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린하루는 또 오후부터 시작된다. 한 주의 한 가운데 하루의 여유가 있다는 것 만으로 조금은 멀쩡하게, 벼르고 벼른, 해야 할일들을 하나하나 정리 하면서 한숨 한번 깊게 내쉰다. 여기저기 전화로 신청해 놓고서는 오후 3시가 되어서 은행 갈 채비를 서두른다. 주차권이 손이 안닿아 문을 열고 내려 주차권을 뽑는다. 은행순서 기다리기. 해지하기 다른은행 통장정리 내심 뭔가 새롭고 싶다 착해지고 싶다 5만원짜리 적금하나를 든다. 행원은 무심한 말투로 가난한 고객에 자신을 투영한다. 혼자만의 비밀로 걸어나오는 내내 킥킥댄다. 아무도 몰래 만기 때 뭘할까 온갖 상상을 하면서 마음은 어느새 그 누구보다 부자가 된다. 통장해지 하면서 잔액이 생각보다 많다. 쇼핑몰을 지나면서 흘끔거리다 '아차' 좌회전을 놓쳤다 더 가서 유턴하는곳을 찾는다. 똑같은 길들. 낮익은 동네 가고자 하는 길을 조금만 벗어나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알약을 먹었을 때처럼 설레인다. 아파트 정문 수퍼 화장기 없이 눌린 머리로 저녁을 서두르는 여인네들이 작은 검은 봉투 하나하나에 사랑을 사간다. 작은 봉투에 3800원의 작은 닭을 하나 담는다. 집에 가서 닭도리탕을 해야지 감자를 큼직큼직 썰어 넣어야지.. 욱이가 비시시 웃겠지.. 열쇠로 열고 현관을 들어서자 마자 작은 사랑을 무심히 냉장고에 넣는다. 금새 잊어버리고 파란 화분들을 욕실 바닥에 어지러히 늘어 놓고서는 내내 분무기를 뿌린다. 초록은 욕실의 노란 불빛에 반짝거린다. 한참을 멍하니 분무질을 하다가는 작은 사랑을 떠올린다. 아 욱이가 비시시 웃겠지... 감자를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어야지 '봄소풍 보물찾기'를 숨기는 사람처럼 적금 만기를 떠 올리며 달뜬다. 3800원의 사랑은 발갖게 양념이 베어 들고 있다 큼직한 감자 부터 먹어야지 욱이가 비시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