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호(33ㆍ샌디에이고 파드레스)가 시속 158km의 무서운 강속구를 뿌려대며 메이저리그에 강한 인상을 남기던 1997년쯤으로 기억됩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원정 경기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보비 콕스 감독을 텅 빈 덕아웃에서 마주쳤습니다. LA 다저스의 박찬호라는 젊은 투수에 대해 평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콕스 감독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친구 공 끝이 ‘원 푸트(1 foot)’는 움직이는 무시무시한 구질을 지녔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정말 탐나는 선수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속으로 ‘공이 30cm가 움직인다고? 이 영감님 허풍이 좀 심하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콕스 감독이 상당히 유머감각이 있는 재미있는 인물인줄 알았습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언제 봤냐는 듯, 정말 무뚝뚝했지만 말입니다.
6일 시카고 커브스를 홈으로 불러들여 ‘9이닝 완봉의 명품’을 만들어낸 박찬호의 피칭을 보면서 보비 콕스 감독의 말이 떠올라 그가 예언자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실제로 이날 투심 패스트볼의 움직임은 스트라이크존의 왼쪽 끝으로 날아가기 시작해서 오른쪽 끝에서 포수의 미트에 들어가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때론 정말로 30cm쯤은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 커브스 타자들이 타격 슬럼프라고는 하지만 경기 중반까지 박찬호의 공을 하나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습니다. 5회초 2사후에 가서야 자크 존스가 첫 안타를 만들어 냈습니다.
1회초 1번 피에르를 볼넷으로 내보낸 이후 13명의 타자를 연속 범타로 처리한 것도 인상적이지만, 그 내용은 정말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존스의 안타가 나오기 전까지 커브스 타자들의 친 공은 단 한개도 내야를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1회초 2번 바이럼의 2루 땅볼 병살타를 시작으로 13타자 중에 세 명이 삼진을 당했고, 8명은 모두 내야 땅볼로 물러났습니다. 딱 두 명이 플라이볼을 쳤는데, 하나는 포수 파울 플라이, 다른 하나는 2루수 플라이였습니다.
무섭게 꿈틀거리는 박찬호의 공에 4.2이닝 동안 단 한명의 타자도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흔히 투수 공 끝의 예리한 움직임이 화제가 되는데, 오늘 박찬호의 공 끝은 정말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커브스 타자들을 파고들었습니다.
존스의 안타 후에도 7타자를 연속 범타로 처리하며 순항하던 박찬호는 8회초에 이날 유일하지만 최대 위기를 맞았습니다. 선두 타자 5번 바렛에게 중전 안타를 맞은 박찬호는 연속 투아웃을 잡았지만 주자는 3루까지 진출했습니다. 0-0의 팽팽한 승부는 1,2점차의 승부가 불을 보듯 뻔했고, 보치 감독은 콜로라도 시절 박찬호를 무던히도 괴롭히던 네이피 페레스를 고의 볼넷으로 거르고 9번 투수 자리와의 대결을 택했습니다.
더스티
베이커 커브스 감독도 승부수를 띄울 수밖에 없는 상황. 무실점으로 호투하던 잠브라노를 빼고 대타 존 메이브리를 투입했습니다. 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좌타자 메이브리와 신중한 대결을 펼친 박찬호는 다시 볼넷으로 만루. 그러나 1번 타자 피에르를 강속구로 2루 땅볼 처리, 0의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투심 패스트볼의 무서운 움직임과 함께 박찬호는 이날 152km 강속구를 9회초까지 던졌습니다. 올 시즌 들어 간간히 보여주던 치솟아 오르는 라이징 패스트볼은 이날 4개의 삼진 중에 3개를 잡아내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9회까지 121개의 공을 던지면서도 구위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또 한 가지 팬들을 기쁘게 만드는 소식입니다. 9이닝을 거뜬히 소화하는 스태미너와 안정된 투구 발란스, 빠른 템포로 자신 있게 진행하는 경기 운영.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과 몸짓에서 나타나는 자신감....
박찬호는 분명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습니다. 5년전 시속 155km가 넘는 강속구를 앞세워 삼진 10개 이상을 잡아내며 완봉승을 거두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에 뒤지지 않는 효율적이고 인상적인 피칭을 하는 노련한 투수로의 변신이 거의 완성 단계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꾸준히 이런 모습을 유지하기만 하면 ‘명품의 재완성’ 도장을 꽝 찍어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투수가 9이닝을 2안타 완봉으로 틀어막고도 승리 투수가 되지 못했다면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러나 이날 커브스 선발 카를로스 잠브라노도 시즌 초반의 부진을 씻고 정말 잘 던지더군요. 물론 파드레스 타선은 카메론, 그린, 바필드, 바드 등 곳곳에 구멍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잠브라노 정도의 구위라면 레인저스나 양키스 타선이라도 쉽게 공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날 11회 연장 끝에 파드레스가 승리했다는 것은 의미가 큽니다. 바로 박찬호가 지난번 등판했던 1일 LA 다저스전에서 파드레스는 0-5로 뒤지던 경기를 9회말에 동점을 만들고 연장전 끝에 승리했습니다.
그 승리 이후 파드레스는 어제까지 5연승 가도를 달리며 꼴찌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박찬호의 역투를 바탕으로 다시 연장전 끝에 승리하며 6연승으로 서부조 공동 3위까지 올랐습니다.
코칭스태프는 물론 이제 박찬호와 동료들과 사이에도 상호 신뢰가 충분히 자라고 있습니다. 박찬호를 비롯한 투수진이 살아나고 있기 때문에, 전년도 조 챔피언인 파드레스의 타워스 단장이 타격 보강을 위한 조치를 고심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리 보존이 위태로워 보이던 보치 감독도 한숨 돌리고 여유 있게 팀을 운영할 숨통이 트였습니다.
피비-박찬호-크리스 영-헨슬리-윌리암스로 이어지는 파드레스 선발 로테이션이 어느새 참 믿음직해 보입니다.
네이버 뉴스에서
믿었었다...
그대가 언젠가
다시 비상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