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학년초에 새롭게 만난 학생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것과 가장 싫어하는 것을 물어 본 적이 있답니다. 아주 많은 학생들이 이 세상에서 아예 사라졌으면 좋겠는 것이 학교라고 대답했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니는 시기를 아름다운 학창시절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가 학교를 벗어났기 때문이거나 더 이상 학생이 아니어도 되기 때문은 아닐까요. 누가 다시 학교를 다니고 싶을까요. 학교 이외의 다른 길은 몰랐던 시절에도 그랬는데 더군다나 요즘 학생들의 환경은 우리 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나는 그들을 사각의 정글에 유배된 전자유목민이라고 칭하고 싶습니다. 기성의 권위-격변기의 전투를 통해 얻은 훈장 같은-가 깨질까봐 아주 튼튼히 쌓은 벽에 가둬놓은 유목민 말입니다. 쌍방향 통신의 날개가 생기면서 벽은 유물로 체감되지만 기성의 벽쌓기 관성은 하늘까지 닿으려 합니다. ‘정보화사회와 학생문화의 이해’라는 다분히 도식적인 제목의 글을 씀에 앞서 나는 우리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걱정하고 사랑하는 최선의 실천 방법은 ‘Let it be’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출구 없이 쌓고있는 성은 해체하지 않는 한 그대로 돌무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만의 돌무지를 하나 하나 해체하고자 글을 시작합니다.
성범죄의 습지
출산보다 낙태가 많은 나라, 그러나 그것을 위한 예방활동이 순결교육수준인 나라, 10대의 성에 대한 얘기조차도 금기시 하는 나라, 아직도 여자의 성을 정조로 억압하는 나라, 강간피해자를 가정파탄으로 두 번 죽이는 나라, 성폭행 신고율이 가장 낮은 나라, 그런데도 공식집계 성폭행 세계 최고인 나라, 경제활동 가능연령 여성의 1/6이 매춘 관련 직업에 종사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올 수 있는 나라. 심지어 자신을 폭행한 사람과 결혼할 수밖에 없는 경우까지도 있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을 있을 수 있게 하는 모든 원인이 교육의 부재로부터 시작한다면 억지일까요? 인간교육을 외치면서 인간생명의 근원인 성을 소외시킨다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요. 성교육을 빙자한 성 억압만이 성교육의 전부였고 결국 성이 인권과 생명도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보수적 기독교 단체들은 지금도 순결서약식을 하고 다닙니다. 미망인이란 단어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열녀문은 인권유린의 교육장이 아니라 아직도 가문의 영광입니다. 성표현에 관한 한 편집광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검찰의 태도는 여기가 이슬람국가인줄로 착각하고 있는 듯할 정도의 인상입니다.(마광수, 이현세, 김인규) 거기에 성을 교육해본 적이 없는 학교는 성을 숨기는 데만 익숙합니다. 교육부나 검찰이 갖고있는 공식적 성범죄 통계는 자신들도 믿지 못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인은 이중성입니다. 역사적으로 권력은 항상 성을 통제해 왔다지만 이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수준입니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성범죄와 성왜곡의 원인이 아닐까요. 성이라는 단어, 성기, 성행위 자체가 범죄를 의미해버리는 이상한 관념을 생산한 주체는 다름 아닌 성에 대한 무지입니다. 학생에게 의무만 주고 권리는 감추면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지킬 의무와 누릴 권리가 조화된 인간을 기르기 위해선 실질적이고 활발한 토론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에 관한 다양한 표현들을 접하고 자신에게 맞는 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고 학습하는 태도가 실질적인 성교육의 방법일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원천봉쇄하고 있는 성표현물에 대한 규제부터 풀어야할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교재로 적극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절로 아는 것, 부끄러운 것, 이상한 것으로 묻으면 묻을수록 이중성의 굴레는 두터워집니다. 우리는 이 모순의 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학교에서의 성교육은 개인적 차원 이하입니다. 생물학적으로 成人(性人)이란 생식능력이 생기는 순간 이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회적 역할에 대한 준비 과정을 고려하여 인위적으로 그 후를 성인으로 인정하게 되는데 그 때까지는 본능도 인정하지 못 하겠다고 해서 이 불인정이 인정될 수 있을까요. 