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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케인즈가 나올 수 없는 이유

이규동 |2006.05.30 00:53
조회 146 |추천 0
언젠가는 한번 말하고 싶었던 주제이지만,
요즘 싸이도 잘 안하거니와(글 남긴 사람 답방하는 수준)
글을 쓸만한 계기가 없어서 미뤄왔다.
그러다가 한승조 명예교수(물론 사건이 터지기 전엔 전혀 모르던 사람이다)의 망언이 터져나오면서 그 글을 읽고 이 주제에 대해서 한번 글을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승조는 (의도적 존칭생략) 망언도 망언이지만, 공산주의.자본주의에 대한 흑백적 사고를 가진 사람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우리사회에 그런 흑백사고를 가진 사람이 많은 듯해서....

자본주의의 발전의 이면에는 끊임없이 변화해온 역사가 있다.
초기 자본주의는 완전한 실패였다. 초기 자본주의가 성공적이었다면 지구의 절반이 공산주의로 돌아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는 성숙하지 못한 자본가들의 사고의 경직성 때문에 노동자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는 대부분 필연적으로 독재자를 받아들이게 되는 사회구조를 가지게 되면서 스스로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지고 만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사고의 경직성 때문이다.
나는 초기 자본주의의 실패요인이 돈에 눈이 먼 자본가들의 사고의 경직성.배타성이라면, 공산주의의 실패요인 중 하나는 국가가 자원을 배분하는 구조에서 생긴 독재자들의 사고의 경직성.배타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언하자면, 난 아직 공산주의 국가가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여태까지 존재했던 공산주의 국가는 독재국가일 뿐이었다. 공산주의의 탈을 쓴 독재국가라고나할까...권력유지를 위해 이론을 이용한 나쁜 놈들..)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내전을 겪으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충성도는 높아졌지만 유연한 사고는 떨어졌다. 게다가 조선왕조에서 바로 일제,미군정에 이은 군사독재를 겪으면서 정치적으로도 자유로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에 익숙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집권층의 권력다지기의 수단으로 삼은 반공정신에 투철하게 되었다. 물론, 집권층에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명분 때문에 내전을 겪었다면 누구라도 공산주의를 용인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지금이다. 그 후유증 때문에 이젠 경제정책을 정하는 데 있어서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좌파 우파로 나뉘어 싸운지가 50년을 넘었는데 지금까지도 옛날 사고방식을 가진 일부 사람들은 현정권을 좌파로 규정짓고 그것을 이유로 욕을 한다. 정부의 시장개입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대공황시절 이후로 증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개입하려하면 공산주의라고 떠들어대면서 이 나라가 대체 어디로 가느냐고 한탄한다. 더욱더 이해가지 않는 것은 특히 복지정책에 있어서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복지정책이 이슈화 되면 좌파적 정책이라는 말이 왜이리 많이 떠도는지 모르겠다. 만약 한국에 1920년대의 대공황이 다시 닥치고 케인즈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영웅대접은 커녕 좌파, 공산주의자의 딱지를 붙이고 불명예스럽게 살지도 모를 일이다.

좌파 우파를 나누는 것도 정말 의미없는 일이지만, 좌파로 규정되는 것을 왜 그리 알레르기 반응하듯이 싫어하는지 그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좌파와 우파는 편의상 쓰는 용어일 뿐이지 않는가. 자본주의가 우월함이 이미 입증됐는데, 조금만 좌파 같으면 배척해버리는 나쁜 버릇은 언제 버릴 것인가.

유럽에는 공산당도 한 정당으로서 인정받는 나라가 많다. 아마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취임전에 '공산당도 있어야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다' 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가 보수언론으로부터 호되게 당한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그 의견에 100% 동감한다. 공산주의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가 독재를 불러올 경우는 치명적이지만 현재 우리 사회가 독재를 용인할 분위기는 아니다. 정부의 시장개입이나 복지정책에 좌파(역시 편의상 쓰는 용어다) 의 의견이 수용될 공간은 충분하다. 이제는 좌파의 생각을 더 나은 자본주의를 위해 이용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노동자들은 더이상 19세기초의 모습이 아니다.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한 결과다. 대공황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케인즈의 유연한 사고와 그것을 받아들인 정책적 배려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자본주의는 현재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그들이 이미 20년대에 보여주었던 '유연한 모습'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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