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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에서

윤여관 |2006.04.26 14:30
조회 180 |추천 3
정육점에서    난 어렸을 때 정육점에 심부름 가기가 무서웠고 싫었다. 거기에 가면 동물들의 생생한 시체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내 딸과 함께 대형 가게에 가면 내 딸은 정육코너에서 입맛을 다신다. 자연의 흔적을 없애면 없앨수록 부가가치는 높아지고 상품성이 생기는가 보다.
백화점에 가면 ‘미’만 있다. 거기에 ‘추’는 없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자본은 미와 추를 구분해야 살 수 있다. 노동과 생산의 흔적을 없앤 채 뽀얗게 분을 바른 상품만이 살아남는 것이 경쟁력 이란다. 구매력은 미가 되고 노동은 추가 된다. 백화점에 진열된 것은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나 보다. 160센치 이상 50키로 미만의 용모 단정한 여성?  

학교는 예외일까? 자본시장에서 잘 팔릴 수 있는 인간을 찍어 내기위한 공장으로 비유하면 지나칠까?


슬프게도 우리 사회에서 이 자본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없어 보인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이렇게 자본으로 획일화된 사회에서 가장 큰 침투력을 갖고 있다고 보는데.

 

학교에는 양아치라는 애들이 있다. 백화점으로 치면 불량품?

 

자본시장에서, 기성의 가치관시장에서 잘 안팔릴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딴지를 걸어대는 그들에게서 난 묘한 희망을 본다. 미에는 순정미, 우아미, 교미, 고귀미, 존엄미, 위엄미, 숭고미, 비장미, 골계미, 추미 등등 참 많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왠지 미도 획일화 되어 있다. 순정미나 우아미 허위의 존엄미만 판을 치고 삶의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 나 도 삶을 진지하게 접근하기 어렵게 한다. 재미는 있나?


반면 김기덕의 을 보면 기분이 드럽다. 을 봐도 찝찝하다. 거기에는 우리가 살면서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부분들이 나온다. 분명히 우리 삶을 규정짓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에서 그것들을 외면하려 한다. 왜냐면 그곳에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류가 주는 완쾌나 통쾌가 아니라 불쾌감을 수반하며 성찰과 각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통속적인 미적 기준은 '단정' 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패션은 내용적으로 변한 게 없다. 졸업식 때, 입사 면접 볼 때, 선 볼 때 등등 입고 나가는 옷들을 보면 거의 비슷하다. 원빈이나 정우성, 고소영류의 자본 스타가 개체분열 했다. 과거 신성일 이나 남궁원의 스타일이 먹혀들어 갔듯이.


단정이라는 잣대로 패션을 재단질 하기 시작하면 삐에르가르뎅이나 파올로구찌나 크리스챤디오르 등등의 명품류?부터 시장패션까지의 위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왜냐면 적자와 서자 그리고 족보 외 그룹이라는 혈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점령군의 군복을 찢어 입고 군모포로 외투를 만들고, 그리고 삼팔선 철조망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패션은 어떻게 비쳐질까?


우리는 그런 패션에 거부감을 갖도록 자본과 권력, 그리고 그 시녀뻘 되는 윤리와 도덕으로부터 쇠뇌 당한 것은 아닐까?

 

교사는 학생의 모범이 되기위해서라도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히 입고 다녀야 한다고? 하하하하...

 

2003.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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