지리적으로 한정된 지역에서 소수의 사람들과 운명적으로 살아야하는 사회에서 만들어진 윤리로 다양한 사람을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곳에서 선택적으로 만날 수 있는 사회를 조율한다는 것은 헌 부대에 새 술을 담으려는 미련한 발상일 것입니다. 살아 꿈틀대는 복잡 다양한 성의 실체를 부정하고 개인의 잣대로 전체의 성을 섣불리 평가하거나 통제하려는 행위는 무례한 억압입니다. 인류 역사 전체와 현대 사회 전부를 헤집어 봐도 성범죄를 완전히 박멸한 사회는 없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최선책은 최소화를 위한 노력일텐데 우리사회의 성범죄율이 높은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만을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가 세계 최고의 낙태와 강간이 발생하는 비인간적인 국가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서라도 어린 시절부터 피임중심의 성교육과 함께 성문화를 왜곡시키고 있는 법부터 바로 잡아야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뇌 구조를 완전히 바꿀 수 없다면 자유의지에 의한 섹스와 섹스의사의 표현(거부포함)이 자유로울 때 강간이 줄어들고 강간피해 신고율이 올라가는 성 인권국가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의 자유를 인권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문란이라는 코드로만 접수하려는 관념으로는 성범죄와 낙태는 줄어들 수 없습니다. 더 정확히 지적한다면 보수적 성윤리를 부추기거나 강조하는 개인과 집단은 그 본 의도는 그렇지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성범죄의 습지를 제공하는 배후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부메랑
이 시대 우리 교육의 화두는 다양성입니다. 이혼이 늘어나고 가정해체가 가속화되고 결혼제도 자체가 전환기에 서있는 이때 자기 방어적?고전적 가정개념을 강조하는 것은 이기주의에 기초한 안이한 현실인식일 것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와 숙제가운데 이혼?별거?미혼(비혼)모의 아이들 혹은 고아들에게 치명적 상처를 주는 내용이 너무 많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킬 목적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비교육적 행태입니다. 결국 이들은 우리 손을 떠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반사회적 힘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개방사회의 속성 아니던가요.
일반대중의 의식변화야 요원하다고 해도 공식적 교육이념은 시대를 선도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합리적 인식의 결여로 인해 교육정의가 이기적인 힘에 끌려 다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국가가 유아교육을 평등?평화정신을 가지고 책임져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초등교육의 내용에서 부모의 인종, 국적, 지위, 신분, 경제수준 등과 더불어 가정형태와 관련된 어떠한 불평등적 요소도 제거하는 평화로운 구성이 시급합니다.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
인생의 첫번째 낙오자들이 모이는 자타가 인정하는 수용시설 실업계고. 공식적 설문조사에서 대학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비율이 90%를 넘는 실업계고의 현실은 우리사회의 학벌주의와 교육왜곡의 거울입니다. 스스로 실패했다고 느끼는 사람이 사회와 자신의 인생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은 어떤 것일까요. 과연 이들이 공정한 경쟁에서 패했다고 인정할까요. 더 다양할 필요성과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에 오로지 하나의 잣대밖에는 없는 기성세대를 향해 분노하고 원망하지만 결국 좌절하고 냉소합니다. 아직 기성사회의 기존직업에 관한 貴賤觀이 현실로서 인식되기 전인 초등학교, 개인의 관심에 상대적으로 몰두하는 이 단계에서 학생 개인의 다양한 적성을 검사하고 확인하는 기회가 제공되는 독일의 교육시스템은 눈 여겨 봐야할 것입니다. 인적자원의 적절한 배치는 개인에게는 행복한 일생을 사회에는 건강한 경쟁력을 확보하게 해 줄 것입니다. 무엇을 잘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결코 능가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한다는 상대적인 개념은 즐긴다는 초월적인 개념과 이미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줄 세우기 경쟁이 아니라 좋아하는 길을 열어주어 마침내 즐길 수 있도록 해야 고입, 취업, 대입, 승진, 연구, 사업, 창작 등 삶의 전분야와 과정에서 횡행하는 부조리한 소모적 경쟁의 고리를 끊을 수 있지 않을까요. 자기 주도적으로 이루어지는 동아리활동, 클럽활동, 학생회활동, 취미생활 등이 중요하게 평가될 수 있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교과선택도 같은 맥락에서 반드시 학생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육이 아직도 ‘바람직한 변화’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더욱 더 유연하고 개방적인 틀이 아니고서는 그 성과를 기대 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모더니즘의 설사 - 학교건물
