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맹덕
문무에 뛰어난 귀재로 우수한 지략과 선견성으로
줄이어 다른 제후를 격파해 갔다.
결국에는 한의 승상이 되어 위의 기초를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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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무황제는 패국 초현 사람으로 성은 조, 휘는 조, 자는 맹덕이다. 전한때 상국을 지낸 조참의 후예로 환제때 조등은 중상시와 대장추를 지냈으며, 나중에는 비정후에 봉해졌다. 양자 조숭이 작위를 이어받아 태위의 관직까지 이르렀지만,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어떤 경위로 양자로 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조숭이 조조를 낳았다.
조조는 어려서부터 기지와 총명함과 권모술수가 있었으며, 의협심이 강하고 멋대로 놀기를 좋아해, 덕행과 학업을 닦는 일을 등한히 했다. 따라서 일반 사람들은 그를 뛰어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양나라 사람 교현과 남양의 하옹만이 그를 남다른 인물로 알아주었다. 교현이 조조에게 말했다.
"천하는 장차 혼란에 빠질 것인데, 세상을 구할 만한 재목이 아니면 이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아마도 그대에게 달려 있을 것인저!"
나이 스물에 효렴에 천거되어 낭관이 되었고, 동한의 수도 낙양 북부 지역의 위에 임명되었다가, 돈구현의 현령으로 승진하였으며, 중앙으로 불려가 의랑으로 임명되었다.
한나라 영제 광화 말년 황건이 난을 일으키자, 조조는 기도위에 임명되어 영천의 황건적을 토벌하였고, 승진하여 제남국의 상이 되었다. 제남국에는 10여 개의 현이 있었응데, 장리들 가운데 대부분이 귀족과 친척에게 영합하였고 뇌물을 받고 직책을 파는 일이 횡행하였으므로, 조조가 상주하여 그 중 8명을 파직하게 하고 예법에 어긋난 제사를 엄금하니 간사하고 사악한 자들이 숨어버려 군 내의 질서는 안정되었다. 조조는 얼마 후에 소환되어 동군태수로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는 않고 질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간 직후, 기주자사 왕분, 남양 사람 허유,패국 사람 주정등이 호걸들과 연합하여 영제를 폐위시키고 합비후를 옹립할 계획을 세우고 조조에게 알렸지만, 조조는 그런 제의를 거절하였다. 왕분 등의 계획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금성 사람 변장과 한수가 자사와 태수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어켰는데, 무리가 10여 만 명이나 되어 천하가 동요되었다. 조정에서는 조조를 불러 전국교위로 삼았다. 때 마침 한 영제가 죽고 태자, 곧 소제가 즉위하였으며, 태후가 조정을 장악하고 정치를 했다. 대장군 하진은 원소와 환관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지만, 황태후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진은 곧 하동태수로 있던 동탁을 불러들여 태후에게 협박하려 했는데, 동탁이 낙양성에 도탁하기도 전에 환관들에게 살해되었다. 동탁은 낙양에 들어와 황제를 폐위시켜 홍농왕으로 삼고, 진류왕으로 있던 유협을 새 황제로 옹립하였으니, 그가 곧 헌제이다. 이리하여 수도는 크게 혼란스러웠다. 동탁은 조조를 효기교위로 삼아 그와함께 조정의 모든 일들을 의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조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사잇길을 따라 동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관소, 즉 호뢰관을 빠져나와 중모현을 지나갈 때, 정장의 의심을 받아 현성까지 압송되어 갔지만, 마을 사람 중에 어떤 이가 조조를 알아보자, 그에게 부탁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이때 동탁은 마침 황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하였다. 조조는 진류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군사들을 소집하여 동탁을 토벌할 준비를 했다.
겨울 12월 기오에서 처음으로 군대를 일으켰으니, 그 해가 한 영제 중평 6년(189)이다.
초평 원년(190) 봄 정월 후장군 원술, 기주목 한복, 예주자사 공주·연주자사 유대, 하내 태수 왕광·발해태수 원소·진류태수 장막·동군태수 교모·산양태수 원유·제북의 상 포신은 동시에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 숫자가 각기 수만 명이나 되었으며,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였다. 이에 조조는 분무장군의 직무를 대행했다.
2월 동탁은 군대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곧 천자를 협박하여 도읍을 장안으로 옮겼다. 동탁은 낙양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결국 한나라 궁실을 불태워버렸다. 이때 원소는 하내에 주둔하고 있었고, 장막·유대·교모·원유는 산조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원술은 남양에, 공주는 영천에, 한복은 업에 주둔해 있었다. 동탁의 군대가 강했으므로 원소 등은 감히 먼저 진군하려 하지 않았는데, 조조가 말했다.
"정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폭력으로 혼란스럽게 한 자를 토벌하기 위해 대군이 모두 모였는데, 여러분들은 또 무엇을 주저하십니까? 만일 동탁이 산동에서 군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듣고서 조정의 권의에 의지하고 이주의 요충지를 근거로 하여 동쪽으로 병사를 출정시켜 천하를 지배하려 한다면, 그는 도의에 어긋나는 수단으로 이일을 할 것이므로 국가의 큰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그는 궁실을 불태우고 황제를 위협하여 수도를 옮겨 놓았으며, 천하가 동요되어 백성들은 어느 곳에 의지하여 돌아가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그를 멸망하게 하려는 때문입니다. 한 번의 싸움으로 천하를 평정할 수 있는데,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나서 조조는 곧 혼자서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성고를 점령하려고 했다. 장막만이 장군 위자에게 병사를 나누어 주어 조조를 따라가도록 했다. 이들은 형양의 변수에 이르러 동탁의 장군 서영과 교전하였으나 패하여 병사들 가운데 대다수가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조조는 화살에 맞았으며, 타고 있던 말도 부상을 입었다. 사촌 동생 조홍이 자기 말을 조조에게 주었으므로, 조조는 밤에 몰래 빠져나갈 수 있었다. 서영은 조조가 이끄는 병사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전력투구하여 싸우는 것을 보고 산조를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 역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조조가 산조에서 돌아왔을 때, 여러 갈래의 의병 10여 만 명은 매일 주연을 성대하게 베풀 뿐 나아가 적극적으로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조조는 그들을 꾸짖으면서 책략을 내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나의 계획을 들어 보시오. 발해태수 원소는 하내의 군대를 이끌고 먼저 맹진으로 가고, 산조의 여러 장수들은 성고를 지키면서 오창을 점거하고 환원·태곡의 두 길을 봉쇄하여 요충지를 전부 제압합니다. 원술 장군은 남양의 군대를 이끌고 단현·석현에서 주둔하다가 무관으로 쳐들어가 삼보를 놀라게 합니다. 각 대군들은 모두 성벽을 노고 깊게 쌓되 적군과 싸우지는 말고 의병을 세워서 정의로써 역적을 토벌하려고 각지에서 일어나는 형세를 보여준다면, 천하는 아주 빠르게 평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군대는 정의의 이름으로 행동을 일으켰으면서도 의심하며 감히 진군하지 않는다면, 이는 천하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이며, 나와 여러분들은 부끄럽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막 등은 조조의 채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조는 병력이 적었으므로 하후돈 등과 양주까지 가서 병사를 모집했는데, 양주자사 진온, 단양태수 주흔이 그에게 4천여 명을 주었다. 돌아오던 중, 용항에 이르렀을 때, 병사들 가운데 대다수가 반란을 일으켰다. 질과 건평에 도달하여 다시 1천여 명의 병사를 소집하여 하내에서 주둔하였다.
