에 의해 독도를 울릉군의 한 부속도서로서 공식적으로 강원도에 편입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1905년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5년 앞선 것으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사실을 뒤엎을 수 있는 귀중한 발견으로 평가된다.'독도'라는 이름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상 북도에 편입되었고, 2000년 4월 7일을 기점으로 행정구역상 주소를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리 산1~산37로 정하였다.

 

 

* 독도연표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 이사부 우산국 정벌 신라영토에 귀속시킴 (삼국사기)      

930년

고려태조 13년 고려에 귀속

1401년

공도정책

1425년

우산도로 호칭

1454년

(단종2년)에 완성된 세종실록중 권 148권에서 권 155까지의 8권 8책에 지리지로써 세종실록지리지라고도 하는데 권 153강원도 울진현조에 그 부속도서로써 우산도와 무릉도를 열거하고 이들의 개략적인 위치를 우산, 무릉2도 재현 정동해중 2도 相距不遠 風月淸明卽望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사기록은 독도와 울릉도의 관계를 뚜렷이 밝힌 세계 최초의 문헌으로 평가되며 세종 14 년(1432년)에 편찬된 신선입도지리지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머리에 밝히고 있다.

 1469년

삼봉도로 호칭

 1693년

자산도로 호칭 동래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 근해에서 왜인발견퇴거 안용복이 은기를 거쳐 도일 덕천관백에게 출어금지서계 징구 울릉도 일본어민 퇴각

1697년

3년마다 정기적인 치안 확보

 1881년

(고종18년) 울릉도 개척령 반포 (척민정책) 일본어민의 울릉도 근해 출어에 대한 일본정부에게 엄중항의

1900년

10월 27일 (대한제국 광무4년) 관보 제 716호의 칙령 제41호 울릉도, 즉도 석도(독도)를 울릉군수가 관할토록 함.

1905년

2월 22일 독도의 일본령 편입결의 도금현 고시 제40호로 독도의 동현편입 발표

 1905년

독도망루설치 해군통신기지로 이용 광무 10년 3월 5일 울릉도 군수 심흥택 보고서 「매천야록」에 독도 관련기록

 1907년

경삼남도 울도군으로 편제

1910년

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한국령으로 표기

1914년

경상북도 울도군으로 편제

1946년

1월 29일 SCAPIN 제677호 -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의 시행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에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통치권에서 제외

 1948년

 6월 30일 미공군 폭격연습중 독도출어중인 어민 30명 희생 한국정부의 항의에 따라 1953. 2,27자 미공군 연습기지에서 제외 1951년 6월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건립

1952년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사 독도를 기점으로 평화선을 선포함

1953년

일본이 미국기를 게양, 조난어민 의령비 제거, 일본영유 표지 설치, 한국 어민 독도근해조업에 대한 항의.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본에 항의각서 발송 그해 8월 5일 영토비 건립, 해양경비대 파견 협의

1953년

4월 27일 울릉도 주민(33명)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대장 : 홍순칠)

1954년

항로표지(등대)설치. 동년 8월 1일 점화개시 각국에 통보

1956년

4월8일 국립경찰의 경비임무 인수결정

1956년

12월 30일 경비임무 인계인수 1966년 4월 12일 수비대장 홍순칠 공로훈장 수여

1980년

최종덕 독도 전입

1981년

헬리콥터 이착륙 시설 설치

1986년

7월8일 동인의 사위 조준기(61. 3. 20 생) 주민등록 전입 (가족 3명) 6개월간 어로작업목적

 1991년

11월 17일 김성도(56세) 외 가족 (1명) 전입(서도)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 32명 근무 (동도)

1993년

레이더 기지 설치

1996년

접안시설공사 착공

1997년

울릉읍 독도리에 독도박물관 건립

2000년

행정구역상 주소를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리 산1~산37로 변경

 

 

* 고대역사

삼국시대 ~ 1. 512년 6월 (신라 22대 지증왕 13년)

1) 지금의 울릉도를 본도(本島)로 하고 독도로 인정되는 우산도(于山島)를 작은 섬으로 하는 우산국(于山國)이 라는 하나의 독립국(獨立國)이 있었다.   2) 신라 22대 지증왕은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君主)로 이찬 벼슬에 있던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복케 하였다.   3) 이사부는 나무로 만든 목우사자(木偶獅子)라는 무기를 써서 우산국을 정복한 뒤 6월에신라에 귀속시켰다.  4) 그 뒤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다.