이 땅 대부분의 학교 건물은 7~80년대에 지어진 모더니즘의 똥 같은 건물입니다. 그나마 그것마저도 제대로 소화 못시킨 설사 같은 건물입니다. 모더니즘 건축은 그 기능성에 생명이 있지만 우리는 그 획일성만을 채용했습니다. 오히려 아주 오래 전에 지어진 건물들과 최근 지어지는 건물들 중엔 교육을 이해하는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건축물로서도 이미 충분히 교육적인 것들도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은 설계, 시공, 감리 까지 철저하게 돈에 팔린 건물들입니다. 수용을 목적으로 하는 교도소의 형태는 ‘하모니카’식이거나 ‘一’字식인데 우리의 학교 건물은 거의 이 형태를 고수합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쉬고 얘기하고 표현하고 즐길만한 공간을 찾을 수 없습니다. 교실 아니면 운동장 그리고 이 둘 사이를 오가는 통로가 전부입니다. 1000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과 100명, 50명, 10명, 5명, 혹은 혼자 모이거나 있을 수 있는 공간은 구조자체가 각각의 인원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자연스런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100명이 모일 공간에 5명이 있으면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의경우도 결과는 비슷하겠죠. 계단식, ‘ㄱ’字식, ‘ㄷ’字식 혹은 다양하게 변형된 형태의 건물들의 꺾인 부분은 그 규모와 분위기에 맞춰 자연스럽게 다기능의 공간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으로서 다양하게 펼쳐야 할 공연, 시합, 토론, 사색 등의 활동들이 자연 통제되고 원천 봉쇄됩니다. 학생을 통제 수용할 목적이 아니라 맘껏 누리게 할 수 있는 건축물, 건축자체가 그대로 살아있는 교육이어서 두고두고 아름다워지는 철학이 담긴 건축이 그립습니다 .
피난민
두말할 필요도 없이 대학입시경쟁은 교육의 전과정을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황폐화시켰고 이제는 스스로 관성과 탄력을 갖춘 생명체가 된 듯 합니다. 원칙에서 벗어나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쉽게 하고 모든 죄는 대입이 뒤집어씁니다. 모든 죄가 대입이라는 말은 대입을 위한 모든 짓이 면죄부라는 얘기와 동일합니다. 자기의 미래, 심지어 인류의 미래와도 별 상관없거나 중요도와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수업내용에 열중해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이 점수화하여 자신의 미래를 결정지어버리는 시스템, 그리고 자신이 줄 세우기의 들러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다수의 딴지, 일탈, 공격 그리고 이것을 해결해 보겠다고 미봉책으로 밀어부치는 인성교육프로그램은 우리교육의 현주소입니다. -모 교육감은 '애들을 딴 짓 못하게 잡아라. 죽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잡아라, 내가 책임진다. 공부에만 매달리게 해서 딴 짓 못하게 하면 그게 인성교육이다. 성적 좋은 애들은 인성도 좋다'. 또 동창회에 참석해서는 '밤12시에 전화해도 교장이 받고 2시에 전화해도 교감이 받는다'며 학력신장교육과 인성교육의 노고를 치하했답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 교육대학의 교수였답니다.- 이런 사회의 악순환은 모두 교실에서 시작됩니다. 이런 정도면 생명체라고 부를 만할 것입니다. 건강한 씨를 죽이는 反생명체입니다. 이제 학생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들만의 은닉된 공간에서 해방구를 꿈꿉니다. 생존의 법칙을 깨달은 것이지요. 이 나라 청소년들의 정보화 수준이 세계최고수준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실상 이는 개척의 정신으로서가 아니라 도피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엔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고기를 잡기 위해 정보의 바다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짜증나는 전쟁 같은 현실을 피하고자 정보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수준입니다.