유대와 교모는 서로 원수처럼 지냈는데, 유대가 교모를 죽이고는 왕굉으로 하여금 동군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원소는 한복과 더불어 유주목 유우를 황제로 옹립할 계획이었는데 조조가 거절했다. 원소는 또 일찍이 옥새를 얻은 적이 있는데, 조조가 앉아 있는 좌석에서 팔꿈치를 치면서 들어올려 보여주었다. 조조는 이로 말미암아 비웃으며 원소를 증오했다.
2년(191)봄 원소와 한복은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지만, 유우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름 4월 동탁은 장안으로 돌아왔다. 가을 7월 원소가 한복을 위협하여 기주를 빼앗았다. 흑산의 적 우독·백요·쉬고 등 10여 만 명은 위군과 동군을 공략하였다. 동군태수 왕굉은 이를 막지 못했다. 조조자 병사를 이끌고 동군으로 들어가 복양에서 백요를 공격하여 무찔렀다. 그래서 원소는 상소를 올려 조좆를 동군태수로 임명하여 동무양을 다스리도록 했다.
3년(192) 봄 조조가 돈구에 주둔하고 있었다. 우독 등이 동무양을 공격했다. 조조가 곧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흑산에 들어가 우독 등의 본거지를 공격하려 하니 우독이 그 소식을 들고 무양을 버리고 돌아갔다. 조조는 쉬고를 기다렸다가 공격하고, 또 흉노 어부라를 내황에서 공격하여 모두 크게 무찔렀다.
여름 4월 사도 왕윤이 여포와 공모하여 동탁을 살해했다. 동탁의 장군 이각과 곽사 등이 또 왕윤을 죽이고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는 패배하여 동쪽으로 향하여 무관을 도망쳐 나왔다. 이각 등이 조정을 제멋대로 했다.
청주의 황건군 1백만 명이 연주로 침입하여 임성국의 재상 정수를 죽이고 방향을 바꾸어 동평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유대가 그들을 공격하려 하자, 포신이 간언했다.
"지금 적의 군사는 1백만이고, 백성들은 두려워 벌벌 떨고 있으며, 병사들은 싸우려는 의욕이 없으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적의 군사력을 관찰하면 늙은이와 젊은이가 뒤섞여 있고, 군대에는 무기와 식량 등이 구비되어 있지 않아 완전히 약탈에만 의지하여 조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군사들의 힘을 축적하여 지키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그들은 싸워도 이길 수 없으므로 공격할 생각조차 못할 것이며, 형세는 반드시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정예군사를 선발하여 요충지를 점거하면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유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황건군과 싸웠는데 과연 죽음을 당했다. 포신이 주리 만잠 등과 동군으로 가서 조조를 영접하고 연주목을 맡아주도록 요청했다. 조조가 수장 동쪽으로 가서 황건군을 공격했다. 포신이 전력을 다하여 싸워 가까스로 황건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포신의 시신에 상금을 내걸고 찾으려 했지만, 결국 얻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포신의 모습과 비슷하게 나무를 깎아서 만들어 놓고, 그것에 제사지내고 곡을 했다. 황건을 추격하여 제북까지 쫓아가니 황건군은 항복을 요청했다.
겨울 조조가 항복한 군사 30여 만 명과 남녀 1백여 만 명을 받아들였으며, 그 중에서 정예들만을 거두어 '청주병'이라고 불렀다. 원술은 원소와 사이가 좋지 않은 면이 있었다. 원술이 공손찬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공손찬이 유비를 고당에, 단경을 평원에, 도겸을 발간에 주둔시켜 원소를 압박하였다. 조조가 원소와 협력하여 그들을 모두 쳐부쉈다.
4년(193) 봄 조조는 견성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형주목 유표가 원술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자, 원술은 군사를 이끌고 진류로 들어가 봉구에 주둔했는데, 흑산에 남은 적들과 아버라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은 장군 유상을 광정에 주둔시켰다. 조조가 유상을 공격하자, 원술이 유상을 구원하기 위해 나왔으므로 양자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조조는 원술을 크게 쳐부쉈다. 원술은 퇴각하여 봉구를 지켰으나 조조가 원술을 포위하였고, 원술은 포위망이 뚫리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양읍으로 도망갔다. 조조의 군대는 태수까지 추격해갔고, 강둑을 무너뜨려 성안으로 물이 들어가게 했다. 원술은 영릉으로 도주했다. 조조가 계속 추격하자, 원술은 또다시 구강으로 도망쳤다. 여름 조조는 돌아와 정도에 진을 쳤다.
하비 사람 궐선은 수천 명의 군사를 모아놓고 스스로 천자라고 일컬었다. 서주목 도겸은 그와 손을 잡고 함께 군대를 일으켜 태산군의 화와 비를 빼앗고, 임성을 공략하였다. 가을 조조는 도겸을 정벌하고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는데, 도겸은 성을 굳게 지킬 뿐 감히 싸우러 나오지 못했다. 이 해(193) 손책은 원술의 지시를 받아 장강을 걷넜으며, 몇 년 안에 강동을 소유하게 되었다.
홍평 원년(194) 봄 조조는 서주로부터 연주로 돌아왔다. 예전에 조조의 붙친 조숭은 관직을 내팽개치고 초현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동탁의 난이 일어나자 낭야로 피난갔다가 도겸에게 살해당했다. 그때문에 조조는 동쪽을 정벌함으로써 복수하려고 생각했다. 여름 조조는 순욱과 정욱으로 하여금 견성을 지키도록 하고, 다시 도겸을 정벌하려 가 다섯 성을 함락시키고, 그 토지를 공략하여 동해까지 갔다. 돌아오는 도중에 담을 지나는데, 도겸의 부장 조표가 유비와 함께 담의 동쪽에 주둔하여 조조를 맞아 공격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들을 격파시키고 나아가 양분을 공격하여 빼앗았으며, 그가 지나간 지역은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때마침 장막이 진궁과 반역을 도모하여 여포를 맞이했는데, 연주의 군과 현이 모두 호응하였다. 순욱과 정욱은 견성을 보위하고, 범과 동아 두 현을 굳게 지키는데,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여포가 도착하여 견성을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여 서쪽의 복양에 주둔했다. 조조가 말했다.
"여포가 하루아침에 한 주를 얻었지만, 동평을 근거지로 하여 항부와 태산의 길을 끊어버리고 요충지를 이용하여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양에 주둔하고 있으니,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겠다."
이렇게 말하고는 곧 군대를 나아가게 하여 공격하였다. 여포는 군대를 내보내어 싸우게 했는데, 먼저 기병들로 청주병을 공격하게 했다. 청주병이 패배하여 달아나자, 조조의 진세는 혼란스러워졌다. 조조는 급히 말을 달려 불길을 빠져 나오다가 말에서 떨어져 왼쪽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다. 사마 누이가 조조를 부축하여 말에 오르게하고 나서야 비로소 군대를 거두어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군영에 돌아오기 이전에 여러 장수들은 조조가 보이지 않자 모두 놀라고 두려워했다. 조조는 곧 군영에 도착한 후 장수들을 위로하면서, 명령을 내려 성을 공격할 무기를 빨리 만들도록 한 다음, 다시 군대를 이끌고 여포를 공격하여 1백여 일간 대치하였다. 이때 명충이 일어났고 백성들은 굶주림에 고통을 받았으며, 여포의 군량미도 모두 떨어져 쌍방은 각자 군사를 퇴각시켰다.
