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마 의 [司馬懿, 179~251]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권신, 서진(西晉)왕조의 시조.
별칭 자 중달(仲達) 국적 중국 위(魏)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중국 하내군(河內郡: 河南省) 온현(溫縣)
자 중달(仲達). 하내군(河內郡: 河南省) 온현(溫縣) 출생. 진왕조 건국 뒤에 고조선제(高祖宣帝)라고 추존되었으므로, 사마선왕(司馬宣王) 또는 진나라의 고조선제라고도 하였다. 처음에 조조(曹操)의 청으로 그의 부하가 되고,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 文帝)가 위나라를 세운 뒤에는 명제(明帝)·제왕(齊王) 등 3대 황제를 섬겼다. 그동안 대도독(大都督)이 되어, 위나라의 군사를 통솔하고 위나라와 진나라 유일의 권신이 되어, 그의 손자 사마 염(司馬炎) 때 제위를 빼앗아 진나라를 일으키는 터전을 닦았다.
주요한 업적은 조비의 유언을 받아 명제 및 제왕을 보좌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국 정립의 위기에 처하여 외적을 물리친 일이다. 특히 촉한(蜀漢)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오장원(五丈原)에서 막아, 그의 의도를 꺾기도 하였다. 또 요동(遼東)을 정벌하여 요동태수 공손 연(公孫淵)을 멸망시키고, 요동을 위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그 밖에 남방의 오(吳)나라에 대처하여 화이허강[淮河] 유역에 광대한 군둔전(軍屯田)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한 일도 큰 업적이다.
사마의 그는 무장으로서도 초일류였지만 정치가나 행정관료로서도 당대에 비교할 만한 인물이 없을 만큼 초일류의 인물이었다. 삼국시대가 끝날 무렵 제갈량과 주고 받은 허허실실이 읽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하지만 가히 제갈량하고나 견줄 수 있는 출중한 존재였다. 그는 남의 신하였지만 신분상의 한계를 결코 넘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위품은 항상 인신(人臣) 이상의 위치에 있었다. 그리하여 손자(司馬炎)가 진(晋)을 세우는 기틀을 미리 다져 놓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우격다짐으로 끌려나온 사마의
사마의(字는 仲達)는 낙양 동북쪽에 있는 효경리 사람이다. 22세 때 천거되어 지방공무원이 되었는데 그의 소문을 듣고 조조가 그를 발탁해서 속관을 시키려 했었다. 녹록한 위인 같으면 관운이 튀었다고 달려올라갔겠지만 그는 달랐다. 중풍으로 기동을 못하는 상태라고 핑계되어 거절하고 말았다. 당시 조조는 관도(官渡)싸움에서 원소를 분쇄하고 여남(汝南)에서 유비마저 깨쳐 기세등등하게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을 때였다.
일화1
꾀병으로 침상에 꼼짝 않고 누워 있는데 갑자기 소나가가 쏟아졌다. 때마침 책들을 햇볕에 내놔 거풍(擧楓:쌓았던 물건을 내놔 바람을 쏘임)을 하고 있었다. 비를 맞으면 큰일이다. 당황한 사마의는 뛰어나가 방안으로 거둬들였다. 이때 공교롭게도 여종이 하나 이 광경을 목도했었다.
만약 이 일이 탄로나면 조조의 성미로 가문두지 않을 것 같다. 사마의의 아내는 그 여종을 불러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고 말았다. 자기 명령을 거역한 사마의를 괘씸하게 생각한 조조는 은밀히 자객을 보내 꾀병이면 처치해 버리도록 했다. 자객이 방안에 들어왔다. 그러나 사마의는 마치 중풍에 걸린 사람인 양 꼼짝 않고 누워 있다. 자객은 거짓이 아니었구나 싶어 그대로 돌아갔다. 어찌되었던 후에 삼공의 직책을 없애고 승상의 자리에 오른 조조는 사마의를 우격다짐으로 데리고 온다.
'낭고지상(狼顧之相)'의 얼굴
'낭고'란 이리가 뒤들 잘 돌아본다 하여 사람도 누가 쫓아올까봐 두려워서 뒤를 자주 돌아보는 것을 비유해서 쓰는 말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는 경우 보통 사람 같으면 목뿐 아니라 몸 전체를 돌리는게 상식인데 낭고상의 사람은 몸은 그래로 앞으로 가면서도 얼굴만 돌려 뒤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마의가 바로 그런 얼굴이었다 한다.