다른 길과 틀린 길
2001. 6. 13 EBS 교육문화뉴스에는 대학생들이 기초질서를 안 지킨다는 내용의 보도가 있었습니다. 내용인 즉 인도를 놔두고 잔디밭으로 다니고 철사휀스를 끊고 길을 낸다는 것과 담배꽁초를 아무 곳에나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짧게 나온 담배얘기는 다음 기회로 넘기고) 지뢰를 묻어 논 것도 아닌데 가까운 길을 두고 돌아가라는 것이 정당성이 있는지 답답한 느낌이 들더군요. 보행의 모든 가능성과 정원과의 환경?기능적 관계를 검토하여 길과 길이 아닌 것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도록 자연스런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조경조형의 원리이고 전문가의 몫일텐데 실패한 설계를 정당화하고 수정을 요구하는 발걸음을 범법자로 모는 태도는 결정론적 시각만 강조해서 변화를 두려워하게 하거나 심지어 변화를 거부하는 심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같은 논리로 정보화사회라는 미래의 요구까지는 예상할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다수의 학생들이 왜 수업시간에 조는 길을 택하는지, 왜 신체적 표현에 매달리는 길을 걷는지, 현실을 조금씩 포기하는 길에 서는지는 알려고 노력해야 할텐데 우리의 학교는 이미 오래 전에 시효 소멸된 옛길만을 고집하고 다른 길은 틀린 길(탈선)로 보는 것 같습니다. 앞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육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요.
長幼有序, 長幼差別, 長幼差異
이때의 장과 유는 질적 시간을 다루지 못하고 양적 시간만을 단순 비교한 1차원적 수준의 우습지만 무서운 권위입니다. 그리고 산업사회에서 설익은 질의 권위와 혼합되어 마치 성역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정보화사회에선 깨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키치 문화와 B급 문화는 그 전주곡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깨질까요? ‘나이 어린 나는 연세 높은 당신의 영역과 권위에 저항하거나 침범할 의사가 전혀 없다’, ‘나는 우리사회가 만든 장유유서의 권위를 철저히 인정, 수행하겠다’라는 암묵적 서약이 표현되는 행위에 ‘예의 바르다. 사람 됐다. 겸손한 아이다’라는 평가가 내려지는 구조화된 관념, 더구나 애매한 기준으로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평가할 때(실제 생활기록부에 쓰여지는 문장들을 살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평가 대상자는 이런 관념 앞에 당당할 수 없지 않을까요. 학생 인권을 들먹이거나, 민주학생회를 주장하거나, 또는 편법?불법적 학사운영 내지 억압에 대한 저항을 할 때, 가장 먼저 고려?감수해야할 것은 대화내용의 합리성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고얀 놈’, '어른 앞에서…', '나이도 어린것이', '싸가지 없는 놈' 등의 거대한 성역입니다. 불의에 대항하는 시민의식이 자신을 인격적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매장하는 요인이 되는 문화 속에서 저항의식은 질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들은 현실적 평가권을 갖고있는 교사들에게 싸가지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기 위해 혹자는 다소곳한 순한 양처럼, 혹자는 이중성을 감추고, 혹자는 마지못해 권위를 인정하게 되며(혹자는 뛰쳐나가기도 하지만) 갈등은 봉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후배들에게 교사와 선배로부터 전수 받은 대로 되풀이합니다. 이러한 틀로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장과 유는 차이일 뿐 차별이어선 곤란한 시대가 오고 있는데 어설픈 권위와 관념으로 스스로를 차별시하여 평등을 향해 흐르는 세상의 질서를 타지 못한다면 고립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상대에 대한 관용과 이해와 존경이 전제되지 않는 관계는 무례입니다. 대상이 학생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일방적 예를 강요하는 틀은 인권에 대한 억압 혹은 유린입니다.