가을 9월 조조가 견성으로 돌아왔다. 여포는 승씨현에 도착햇으나, 그곳 사람 이진에 의해 공격을 받아 패하여 동쪽으로 가서 산양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원소는 사람을 파견하여 조조에게 연합하자고 설득했다. 조조는 막 연주를 잃어버렸고, 군대의 양식도 모두 떨어져 그렇게 하려고 생각했으나, 정욱이 거절할 것을 권하여 조조는 그의 의견을 따랐다.
겨울 10월 조조가 동아현으로 돌아왔다. 이 해에 곡식 한 섬은 50여 만 전에 달했으며,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리와 병사들 중에서 새로 소집된 자들을 고향에 돌려보냈다. 도겸이 죽고 유비가 그를 계승하여 서주목이 되었다.
홍평 2년(195) 봄 조조는 정도를 습격했으나 제음태수 오자가 정도의 남쪽성에서 지켰으므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마침 여포가 도착하여 조조는 또 다시 그를 공격하여 쳐부쉈다. 여름 여포의 부장 설란·이봉이 거야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조조가 그들을 공격하였으며, 여포는 설란을 구하려다가 설란이 패배하자 여포도 달아났고, 마침내 설란 등의 목을 베었다. 여포가 다시 동민과 진으로부터 1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싸우러 왔지만, 그 당시 조조의 군대는 수가 적었으므로 매복시켜 두었다가 기습적으로 쳐서 크게 쳐부쉈다. 여포가 밤에 도주하자, 조조가 다시 공격하여 정도를 점령하고 군대를 나누어 여러 현을 평정하였다. 여포는 동쪽으로 유비에게 달아났고, 장막이 여포를 따르면서 그의 동생 장초에게 가족을 데리고 옹구를 지키도록 했다.
가을 8월 조조가 옹구를 포위하였다. 겨울 10월 천자가 조조를 연주목에 임명하였다. 12월 옹구가 무너지자 장초는 자살하였는데, 조조가 장초의 삼족을 멸하였다. 장막은 원술이 있는 곳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려 했으나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연평이 평정된 후에 조조는 동쪽으로 향하여 진국을 빼앗았다.
이 해(195) 장안에서 동란이 발생하여 천자는 동쪽 낙양으로 옮기려 했으나, 황제를 호송하던 부대가 이각과 곽사의 군사에게 조양에서 패배하여, 황제는 급히 황하를 건너 안읍에 도착했다.
건안 원년(196) 봄 정월 조조가 이끄는 군대가 무평에 도착하였고 원술이 임명한 진국의 재상 원사가 항복하였다.
조조가 천자를 영접하려고 하자 장군들이 의혹을 품었는데, 순욱과 정욱이 조조에게 영접할 것을 권하였으므로 조조는 곧 조홍에게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황제를 영접하도록 했다. 그러나 위장군 동승과 원술의 장수 장노가 요충지를 막고 있었으므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여남과 영천의 황건. 하의·유설·황소·하안 등은 각각 수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원술을 따랐지만, 또 다시 손견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이 해 2월 조조는 군사를 풀어 그들을 퇴각시켰으며, 유설·황소등을 참수하니, 하의와 그의 부하들은 모두 항복했다. 천자는 조조르 건덕장군으로 젯했다. 여름 6월 조조는 진동장군으로 승진하고 비정후에 봉해졌다. 가을 7월 양봉과 한섬은 천자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양봉은 따로 군대를 이끌고 양에 주둔했다. 마침내 조조가 낙양으로 돌아와서 수도를 호위하니, 한섬은 슬그머니 도망가버렸다. 천자는 조조에게 부절과 황월을 주고, 녹상서사로 삼았다. 낙야이 산산이 파괴되었으므로 동소 등은 조조에게 허현으로 천도할 것을 권하였다.
9월 헌제는 환원을 나와 동쪽으로 향하여 허현으로 왔으며, 조조를 대장군으로 삼고 무평후에 봉했다. 천자가 서쪽으로 이동할 때부터 조정은 나날이 혼란스러웠으나, 이때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중의 제반 제도가 비로소 확립되었다.
천자가 동쪽으로 향하고 있을 때 양봉은 양현에서 출병하여 천자를 저지하려 했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겨울 10월 조조가 양봉 정벌에 나섰다. 양봉은 남쪽의 원술에게로 도망쳤지만, 조조는 그가 주둔하였던 양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조정에서는 원소를 태위로 임명했지만, 원소는 조조의 아래에 놓여짐을 치욕스럽게 생각하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조조는 고사하고 그것을 원소에게 양보했다. 천자는 조공을 사공으로 임명하고 거기장군을 대신하게 했다.
이 해(196) 조지·한호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둔전제를 실시하였다. 여포가 유비를 습격하여 하비성을 빼앗자, 유비는 도망쳐왔다. 정욱이 공에게 진언했다.
"유비를 관찰해 보니, 영웅다운 재능이 있고 인심을 많이 얻었으니, 끝까지 다른 사람 밑에 있을 인물이 아닙니다. 일찍이 그를 제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조조가 대답했다.
"지금은 영웅을 끌어들일 시기이다. 이럴 때 한 사람을 죽여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잃는 일은 옳지 않다."
장제는 관중에서 남양으로 도망갔다. 장제가 죽자, 조카 장수가 그의 군대를 이끌었다.
2년(197) 봄 정월 조조는 완성으로 갔다. 장수는 항복했지만, 오래지 않아 후회하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는 그와의 써움에서 어지럽게 퍼붓는 화살에 맞았고, 장남 조앙과 조카 조안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조조는 병사들을 무음으로 퇴각시켰는데, 장수가 기병들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조조는 그들을 격파시켰다. 장수는 양현으로 달아나 유표와 연합했다. 조조가 여러 장군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장수 등을 항복시켰지만, 인질을 잡아두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이오. 나는 패배한 원인을 분명히 알고 있소. 여러분들도 이것을 알았으니, 지금부터 다시는 패배하지 않을 것이오."
조조는 마침내 허현으로 돌아왔다.
원술은 회남에서 황제라고 칭하려고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어 여포에게 알렸다. 여포는 그 사신을 붙잡아 놓고 그의 서신을 조정에 보고했다. 원술은 크게 화가 나서 여포를 공격했지만, 패했다.
가을 9월 원술이 진국을 침략하였으므로 조조는 그를 정벌하러 동쪽으로 갔다. 원술은 조조가 직접 공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그대로 두고 도주하면서 그의 장수 교유·이풍·양강·악취를 남겨 지키도록 하였다. 조조가 도착하여 교유 등을 쳐부수고 모두 참수시켰다. 원술이 회수를 건너 도망갔고, 조조는 허로 돌아왔다.
조조가 무음에서 허현으로 돌아왔을 떄, 남양·장릉의 여러 현의 백성들은 또다시 장수에게 붙으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가 조홍을 파견하여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전세는 불리했다. 조홍이 병사를 철수시켜 업현에 주둔시켰는데, 장수와 유표에게 몇 차레 공격을 당했다.
겨울 11월 조조는 직접 남정하여 완성까지 갔다. 유표의 부장 등제는 호양현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조조는 그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등제를 생포했으며 호양을 평정하였고, 무음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3년(198) 봄 정월 조조는 허현에서 돌아와 최초로 군사좨주를 설치하였다. 3월 조조가 장수를 양현에서 포위했다.