손자병법대로의 처신
손자(孫子)에 '병은 궤도(詭道:속임수)'라는 말이 있다. 사마의의 처신이나 전술은 시종 '궤도'로 일관되어 있다.
어린 황제의 보좌를 맡을 때 사마의는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조상 편에 얕은 재주꾼들이 몰려들어 술수를 부리기 시작했다. 조상의 주변에는 허명(虛名)만 자자할 뿐 실(實)이 없는 경박한 재사들이 점점 더 몰려들어 그들의 방자한 행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사마의는 병을 병을 칭탁하여 조정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조상등은 사마의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형주(形州)자사에 임명하여 부임하게 되는 이승(李勝)으로 하여금 사마의의 동정을 살피도록 했다. 이승이 안내를 받아 사마의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 보니 여종이 좌우에서 부축해서 일으켜 앉히는데 옷이 자꾸 흘러내린다. 그리고는 여종에게 입을 가리키면서 마실 것을 청하는데 입에 갖다대주는 미음도 제대로 받아 먹지를 못하고 질질 흘려 옷을 적신다. 너무 처참해 이승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중풍으로 기동이 불편하시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천자께서는 아직 어리셔서 천하가 모두 어르신네만 믿고 계신 터에 이러시니 참으로 큰일입니다."
이 말에 사마의가 숨을 가다듬고 무슨 말을 하는데 도무지 지리멸렬이다.
"...이 나이에 기동까지 못하니 아마 갈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네. 자네가 떠나고 나면 아마 다시는 못 만날 듯 싶네. 부디 내 두 자식놈들과 사이좋게 지내주게."
이렇듯 사마의의 처신은 시종 '궤도'로 일관되었으며 조상이 마음을 놓은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등은 역모를 했다는 구실하에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이리하셔 모든 권한은 사마씨 일가의 손안에 완전히 들어가고 만 것이다.
공명을 능가하는 치밀주도한 지략
오장원(五丈元)에서 공명이 죽고 난 지 3년 뒤이다.(서기 237년) 요동지방에서 공손연(公孫淵)이 반란을 일으켰다. 명제는 사마의를 수도로 불러올려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런 하찮은 일로 공을 수고롭게 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꼭이겨야 할 싸움이라 다른 사람으로는 마음이 안 놓이는구려. 먼길을 안됐지만 나서 줘야겠는데 무슨 좋은 계책이 있겠소?"
사마의가 대답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역적의 무리들이 쓸 수 있는 계책으로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그들이 본거지인 양평을 버리고 멀리 물러나서 우리를 깊숙히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것인데 이것은 상책(上策)으로 저희가 고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다음은 요수(遼水)가에 방위선을 구축해서 우리를 요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책(中策)입니다. 우리가 해볼 만합니다. 세 번째는 그들이 양평에 농성하는 것인데 그렇게만 나온다면 승리는 식은 죽먹기올시다."
"그러면 공손연은 세 가지 계책 중 어느 것을 쓸 것 같소?"
"미리 자기와 상대방의 전력을 비교평가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의 본거지도 아낌없이 버릴 줄 아는 - 그런 담대한 작전은 지혜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 공손연 정도에게는 무리일 것입니다. 병법상 원정군으로서는 장기전은 금물로 되어 있습니다. 공손연은 아마 그 점만 생각해서 우선 요수가에 방위선을 구축하여 저희를 막은 다음 양평에서 농성한다는 2댠계 작전을 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중, 하의 책략입니다.
사마의의 예상은 적중 양동작전을 펴서 대군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척하여 적을 유인해 놓고는 은밀히 주력부대를 이끌고 북쪽에서 도하(渡河), 일로 적의 본거지인 양평으로 진격했다. 공손연은 황급히 요수에서 철수해서 위군을 맞아 싸웠지만 연전연패 궤멸적 타격을 입고 후죄 양평에서 농성한다. 그러나 그는 사마의의 적수는 못되어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작전은 참으로 공명을 능가하는 신산묘계(神算妙計)였다.
평가
에 다음과 같은 사마의 평이 실려 있다.
선제(宣帝:사마의)는 겉으로는 너그러운 체하여 상대가 싫어도 일체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성질이 음흉하고 임기 응변의 술수가 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