군사부일체의 동생, 사제동행
현재 중?고등학교에서 담임의 역할이란 궁극적으로 학생을 통제하는 것에 있습니다. 심지어 담임을 부모와 동일시하는데 주저하지 않으며 위탁받았다고 착각하는 권한을 자연스럽게 휘두릅니다. 스승의 날이면 아직도 군사부일체는 단골 메뉴입니다. 이 나라 단 한 명의 담임도 ‘학생 통솔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하느냐’ 는 관념 앞에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사회에서 만들어 표준화시킨 담임상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적 보편적 시각이 없이 장기간 폐쇄된 집단의 관성이 표준화시킨 이러한 담임상의 범위 내에서 담임들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혹자는 정으로(실제로 감동적일 때가 있습니다), 혹자는 완력으로, 혹자는 군대에서 터득한 생존 비결로, 혹자는 상급자(이들은 실제로 계급을 의식한다)의 시각을 의식해서 그리고 혹자는 무표정하게 찍어누릅니다. 자유와 평등?인권?민주적 절차는 교과서에만 있고 사전에만 있는 단어 일뿐 체험할 수 없으며 과거 정권에서 남북 대치상황을 민주억압과 정권수호에 이용했던 방법과 똑같이 입시준비의 효율성을 빌미로 장유유서의 상명하복만 실재합니다. 물론 이것은 한번도 민주주의를 실천해보지 못한 교사집단의 절대적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장유유서와 입시가 절묘한 수준에서 결합하여 학교는 철저하게 반민주시민을 찍어내는 공장으로 변했습니다. 고립된 집단의 존속을 위한 화합은 다른 집단과의 분열을 뜻하고 전체의 평화를 깨는 병원균입니다. 고립을 향한 화합의 강도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분열의 골도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냉전시대의 남과 북, 지역감정, 집단?계층?직업 이기주의 등) 개방만이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는데 학교는 마치 따로국밥처럼 학생의 실체를 배제한 채 교사집단끼리의 화합만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개방을 두려워하는 본능적 보호행위이겠으나 무엇을 보호하겠다는 것일까요. 혹시 군사부일체 같은 허망한 관념은 아닐까요? 결국 더 깊은 골을 파는 행위입니다. 바다 같은 개방성이 필요한 때인데 가뭄 끝에 작대기 두어 개로 편을 나눈 논물을 보는 심정입니다. 학생의 실체를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는 선 개방, 후 화합의 정신만이 더 큰 세상과의 평화를 담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교육은 間(情과 和)이 人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통제하다 보니 세계무대에 내놓을만한 보편적이고 당당한 인간을 키워낸다고 주장하기에 민망한 수준이 되었다고 봅니다. 너무 붙어있으면 개체의 독립성이 훼손되는 것 아니던가요? 담임을 없애고 대학 행정시스템을 도입한다면 학생을 좀더 성숙 가능태로 인정하는 제도적 장치는 마련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학교생활이 대학처럼 일정한 교실 없이 이동수업 위주로 이루어진다면 자연스레 이완되는 시?공간의 틈 속에서 학생들의 자율은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이 교사를 필요에 의해 찾을 수 있게 하는 시스템과 미래지향적 인성교육 프로그램이 조화될 수 있는 방향으로 학생과 교사의 관계가 재정립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불행하게도 사제동행은 군사부일체의 동생이 되었습니다. 학생이 자발적으로 따를 수 있어야 진정한 교사의 권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교육인가, 사육인가
성적 좋은 학생을 돈으로 매수해서 모셔오는 입학전쟁에서 시작해서 연간법정수업일수가 무색한 방학과 법정수업시수를 비웃는 보충수업과 심지어 사설학원도 아닌데 몇몇 대도시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의 인문계 고등학교에는 불평등, 불법, 부조리하게 운영되는 기숙사가 있습니다. 성적순으로 끊어서 합숙하면서 보충수업을 밥먹듯이 하는 이 곳은 거의 치외법권지역입니다. 왜냐면 명문고 부상을 꿈꾸는 승진지향의 교사와 명문대 진학을 기원하는 부모들이 만들고 각 시?도교육감이 후원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8시까지 등교하고 11시에 하교하는 것을 교육부가 공인한다면 통학이 어려운 원거리 통학생이 기숙사에 입사할 수 있어야 평등정신에 부합할 것입니다. 또한 기숙사 바로 옆에 사는 학교마다 수백 명의 자취?