여름 5월 유표가 병사를 파견하여 장수를 구원하고 조조 군사의 퇴로를 차단시켰다. 조조는 후퇴하려 했지만, 장수의 군대가 뒤에서 추격해 들어오고, 조조의 군사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워 진영을 연결하고 조금씩 나아갔다. 조조는 순욱에게 편지를 보냈다.
-적군이 우리를 추격하고 있다. 하루에 몇 리밖에 행군할 수 없지만 헤아려 보건대, 안중현에 도착하면 반드시 장수를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안중현에 도착해보니 장수는 유표의 병사와 합류하여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으므로, 조조의 군사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조는 한밤중에 요충지에 굴을 파서 지하도를 만들고 군수품을 전부 운반시킨 다음, 기습할 군사를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적은 조조가 이미 도망갔다고 생각하고는 전군을 풀어 추격했다. 조조는 매복시켜 두었던 군사와 보병 및 기병을 출동시켜 공격하여 장수를 크게 이겼다. 가을 7월 조조가 허현으로 돌아왔다. 순욱이 조조에게 물었다.
"이전에 적군이 반드시 패배할 것을 미리 헤아린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조조가 대답했다.
"적은 우리 군대가 돌아갈 길을 막아서 우리를 죽을 곳에 몰아넣었기 때문에 나는 승리할 줄 알았던 것이오."
여포는 다시 원술을 도와 고순에게 명하여 유비를 공격하도록 했다. 조조는 하후돈을 파견하여 유비를 구원하려 했지만 형세가 불리하였으므로, 유비는 고순에게 패하였다. 9월 조조는 여포를 토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갔다. 겨울 10월 팽성을 죽이고, 그의 재상 후해를 사로잡았다. 조조가 하비성까지 진격하자 여포는 직접 말탄 군사를 이끌고 나와 싸웠다. 조조는 여포를 크게 무찌르고, 그의 용장 성렴을 사로잡았다. 조조가 하비성 아래까지 추격하자 여포는 두려워 항복하려 했으나, 진궁 등이 여포의 의도를 저지하고는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여포에게 성을 나와 싸우도록 권하였다. 여포는 싸움에서 다시 패하자, 성안으로 돌아가 굳게 지켰으므로, 조조가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 당시 계속된 싸움으로 조조의 병사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으므로 돌아가려 했지만, 순유·곽가의 계책을 받아들여 사수와 기수의 둑을 무너뜨려 물이 성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한 달 남짓한 후에 여포의 부장 송헌과 위속 등이 진궁을 사로잡고 성을 바치며 투항하자, 조조는 여포와 진궁을 생포하여 두 사람 모두 죽였다.
태산군의 장패·손관·오돈·윤례·창희는 각각 도당을 소집했다. 여포가 유비를 공격했을 때 장패 등은 전부 여포에게 귀속되었다. 여포가 싸움에서 패하자, 조조는 장패 등을 포로로 잡았지만 관대하게 대접하여 청주와 서주의 해안지대를 나누어 그들에게 위탁했으며, 낭야·동해·북해·의 일부를 떼어서 성양군·이성군·창려군을 만들었다.
이전에 조조가 연주자사로 있을 때, 동평 사람 필심을 별가로 임명했었다. 장막이 모반을 일으켰을 때, 장막은 필심의 어머니·동생·아내를 위협했다. 조조는 그를 떠나보내면서 말했다.
"그대의 노모께서는 저쪽에 있으니, 여기를 더나가도 좋소."
필심은 머리를 조아리고 다른 마음이 없음을 나타냈으며, 조조는 그를 칭찬했고, 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필심은 물러나온 후 곧장 장막에게 돌아갔다. 이때 여포의 군사가 패하고, 필심이 사로잡혔는데, 사람들은 모두 필심을 걱정하였지만, 조조는 말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어찌 자기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겠는가? 그는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곧 노나라 재상에 임명되었다. 4년(199) 봄 2월 조조는 창읍에 이르렀다. 장양의 부장 양추가 장양을 죽이고, 쉬고는 장양의 고장사 설홍과 하내태수 무상으로 하여금 남아 지키도록 하고, 자기는 병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원소를 맞아 구원을 요청했지만, 사환·조인과 견성에서 맞부딪쳤다. 양군은 싸웠으며, 조조의 군사는 쉬고를 대파하고 쉬고를 죽였다. 조조는 황하를 건너 사견을 포위했다. 설홍과 유상이 군대를 이끌고 투항했으므로 조조는 그들을 열후에 봉하고, 군사를 돌려 오창으로 돌아왔다. 위종을 하내태수로 임명하여 황하 이북을 맡겼다. 이전에 조좆는 위종을 효렴에 천거했었다.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조조가 말했다.
"위종만은 또다시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종이 또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노기가 충전하여 말했다.
"위종, 남쪽의 월로 달아나거나 북쪽의 호로 달아나지 못할 것이니, 나는 결코 너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사견을 함락시키고 위종을 생포하자, 조조가 말했다.
"그는 재능있는 사람이오."
그리고는 그를 풀어주고 기용했다. 이때 원소는 벌써 공손찬을 병합하고 사주(청주, 기주, 병주, 유주)의 땅을 갖고, 10여 만 명의 군사도 거느리고 있었으며, 허현을 공격하려고 했다. 조조는 여러 장수들이 그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 조조가 말했다.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소. 뜻은 크지만 지혜가 적소. 겉모양새는 엄하지만 속마음은 겁이 많소. 질투심이 강하고 남보다 앞서고 싶어하면서도 위엄이 적소. 그의 병사들은 많지만 부서가 마땅치 못하고, 장수들은 교만하며 명령에도 일관성이 없소. 비록 토지가 넓고 양식이 풍부하지만, 오히려 우리를 받들게 될 것이오."
가을 8월 조조는 영양으로 군대를 나아가게 하고, 장패 등은 청주로 들어가서 제·북해·동안을 공격하여 무찔렀으며, 우금을 황하가에 주둔시켰다. 9월 조조는 허현으로 돌아오면서 군대를 분산시켜 관도를 지키도록 했다. 겨울 11월 장수가 군대를 이끌고 항복하자, 그를 열후에 봉했다. 12월 조조는 관도에서 진을 쳤다.
원술은 진에서 패한 후 그 세력이 점차 약해졌다. 원담은 청주에서 사람을 보내어 그를 영접했다. 원술은 하비를 통하여 북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조조는 유비와 주령을 파견하여 그를 공격했다. 이때 원술이 질병으로 죽었다. 정욱·곽가는 조조가 유비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를 자유롭게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조조는 후회하고 유비를 추격했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유비가 동쪽을 향하여 떠나기 전에 일찍이 동승 등과 은밀히 모반을 도모하였다. 하비에 이르러 서주자사 차주를 살해하고 군대를 일으켜 패현에 진을 쳤다. 조조는 유대와 왕충을 파견하여 그를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여강태수 유훈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여 열후에 봉해졌다. 5년 봄 정월 동승 등의 계획이 누설되어 모두가 사형에 처해졌다. 조조는 직접 동쪽으로 가서 유비를 정벌하려고 했다. 부장들은 모두 이 이일을 막으며 말했다.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원소입니다. 지금 원소가 쳐들어오려 하고 공께서는 이를 내버려두고 동쪽으로 향하려 하시는데, 만일 원소가 뒤에서 우리들의 퇴로를 차단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조가 말했다.