고려시대 ~ 2. 930년 (고려 태조 13년)

고려 태조13년 우릉도(지금의 울릉도)에서 사절로 백길,토두 두사람을 보내어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 백길에게는 정위, 토두에게는 정조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 때가 고려 태조 왕건이 길창(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을 무찌른 해이다.

3. 1018년 (고려8대 현종 9년)

(우산국이) 동여진의 침략을 받아 항복하였으나 곧 조정에서 이완구를 시켜 피난민을 우산국으로 돌려보내고 농기구와 이물품을 전달

4. 1022년 (고려8대 현종 13년)

동여진의 침입으로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을 예주에 살도록 했다.

5. 1132년 (고려 17대 인종 10년)

울릉도 독도에서 → 조정에 공물을 바침

6. 1132년 (고려 17대 인종 10년)

우산국대신 → 우릉(于陵 또는 羽陵)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우산국주(宇山國國)대 신 우릉성주로(于陵城主)로 바뀜. 이는 우릉도와 우산도(독도)로 구성된 우산국이 완전히 중앙정부의 직할아래 들어갔음을 의미함.

7. 1141년(고려 17대 인종 19년)

강원도인 명주도 감창사(溟州道 嵌倉使) 이양실이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 본토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과실과 나뭇잎을 채취하여 조정에 바쳤다.

8. 1157년 (고려 의종 11년)

명주도  전중내급사 김유림  파견 → 섬의 중앙 꼭대기 (지금의 성인봉)에서 동으로 1만여보, 서로 1만3천여보, 남으로 1만 5천여보, 북쪽으로 8천여보에 달하고, 마을 7군데 등 보고.

9. 1197년 (고려 명종 27년)

동쪽지역으로 이주시켜 농사짓게 했으나 풍파가 심하여 다시 서쪽으로 이주.

10. 1242년 (고려 고종 29년)

실력자 최이에 의하여→울릉도 이민 사업 실시 → 풍랑등으로 시민사업 실패거듭

조선시대 ~ 11. 1416년 (태종 16년)

울릉도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비워두는 - 공도 정책 발표.

12. 1417년 (태종 17년)

삼척사람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임명 → 울릉도 파견 → 15호 86가주민이 있음을 발견 → 3명만 안무사에게 설득되어 육지로 옮김→여기서 우릉도를 공도정책으로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한 이유중에 주목할 점은 "강원도에서 무릉도까지 풍랑 속의 머나먼 뱃길로 수장될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 무릉도에 와서 사람이 살게 된데 는 고려말 나라의 부패와 정권의 불안정으로 가혹한 세금과 부역을 피하여 이 곳으로 왔기 때문이란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13. 1425년 (세종 7년)

 태종 뒤를 이은 세종도 공도정책계승 → 김인우를 역시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파견.  여기서 "우산무릉등처"란 섬이 우산도와 무릉도등 2개가 있다는 표현이 분명함.

14. 1438년 (세종 20년)

1) 울진 사람의 남회와 조민을 무릉도순찰경차관으로 파견   2) 남녀 66명을 수색하여 본토 송환 → 본국 모배죄  3) 주모자 김안 → 교수형, 나머지는 노복으로 삼음.

15. 1441 (세종 23년)

만호 남호에게 울릉도 수색지시 → 70여명 송환 , 공도정책 계속 이후 → 울릉도 독도에는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았던지 육지와 몇년동안 소식이 두절됨 → 그 후 새 섬이 있다는 설이 나돔.