하숙생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되어야 합니다.(여고 근무 5년 간 10건이 넘는 강간 사건은 모두 자취방 밀집지역에서 발생했고 유학은 부모와의 대화 단절, 무절제한 생활로 이어질 확률이 통학보다 높다고 판단됨) 그런데 교육부는 9시부터 5시까지만 공인하고 나머지는 학교장 자율이라고 떠넘기고 불평등?부조리?불법을 묵인한다면 이 나라가 법이 있는 나라인지, 만약 법이 있다면 집행을 안 한다는 얘긴데 얼마나 더 망가져야 바로잡을 수 있는지 답답합니다. 학교는 일류대를 향해 전력 투구하고 있습니다. 논다는 것도 공부에서 생긴 스트레스 해소차원을 넘길 수 없습니다. 빨리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놀기 위해 공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초등학생은 숙제 빨리 끝내고 놀기, 중?고등학생은 대학가서 폼 나게 놀기 위해 참고 공부하기, 대학생은 ‘사’字 들어가는 자리를 얻어 편하게 먹고살기 위해 고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공부 아니면 놀기가 전부인 학생과 먹기 아니면 자기가 전부인 돼지는 점수 올리기와 근수 늘리기 위한 존재라는 점에서 동격입니다. 인간을 사육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면서 창의성교육 운운하는 것은 기만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한 다양한 경험과 여유로운 시간과 충분한 사색의 기회가 없는 선택은 개인과 사회가 온갖 악순환의 소굴로 향하는 티켓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을 살리는 길은 학생수준에서 체감할 수 있는 다양한 특기?적성 계발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 방향성의 유?무가 우리교육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공교육은 공권력의 강제성의 도움으로부터 홀로 서서 매력으로 자생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굴종의 삶을 떨쳐…
대학에서 졸업식과 입학식을 제외한 모든 행사가 학생의 일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학생 스스로가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는 주체의식 때문입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이러한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학생회의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 핵심은 자유?평등의 이념에 기초하고 민주적 절차를 준수한 학생회의 조직에서부터 학생자율규정 제?개정, 학생인권 탄압에 대한 저항, 편법적 학사운영에 대한 거부권, 음성적 행?재정 운영에 대한 수정 요구, 교과선택?담임선택에 대한 의사표현 등의 길이 열려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전국단위 학생 연합 등을 장려해야만 지역 간 문화갈등도 해소할 수 있습니다. 현 학생회의 조직은 세 가지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학생장, 대의원장, 사법위원장으로 나뉘어지는 삼권분립에 의거해 선출되는 경우, 둘째, 학생장과 대의원장만 뽑는 경우, 셋째, 둘을 합쳐 학생회장으로 뽑는 경우, 이에 맞추어 각 반의 학급회에도 반장, 회장이 따로 있는 경우와 반장?회장을 겸하는 경우 심지어 반장이 대의원까지 겸하는 경우인데 교육부에서 나오는 어떠한 자료에도 이 비율에 대한 통계는 없습니다.- 모의고사 통계 같은 것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지는데- 또한 학생 자치활동에 대한 조사 역시 장부상으로만 이루어질 뿐 현장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학교장의 고유 권한 내지 자율에 맡긴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교육감의 의식조차 앞에서 말한 정도의 수준에 있는 현실에서 과연 학교장의 자율에 맡길 수 있는 것인지, 교육부의 직무유기는 없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이 현재 교육부 학생정책의 현실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학교운영이 교장으로 대표되는 권력의 일방적 지시에 의해 이루어지다 보니 그 수준 이상의 모색은 이루어지지 않는 악순환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회가 활성화되고 이에 맞추어 학생문화가 자기주도적 역량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민주시민 교육의 첫 단추입니다. 