"유비는 사람이 호걸이오. 지금 공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뒷날 근심이 될 것이오. 원소는 큰 뜻이 있지만 형세 판단과 그에 대한ㄴ 대응이 느리므로 틀림없이 군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곽가도 조조의 생각을 지지했다. 그래서 조조는 동쪽으로 가서 유비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의 부장 하후박을 사로 잡았다. 유비는 원소에게로 도망갔고, 조조는 그의 처자를 포로로 잡았다. 유비의 부장 관우가 하비에 주둔해 있었는데, 조조가 다시 그를 공격하니 관우는 투항했다. 창희가 일찍이 반란을 일으키고는 유비 편이 된 적이 있으므로 조조는 또 그를 무찔렀다. 조조가 관도로 돌아왔지만, 원소는 결국 군대를 일으키지 않았다.
2월 원소는 곽도·순우경·안량을 파견하여 백마에 있는 동군태수 유연을 공격했고, 원소 자신은 병사를 이끌고 여양으로 가서 황하를 건너려고 했다. 여름 4월 조조는 북쪽으로 가서 유연을 구원하려고 했다. 순유가 조조에게 진언했다.
"지금 우리 병사의 수는 적으므로 원소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적의 세력을 분산시키면 가능할 것입니다. 공께서 연진에 도착한 후, 병사들로 하여금 물을 건너게 하여 그 뒤를 공격하도록 할 것처럼 하면, 원소는 틀림없이 병사들을 분산시켜 서쪽으로 향하게 하여 싸움에 응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우리는 날쌘 병사로 백마를 공격하고, 적의 부주의한 틈을 타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원소는 조조 병사가 물을 건너려 한다는 것을 듣고 즉시 병사를 분산시켜 서쪽으로 향하게 하고 싸움에 응하려고 했다. 조조는 군대를 인솔하여 속도를 두 배로 하여 백마로 달려가도록 했다. 백마로부터 10여 리 떨어진 곳에서 안량은 조조의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급히 맞아 싸웠다. 조조는 장료·관우를 선봉으로 삼아서 원소의 군대를 격파하고 안량을 죽였다. 백마의 포위망을 풀고 그곳 백성들을 황하의 서쪽으로 옮겼다. 원소는 이때 황하를 건너 공의 군사를 추격하여 연진 남쪽까지 왓다. 조조가 병사를 거두어 남반아래에 진영을 치고, 위로 올라가 원소의 군사를 보게 했다. 망을 보던 병사가 말했다.
"대략 5, 6백 명의 기병이 있습니다."
잠시 후 또 보고했다.
"기병이 점점 증가하고 있고, 보병의 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많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다시 보고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나서 기병에게 말안장을 풀고 말을 놓아주라고 명령했다. 이때 육로로는 백마로부터 군수물자가 운반되고 있었다. 장수들은 적의 기병이 많으므로 돌아오게 하여 진영을 지키고 있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순유가 말했다.
"이것은 적을 유인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철수한단 말인가!"
원소의기병 장수 문추와 유비는 5, 6천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앞뒤로 추격해 왔다. 조조의 여러 장수들은 또 말했다.
"말을 탈 수 있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아직 때가 아니오."
잠시 후, 추격해 오는 기병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어떤 자들은 군수물자를 차지하려고 달려갔다. 조조가 말했다.
"됐다."
모두 말에 올랐다. 그때의 기병의 수는 6백 명이 못됐는데, 공격하여 우너소의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문추를 죽였다. 안량·문추는 모두 원소의 맹장이지만, 두 번의 싸움으로 모두 죽었다. 원소의 군대는 크게 동요했다. 조조는 군대를 관도로 도려보냈다. 원소는 진군하여 양무를 지켰고 관우는 이 틈을 타서 유비에게로 도망쳤다.
8월 원소는 진영을 연결하여 사산을 따라 조금씩 전진하여 진을 펴니 동서로 수십 리가 되었다. 조조 또한 진영을 나누어 그에게 대항했지만 불리한 싸움이었다. 이때 조조의 병사는 만 명이 채 못됐는데, 부상을 입은 자가 10분의 2 내지 3이나 되었다. 원소의 군대는 또다시 관도 근처까지 전진하여흙산과 지하도를 구축했다. 조조도 진영 안에서 똑같은 것을 만들에 대응했다. 원소가 조조의 진영 안으로 화살을 쏘았는데 마치 비가 내리는 듯했으므로 진영 안에서는 걸을 때도 모두 몸을 방패로 가리면서, 매우 두려워했다. 이때 조조의 양식이 매우 적었으므로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어 허도로 돌아갈 방법을 상의하니, 순욱의 답장은 이러했다.
-원소는 모든 병력을 관도에 집결시키고 공과 승패를 겨루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공은 매우 약한 병력으로 지극히 강한 적군을 감당해야 합니다. 만일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면, 반드시 그들에게 짓밟히게 됩니다. 지금이야말로 천하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시기입니다. 더구나 원소는 평범하고 무능한 일개 우두머리에 불과하므로 인재를 모을 수는 있지만, 기용해 쓸 줄은 모릅니다. 공의 신무와 지혜에 의지하고, 천자를 받들어 반군을 토벌한다는 정의의 이름을 가지고서 어찌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조조는 순욱의 의견을 따랐다.
손책은 조조가 원소와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허도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출발하기도 전에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여남에서 항복한 적장 유벽 등은 조조를 반역하고 원소에게 호응하여 허도 근처를 공략했다. 원소는 유비에게 명하여 유벽을 원조하게 했지만, 조조가 조인을 파견하여 유비를 무찔렀다. 유비는 달아나 버렸고, 마침내 조조의 군사는 유벽의 진영을 공략했다.
원소의 곡물 수송 수레가 수천 대 나오자, 조조는 순유의 계략을 이용하여 서황과 사환을 보내 공격하여, 원소의 군대를 대파하고 그 수레를 모두 불살랐다. 조조는 원소와 수개월 동안 대치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친 싸움에서 적군의 장수를 참수했지만, 군사는 적고 양식은 다 떨ㄷ어져 갔으며 병사들은 피곤해 있었다. 조조는 식량을 운반하는 병사에게 말했다.
"오히려 보름만 지나면 그대들에 의해 원소가 무너질 것이니, 다시는 그대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겠다."
겨울 10월 원소는 또 수송용 수레를 내에 곡물을 운반하고, 순우경등 다섯 사람에게 1만여 명의 병사를 주어 호송하였는데, 그들은 원소진영에서 북서쪽으로 10리 쯤 되는 곳에 묵었다. 원소의 모사 허유는 재화를 탐했는데, 원소가 그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으므로 조조에게 투항했다. 이때 그는 순우경 등의 공격을 조조에게 진언하였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의심했ㅈ만, 순유와 가후는 조조에게 '의심하지 말 것'을 권하였다. 조조는 조홍에게 남아 지키게 하고 직접 5천 명의 보병과 기병을 지휘하여 한밤중에 출발하여 날이 샐 무렵에 도달해다. 순우경 등은 조조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궁문 밖으로 나와 진을 쳤다. 조조가 급히 그들을 공격하니, 순우경은 후퇴하여 진영을 지켰지만, 조조는 또 공격했다. 원소가 기병을 보내어 순우경을 구하도록 원조했다. 조조의 측근에서 이렇게 진언하는 자가 있었다.
"적의 기병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병사를 분산시켜 그들을 감당하도록 하십시오."
이 말을 듣고 조조는 노하여 말했다.
"적이 배후에 도착하면 다시 보고하라!"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워 순우경 등을 크게 무찌르고, 그들을 모두 죽였다. 원소는 조조가 순우경 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큰 아들 원담에게 말했다.