16. 요도/신도설

그리하여 공도가 된 후 사람들이 항해 중 울릉도(무릉도), 독도(우산도)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 생긴 섬이란 신도설, 요도설이 떠돌았다. 조정에서 신도/요도를 확인하려 했다. 그 확인 기록이 바로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려있다고 보면 된다.

17. 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울진 현조에 → 우산과 무릉의 두섬이 울진현 바다 한가운데 있는데 두섬의 거리가 멀지 않아 맑은 날에는 바라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18. 삼봉도

세종 뒤를 이은 성종 때도 해안주민들 사이에 강원도 경내에 속하는 동해 한 가운데에 삼봉도가 있다. 부역이나 세금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갔다.

19. 삼봉도 수색

조정에서 파견된 강차관 박종원이 삼봉도에 다녀왔다는 김환경과 함께 삼봉도 수색했으나 실패 → 삼봉도는 독도이다.

20. 성종실록

김자주의 삼봉도(독도) 묘사 기록 - 25일에 섬서쪽 7∼8리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북쪽에 세바위가 나란히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이 있고 다음은 암석이 나란히 섰으며 다음은 중도이고 중도 서쪽에도 작은 섬이 있는데 그 모두가 바닷물과 통한다. 바다와 섬사이는 인형 같은 것이 별도로 30여개가 서있는데 의심나고 두려워 그 섬에 접할 수가 없어 도형을 그려 돌아왔다.

 

21. 1531년 (중종 26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45권 울진현군에 →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은 울진현 정동에 있다. (우산도) 세봉우리가 하늘로 곧게 솟았으며 남쪽봉우리가 약간 낮다. 날씨가 맑으면(울릉도에서) 세봉우리가 위의 나무와 산밑의 모래톱이 역력히 보이고 바람이 잦아지면 이틀에 도착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독도에 관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은「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입증하는 확고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다. → 신라 지증왕 13년이래 → 세종실록 지리지 → 고려사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까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일관되게 나타내고 있음은 독도가 우리영토임을 분명히 한 것이 틀림없음.

22. 1693년 (숙종 19년)

1)대마도주가 동래부로 서계 보내옴 → 조선 어민의 죽도 출어금지 요청  2)조정에서 →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회신  3)영의정 남구만 → 형세조사차 삼척첨사를 울릉도에 파견

23. 1693년 (숙종 19년)

안용복, 박어둔 등 40여명의 조선어부는 울릉도, 독도에서 조업중인 일본 어선 발견 → 추방을 위한 격투 (독도 사수 - 안용복 장군편 참조)

1)일본의 도쿠카와 막부는 대마도주로 하여금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불법월경을 스스로 금지시키겠다는 서계를 보내었다.  2)일본 도쿠카와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 "두섬은 조선의 영토"라는 서계를 휘하의 관백과 태수에게 쓰게 했을 만큼 독도의 조선 영유권 존중.  3)조정은 울릉도 수토제도를 채택하고 3년에 한번씩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에 관원을 보내 순검케하여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주권은 변함없이 행사함.

24. 1697년 2월 (숙종25년)「신증동국여지승람권 45여지고

일본 막부 → 독도는 조선영토임을 공식인정

25. 1699년 (숙종 25년)

안용복 장군은 일본 에도 막부(정부)로부터 울릉도.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는 증서를 받음

26. 1900년 10월 25일 (고종 37년)

칙령 제 4호 울릉도는 울도로 개칭하고, 강원도는 울진현에 속해있던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묶어서 하나의 독립군으로 설치하면서 군청관할 구역을 울릉전도와 죽도 및 석도라고 못박았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섬목앞의 실제 죽도이고, 석도는 → 석 즉 돌 → 독도를 의미한다.

27. 1904년 8월 23일 (고종 41년)

조일 의정서에 의거 → 독도에 → 일본 해군 부대 설치

28. 1905년 5월 17일 (고종 49년)

일본 정부 → 독도를 죽도라 변칭하고 시네마현 토지대장에 기재하고 일방적으로 일본 영토에 합병 선언

29. 1905년 11월 17일 (고종 49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조선국권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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