이는 교육정상화의 길이며 더불어 대학문화도 기대치에 근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억압과 유예로 보낸 시간에 대한 폭발로써의 방황의 색채가 강한 것이 현재 대학문화의 수준 아닌가 합니다. 대학가 주변의 유흥업소의 질과 양을 우리사회의 전체의 유흥문화로 나누었을 때 그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단순 계산만으로도 시골과 중소도시의 돈이 대도시, 특히 수도권으로 흘러가는 아주 큰 통로 중 하나가 대학가 주변일 것입니다. 이는 경제 왜곡과 인구집중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문화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현실적 힘을 가진 기성세대가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더구나 집단적 감정으로 학생을 억압할 때-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머리스타일, 의상 등의 신체적 표현을 억압하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설득할 수 없는 감성적 거부의 한 예- 학생들이 이성적으로 대응하길 기대한다는 것이 논리에 맞을까요. 문화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현실적 힘이 없는 학생들은 반항의 감정을 결국 문화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문화적 공감대가 그리운 시점에서 괴리감만 깊어 가는데 이것을 옥죄고 또 누르면 이들이 과연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다음 순서는 갈등, 괴리, 단절 그리고 분열, 절망으로 이어진다는 역사적 교훈을 우리사회는 재연하려는 것 같습니다. 현대와 더 나아가 미래는 민주시민사회, 더욱 진보된 평등사회를 지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나라 어느 학교를 가도 ‘민주시민육성’이라는 교육목표를 갖고 있지만 이것은 사문화된 슬로건에 불과 합니다. 민주시민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학교가 몇이나 될지 의문입니다. 기껏해야 기초질서 운운하는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그 기초질서라는 것도 학교내 구성원사이에 자유, 평등, 사랑의 원리 하에 민주적 절차를 거쳐 합의된 게 아닌 힘있는 자의 일방적 강요일 때, 이것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라는 것은 민주시민이라면 굴욕입니다. 지금 우리의 학교는 이 땅의 미래들에게 생존의 수단으로 굴종을 가르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봐야합니다. 학생들의 눈과 귀와 입을 막고 어떻게 민주시민교육을 하겠다는 것 인지요.
한 시대의 방향성은 후발국과 선진국이 동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방향으로 진행하는 탄력성과 신속성, 즉 속도로 들어가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우리사회의 방향성은 확실해 보입니다. 문제는 탄력성과 신속성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지적한 우리교육의 근본적 문제인 민주시민교육의 실종과 작위적 교육관행, 현실 고착적 교육내용 등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속도에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신?구가 이렇게 근본적으로 괴리되고 표피적으로만 순종하는 척하는 이중성으로는 세계의 흐름에서 지속적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신세대의 패기와 신선함과 기성세대의 노련함과 관용이 조화될 때 속도가 나올 수 있습니다.
지식기반사회의 문화적 형태는 전자유목민으로 나타날 것 같습니다. 이는 싫으나 좋으나, 죽으나 사나 정착을 숙명으로 여기던 농경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이렇게 억압되고 왜곡되고 모든 것을 유예 당하는 이 땅의 예비 유목민들은 다른 오아시스를 찾아 쉽게 떠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이 땅은 모두가 떠나고 다시 찾지 않는 사막이 될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으로 글을 마칩니다.
200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