"그가 순우경 등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내가 그의 진영을 공격하면, 그는 정말로 돌아갈 곳이 없을 것이다."
원소는 장합과 고람을 파견하여 조홍을 공격했다. 장합 등은 순우경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조조에게 투항했다. 원소의 군세는 크게 무너졌으며, 원소와 원담은 군대를 버리고 도주하여 황하를 건넜다. 조조는 그들을 추격하였으나 미치지는 못했으며, 그의 군수물자·도서·진귀한 보물 등을 전부 몰수하고, 그의 부하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가 몰수한 원소의 편지 가운데는 허현과 군중의 인사들이 원소에게 보낸 편지도 있었으나, 조조는 그것들을 전부 태워버렸다. 기주의 여러 군에서는 성읍을 바치고 투항해 오는 자가 매우 많았다.
이전 환제 때에 토성이 초나라와 송나라의 하늘 경계선에 나타났다. 요동군 사람 은규는 천문에 뛰어나, 50년 후에 진인(;천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양나라와 송나라 사이의 지역에 출현하며 그 예봉을 대적할 수 없다고 예언했다. 이때가 그로부터 50년이 되는 해로서 조조가 원소를 무찔렀으니, 천하에 조조에게 상대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6년(201) 여름 4월 황하 위로 병력을 출동시켜 창정에 주둔하고 있는 원소의 군대를 무찔렀다. 원소는 기주로 돌아간 후 다시 뿔뿔이 흩어진 병사를 거두어 자기에게 반기를 들었던 여러 군현들을 평정했다.
9월 조조는 허도로 돌아갔다. 원소는 패하기 전에 유비를 보내 여남을 공략했으며, 여남의 적 공도 등이 유비에게 호응했다. 조조는 채양을 파견하여 공도를 공격했지만 전세가 불리하여 공도에게 패했다. 조조는 또 유비를 정벌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유비는 조조가 직접 온다는 것을 듣고 유포에게로 도주했으며, 공도 등도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7년(202) 봄 정월 조조는 초현에 주둔하며 명령을 내려 말했다.
-나는 폭력과 혼란을 제거하려고 천하를 위하여 정의의 군사를 일으켰다. 옛 땅(고향 초현)의 백성들은 대부분이 사망했고, 나라 안에서 온종일 걸어다녀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비통하고 상심해 있다. 의병을 일으킨 이래, 장병의 경우 죽어 후사가 없으면 그 친척을 찾아내어 뒤를 잇게 하고 땅을 나누어 주고 관가로부터 농사짓는 소를 지급받으며, 교사를 두어 그 자식에게 교육시켜 주도록 하라. 뒤를 이을 사람이 있는 자에게는 종묘를 세워 그 선인들을 제사지낼 수 있게 해주라. 만일 죽은 자의 영혼이 있다면 우리가 사후에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이어서 조조는 준의현으로 가서 수양거(;운하 이름)를 수리하고, 사자를 보내 희생을 받들어 교현에게 제사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나아가서 관도에 진을 쳤다. 여름 5월 원소는 군대가 붕괴된 후 병이 나서 피를 토하다가 죽었다. 작은 아들 원상이 대를 이었으며, 원담은 자칭 거기장군이라 하며 여양에서 주둔했다.
가을 9월 조조는 그들을 정벌하려고 여러 차례 싸웠다. 원담과 원상은 여러 차례의 싸움에서 패하자 병사를 물리고 지키는 데만 전념했다. 8년(203) 봄 3월 조조가 여양의 외성을 공격하자 그들은 성밖으로 나와 싸웠다. 조조가 그들을 크게 무찌르자, 원담과 원상은 밤에 달아났다. 여름 4월 업성을 공격했다. 5월 허로 돌아왔지만, 가신을 여양에 남겨 주둔시켰다. 25일, 포고령을 내렸다.
-사마법에 '장군은 퇴각의 책임으로 사형에 처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그래서 조괄의 어머니는 조괄의 싸움에 패한 것을 이유로 그녀까지 죽이지 말아 주기를 빌었던 것이다. 이것은, 옛날의 장군들은 밖에서 싸움에 지면, 안으로 집안 식구들 모두가 죄를 받았다는 뜻이다. 내가 장수를 파견하여 출정시킨 이래, 공로만 포상하고 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국법에 부합되지 않는다. 지금 여러 장수들에게 출정을 명하니 싸움에 패한 군사는 죄를 받게 되고, 나라에 손실을 가져오는 자는 관직과 봉작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가을 7월 명령을 내렸다.
-전란 이래 15년간, 젊은이들은 인의예양의 기풍을 접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 점을 매우 슬프게 생각해왔다. 지금 각 군국에 명하여 학문을 닦도록 하여라. 5백 호 이상의 현에는 교관을 설치하고, 향(;현 아래 행정단위)의 준재를 선발하여 그들을 가르치고 교육을 베풀면, 선왕(과거의 성왕)의 도가 폐하는 일이 없을 터이니, 이는 천하에 이익이 될 것이다.
8월 조조가 유표를 정벌하고 서평에 주둔했다. 조조가 업성을 떠나 남쪽으로 돌아올 때, 원상과 원담은 기주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벌였는데, 원담이 원상에게 패하여 평원현으로 도망가서 그곳을 지켰다. 원상이 이곳을 재빨리 공격하였으므로 원담은 신비를 파견하여 항복하고 구원을 요청했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의심했지만, 순유는 그것을 허락하도록 권유했다. 조조는 즉시 서평에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영양에 도착하였다. 아들 조정을 원담의 딸과 결혼시켰다. 원상은 조조가 북쪽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평원의 포위를 풀고 없엉으로 돌아갔다. 동평 사람 여광과 여상은 원상에 반기를 들고 양평에 주둔했지만,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해 왔으므로 조조는 그들을 열후로 봉했다.
9년(204) 봄 정월 조조 군대는 황하를 건너 기수의 물을 막아 백구(;운하 이름)로 물을 흘러들어가게 하여 식량을 운반할 수로를 만들었다.
2월 원상이 또 원담을 공격하고, 소유와 심배를 남겨 업성을 수비했다. 조조가 원수까지 군사를 나아가게 하니, 소유는 항복했다. 업성에 도달하여 공격하면서 흙산을 쌓고 지하도를 팠다. 무안현의 장 윤해가 모성에 진을 치고 업성에서 상당으로 통하는 양도(;식량 수송로)를 지키고 있엇다. 여름 4월 조홍을 남겨 맹성을 공격하고, 조조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윤해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돌아왔다 원상의 장수 저곡은 한단을 지켰지만 조조의 군사는 또다시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역양현의 현령 한범과 섭현의 장 양기는 현을 바치고 투항해 왔으므로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5월 흙산과 지하도를 무너뜨리고 성 주윙에 참호를 파고 장수를 무너뜨려 성으로 물이 들어가게 하니 성안에서 굶어 죽는 자가 절반이 넘었다. 가을 7월 원상은 업성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왔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주장했다.
"이는 본거지로 돌아가는 군사이므로 사람들은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자발적으로 싸울 것이니 정면대결을 피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원상이 큰길로 부터 온다면 마땅히 피해야하지만. 서산을 따라온다면 그들은 나에게 포로로 붙잡힐 것이다."
원상은 과연 서산을 따라왔으며, 부수에 이르러 진을 쳤다. 한밤중에 원상은 병사를 보내 조조군의 포위망을 뚫으려 하였다. 조조는 원상을 받아 공격하여 원상의 군사를 패주시켰으며, 또 여세를 몰아 원상의 진영을 포위했다.
포위하기도 전에 원상은 겁을 먹고 이전의 예주자사 음기위 진림을 보내 항복을 빌었지만,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포위망을 더욱 죄어 들어가며 공격했다. 원상은 밤을 틈타 도주하여 기산을 굳게 지켰지만 조조 군대의 추격을 당했다. 그의 부장 마연·장기 등은 전투를 하기도 전에 항복하여 원상의 군대는 붕괴되었으며. 원상은 중산으로 도주했다. 조조의 군사는 원상의 군수 물자를 전부 포획하고, 원상의 인수와 절월을 손에 넣고는, 원상의 항복한 장수들에게 이러한 물건들을 주어 가족들에게 보이도록 하자, 성안의 전투 의지는 완전히 무너지고 상실되었다.
8월 심배의 조카 심영은 한밤중에 수비하고 있던 성의 동쪽 문을 열어 조조 병사들을 들어오도록 했다. 심배는 조조의 군사를 맞아 싸웠지만 패했다. 조조는 심배를 생포하여 참수하고 업성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원소의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고 원소의 부인을 위로하였으며, 그 집에 심부름꾼들과 보물을 보내주고, 그에게는 각종 비단과 솜을 하사했으며 관에서 양식을 제공하도록 했다.
당초에 원소가 조조와 함께 병사를 일으켰을 때, 원소는 조조에게 물었다.
"만일 이 대사를 성공시킬 수 없게 된다면 어느 곳을 근거지로 삼을 수 있겠소?"
조조가 말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원소가 말했다.
"나는 남쪽으로 황하에 의지하고, 북쪽으로 연·대를 의지하여 융적의 군세를 합치고, 남쪽으로 천하의 패권을 다투면 아마도 성공할 수 없지는 않겠지요?"
조조가 말했다.
"나는 천하에서 지혜롭고 용감한 자에 의지하여 왕도로써 그들을 다스리면 틀림없이 가능할 것입니다."
9월 포고령을 내렸다.
-황하 이북은 원씨 가족이 일으킨 난리로 피해를 입었으므로, 올해의 세금은 내지 말도록 명한다.
그가 또 권세있는 자들이 토지를 겸병하는 것에 관한 법령을 엄하게 다스리자 백성들은 매우 기뻐했다. 천자는 조조에게 기주목을 겸직하도록 했지만 조조는 직위를 사양하고 반납했다.
조조가 업성을 포위할 때, 원담은 감릉현·안평현·발해국·하간국을 공략하여 빼앗았다. 원상은 싸움에서 패하여 중산국으로 돌아갔다. 원담이 또 원상을 공격하자 원상은 고안현으로 도주하였으며, 그 결과 원담은 원상의 군대를 거두어들였다. 조조는 원담에게 편지를 보내 약속을 위배한 것을 질책하고, 그와의 사돈 관계를 끊어 원담의 딸을 돌려보낸 이후에 진군하였다. 원담은 두려워하며 평원현을 떠나 도주하여 남피를 지켰다. 12월 조조가 평원현으로 들어갔으며 또 부근의 여러 현을 공략하여 평정시켰다. 10년(205) 봄 정월 조조가 원담을 공격하여 그 군대를 격파하고 원담을 참수하고 그의 처자식을 주살하자, 기주가 평정되었다. 조조는 포고령을 내렸다.
-원씨와 함께 나쁜 일을 한 자도 잘못을 고치고 새로운 시대로 출발하도록 허락한다.
또 백성들에게 사사로운 복수를 하지 말고 사치스러운 장례를 금하도록 명령했으며, 이를 어기는 자는 모두 법령에 따라 처리했다.
이 달 원희대장 초촉·장남 등이 반란을 일으켜 원희·원상을 공격하자, 원희와 원상은 삼군의 오환족에게로 도주했다. 초촉 등은 현을 바치고 투항했으며 조조는 이들을 열후로 봉했다. 처음 원담을 토벌할 떄, 백성들 중에서 얼음을 깨 배가 지나가도록 하는 일을 않고 도망간 자가 있어 투항해도 받아들이지 말라고명령했다. 오래지 않아 도망간 백성들 중에 군문으로 출두하여 자수하는 이가 있었는데 조조는 그에게 말했다.
"네가 명령을 어겼다고 들었다. 만일 너를 죽인다면 자수하여 죄를 시인한 사람을 죽인 것이 될 것이니, 돌아가서 깊숙한 곳으로 스스로를 숨겨 관리들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하라."
이 백성은 눈물을 흘리며 떠났지만 후에 결국 체포되었다. 여름 5월 흑산의 적 장연이 그의 부하 10여 만 명을 이끌고 투항하였으므로 열후로 봉했다. 고안 사람 조독·곽노 등이 유주자사와 탁군 태수를 죽였다. 삼군의 오환족이 광평현에 있는 선우보를 공격했다. 가을 8월 조조가 이들을 정벌하여 조독 등을 참수하고, 곧이어 노하를 건너가 광평현을 구원하자, 오환은 변방 밖으로 재빨리 달아났다. 9월 조조가 명령을 내렸다.
-서로 아부하여 결합된 무리들이 두루 친하는 것은 고대의 성인들이 몹시 한탄했던 것이다. 듣건데, 기주의 풍속은 아버지와 아들도 당파를 달리하여 서로 명예를 훼손시키며 비방한다고 한다. 옛날에 직불의(한의 신하)는 형이 없었는데,세상 사람들은 그가 형수와 사통한다고 말했고, 제오백어(후한의 신하인 제오륜)가 세 번째 아내로 아비 없는 딸을 맞이하자, 그를 부인을 겁탈하는 늙은이라고 말했으며, 왕봉(한의 대장군으로 외척)이 권력을 휘둘렀는데도 곡영은 그를 신백(주나라 선왕의 신하로 외척)에 비유했고, 왕상(한의 신하)은 충성스러운 의론을 서술했지만 장관은 그를 정도를 왜곡시키는 사람이라 했다. 이것은 모두 흰 것을 검은 것이라 하고,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기만하는 것이다. 나는 풍속을 가지런히 정돈하려고 하는데, 위의 네가지 폐단이 제거되지 않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겨울 10월 조조가 업성으로 돌아왔다.
처음에 원소는 조카 고간을 병주목으로 임명했지만, 조조가 업성을 합락시켰을 무렵 고간은 투항하였고, 조조는 곳 그를 자사로 임명했다. 고간은 조조가 오환을 토벌한다는 것을 듣고 병주를 들어 잔란을 일으키고 상당태수를 위협하여 병사를 풀어 호관 입구를 지켰다. 조조가 악진과 이전을 파견하여 그를 공격하도록 하자, 고간은 후퇴하여 호관성을 지켰다.
건안 11년(206) 봄 정월 조조가 고간을 정벌하러 갔다. 고간은 이 소식을 듣고 별장을 남겨 성을 수비하도록 하고 흉노에게로 달려들어가 선우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선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조는 호관을 포위한 지 석 달 만에 함락시켰다. 고간은 결국 형주로 도망갔지만 상락 도위 왕염이 체포하여 참수시켰다.
가을 8월 조조가 동쪽으로 해적 관승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는데, 악진과 이전을 파견하여 순우를 공격해 격파시켰다. 관승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 도망갔다. 동해군 가운데 양분현·
담현·척현을 떼어 낭야군을 확충시키고 창려군을 없앴다. 삼군의 오환은 천하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유주를 공략하였으며, 한나라 백성 모두 10여 만 가구를 약탈했다. 이전에 원소는 그들을 부락의 우두머리를 선우로 세우고 한 집안 사람의 자식을 자기 딸로 삼아 그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요서의 선우 답돈은 세력이 특히 강하였으므로 원소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 원상 형제는 그를 투항시켰다. 답돈은 변방을 자주 침입하여 피해를 주었다. 조조는 장차 그를 토벌할 생각을 하고 운하를 파 호타로부터 과수로 통하게 하고 평로거라고 명명했다. 또한 고하의 입구로부터 노하까지 운하를 파서 천주거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다와 통했다. 12년(207) 봄 2월 조조가 순우에서 업성으로 돌아왔다. 5일, 명을 내렸다.
-나는 의병을 일으켜 포악한 반란군을 정벌하였고 지금 19년이지났는데, 정벌할 때마다 반드시 승리한 것이 어찌 나 개인의 공로이겠는가? 이는 곧 모두 현명한 사대부들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는 아직 완전하게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현명한 사대부들과 함께 그들을 평정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공로의 대가를 한 사람이 누린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겟는가? 시급히 공로를 결정하여 봉작을 행하라.
따라서 대대적으로 봉작을 행했으며, 공신 20여 명을 모두 열후로 봉했다. 그밖의 사람들도 각기 공적순서에 따라 봉작을 받았다. 또 전사자의 자식들에게도 각기 가볍고 무거운 차등을 주어 특별한 대우를 했다. 북방으로 가서 삼군의 오환을 정벌하려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원상은 도망친 포로에 불과합니다. 오랑캐 족속은 탐욕스럽고 친애하는 마음도 갖고 있지 않는데, 어찌 원상에게 이용당할 수 있습니까? 지금 적지로 깊숙이 침입하여 정벌한다면, 유비는 반드시 유표를 설득시켜 허도를 습격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변란이 생긴다면 후회해도 소용 없습니다."
오직 곽가만이 유표는 유비를 반드시 임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조조에게 원정을 권했다. 여름 5월 조조가 무종현에 도착했다. 가을 7월 큰 홍수로 해안가의 길은 불통되었지만, 전주가 길안내하기를 원했으므로 조조는 그를 따라갔다. 군대를 이끌고 노룡의 변방을 나왔지만 변방 외각은 길이 끊어져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5백여 리에 걸쳐 산을 파고 계곡을 메꾸며 백단을 지나 평강을 거쳐 선비족의 영토를 건너 동쪽의 유성에 이르렀다. 유성으로부터 2백 리 떨어진 곳까지 이르러서야 적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상과 원희는 답돈, 요서의 선우 누반, 우북평의 선우 능신저지 등에게 수만 명의 기병대를 인솔하여 조조의 군대를 맞아 사우도록 했다.
8월 백랑산에 올라 갑자기 적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적의 병력이 매우 많았다. 조조의 군수물자 수레는 후방에 있었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매우 적었으며 좌우에서 따르던 자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조조는 높이 올라가 적진이 정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는 곧 병사를 지휘하여 출격하였으며, 장료를 선봉으로 세웠다. 적의 병력은 한순간에 붕괴되고 답돈이 명왕(관명) 이하 간부를 죽였다. 호족과 한족의 항복한 사람은 20여 만 명이나 된다. 요동의 선우 속복환 및 요서·북평의 우두머리들은 동족을 버리고 원상·원희와 함께 요동으로 도망갔지만, 여전히 수천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본래 요동태수 공손강은 먼 곳을 거점으로 하고 조조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조조가 오환을 무찌르자, 그대로 그를 정벌하면 원상 형제를 잡을 수 있다고 진언자는 자가 있어 조조가 말했다.
"나는 지금 공손강에게 원상과 원희의 머리를 베어 보내도록 할 것이오. 다시 번거롭게 군사를 움직이지 마시오."
9월 조조가 병사를 인솔하여 유성에서 돌아왔다. 공손강은 즉시 원상·원희 및 속복환 등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전해왔다. 장수들은 의아스러워 하며 질문했다.
"공께서는 돌아왔는데, 공손강이 원상·원희의 머리를 베어 보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조조가 말했다.
"공손강은 평소부터 원상 등을 두려워했다. 내가 엄한 태도를 보이면 힘을 합치고, 잠시 공격을 느슨하게 하면 서로 싸웠다. 이런 형세는 당연한 것이다."
11월 역수에 도착했다. 대군의 오환족은 서우대행 보부로와 상군의 오환족으로 선우대행 나루가 이끄는 명왕을 이끌고 축하하러 왔다. 13년(208) 봄 정월 조조는 업성으로 돌아와 현무지를 만들어 수군을 훈련시켰다. 한 왕조는 삼공의 관직을 폐지하고 승상과 어사대부를 설치했다. 여름 6월 조조를 승상으로 임명했다.
가을 7월 조조가 유표를 정벌하러 남쪽으로 갔다. 8월 유표가 죽자 그의 아들 유종이 대를 이어 양양에 주둔했으며, 유비는 번성에 주둔했다. 9월 조조가 신야에 도착하자 유종은 결국 항복했으며, 유비는 하구로 도주하였다. 조조는 강릉으로 진군하여 형주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그들과 더불어 다시 새롭게 출발할 것을 명령했다. 곧바로 형주를 평정시킨 공적을 논하여 열다섯 사람을 열후라 했으며, 유표의 대장 문빙을 강하태수로 삼아 원래 병사를 통솔하도록 했으며, 형주의 명사 한숭과 등의 등을 기용했다. 익주목 유장은 처음으로 역부의 징집을 받아들여 병사를 파견하여 군대에 제공했다.
12월 손권이 유비를 위하여 합비를 공격했다. 조조는 강릉에서 유비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했으며, 파구까지 와서 장희를 파견해 합비를 구조하도록 했다. 손권은 장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곧 도주했다. 조조는 적벽에 도착하여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크게 유행하여 관리와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14년(209) 봄 3월 군대가 초에 도착했다. 조조는 가볍고 빠른 배를 만들어 수군을 훈련시켰다. 가을 7월 와수에서 회수로 들어가 비수로 나와 합비에 진을 쳤다. 신미일에 명령을 내렸다.
-근년 이래로 우리 군대는 자주 출정을 나갔지만, 간혹 역병을 만나서 관리와 사졸들 가운데 목숨을 잃고 돌아오지 못한 자가 발생하자 가족들은 매우 원망하게 되었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떠돌고 있다. 어진 사람(조조 자신)이 어찌 이와 같음을 기뻐하겠는가?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은 자가 있는 집 가운데 기본 재산의 부족으로 인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에게 현의 관리는 창고에서의 지급을 끊지 말라. 장리는 그들을 구휼하고 위로하여 나의 뜻에 부합되게 하라.
양주의 군현에 장리를 설치하고 작피에 둔전을 개설했다. 12월 군대는 초현으로 돌아왔다. 15년(210) 봄 명령을 내렸다.
-예로부터 천명을 받아 창업을 하거나 나라를 중흥시킨 군주로서 일찍이 현인과 군자를 얻어 그들과 함께 천하를 통치하지 않은 자가 어찌 있겠는가! 군주가 현명한 사람을 얻는 것은 일찍이 여염집에서 나오지 않았거늘 어찌 요행히 서로 만나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