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난 무척 힘들었다. 몸도 무척 아팠을 뿐 아니라 마음은 무언가를 할 의욕을 상실했다. 아무도 만나기 싫었고, 세상에 나 혼자만이 있다고 생각하며 버텼다. 난 그렇게 하루 하루 시간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난 다짜고짜로 여행을 떠났다.
가고자 하는 곳도 없었고, 며칠간 여행할지 계획 또한 없었다. 그저 떠났다. 여행에는 목적이 있게 마련인데 아무런 목적이 없었다. 나를 찾겠다든가, 좋은 명승고적을 답사하겠다든가, 맛있는 토속음식을 먹겠다든가 모든것이 나를 구속하지 못했다. 신문에서 여행사 광고를 보고, 날짜가 맞는 곳으로 떠났다. 그렇게 훌쩍 집을 떠났다.
도착한 곳은 고베였다. 난 고베가 어디에 붙어있는 지도 모르고, 그저 일본중에 어느곳 이라는 것만 알았다. 도착하니 날씨는 흐렸다. 이따금 비도 오고 했다. 길거리에 사람은 많았지만 거리는 청결했고,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거리를 활보했다.
비수기에 여행사를 통해서 일본을 찾아온 여행객은 나를 포함하여 일곱사람이었고, 난 혼자였다. 그네들은 날씨에도 맞지 않는 하와이안 셔츠와 잠자리 선그라스를 끼고 연방 사진기 렌즈를 드리밀며 이곳 저곳을 구경했다. 나는 돈을 냈기 때문에 같이 다니긴 했지만 아무것도 눈여겨 보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걸어다녔다. 다른 여행객과도 인사만 나눌 뿐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나를 바보 사이코 아니면 정보기관의 스파이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난 거리를 두었다. 풍경과 사람과 모든것들을. 혹시 모른다. 그들이 나에게 거리를 두었는지도.
여행은 2박 3일이었고, 이튿날 오후에 여행사에서는 자유시간을 주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여행객들은 호텔 지하 카지노나 온천, 백화점을 찾아 떠났다. 난 호텔방에서 잠이나 잘까 생각했다. 하지만 침대에 눕자 머리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옭아맸다. 한국에서도 떨치지 못한 수많은 잡념들이 일본에 온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난 마음이 딱딱해졌다. 그리고 호텔을 나와서 무작정 버스를 탔다.
버스는 한참을 빙빙 돌더니 시 외곽지대로 나갔다. 난 조금은 무서워져서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공장들이 즐비했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난 그냥 길을 따라 쭉 걸었다. 습도가 높아서 그런지 이내 땀이 났고 난 숨을 깊게 들여 마셨다. 그리고 그 순간 냄새를 맡았다. 바다냄새였다.
난 뛰어갔다. 그리고 해변가에 도착할 때 쯤 해는 이미 다져서 저녁 어스름이 찾아왔다. 해변가 근처에 슈퍼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골랐다. 맥주 3캔과 과자 부스러기들을 샀다. 그리고 해변가에 앉았다.
바다는 한국에서 보던 바다와 다르지 않았다. 약간은 쌀쌀하게 바다는 그렇게 있었다.
난 무섭지 않았다. 어떻게 호텔로 돌아갈지 따위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냥 이곳에서 사그라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난 벌러덩 모래에 누워서 하늘을 보았다. 아직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난 가방에서 CDP와 책을 꺼냈다. 그리고 'The Girl from Ipanema'를 연속재생해서 들었다. '백년의 고독'을 펴놓고 있었지만 책 글씨가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으니까. 이파네마 아가씨만이 내 귓속에서 계속 걷고 있었다. 배터리가 다 달아버릴 때까지.
그리고 그녀가 찾아왔다. 그녀는 저쪽 둔치 너머에서 맥주병을 하나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에게 일본어로 물어봤다. 아니 물어봤을 것이다. 난 적잖이 놀랐지만 영어로 'I can't speak japan'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가볍게 웃더니만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여전히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그녀에게선 모닥불 냄새가 났다.
그녀는 내가 사온 과자도 주워 먹으면서 계속 이야기 했다. 난 처음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나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난 한국말로 말했고, 그녀는 내 말에 일본어로 대답했다.
난 내 어린시절부터 현재까지, 내 첫사랑과 첫키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관해서 주저리 주저리 풀어놓았다. 그녀는 아마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표정을 바꿔가며 내 이야기에 곧잘 대답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에 내가 대답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대화했다.
그녀는 그레이진에 짙은색 자켓을 입고 있었고, 약간은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바닷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내가 산 캔맥주와는 다른 상표의 맥주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마시면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주 밝지도 그렇다고 우울한 표정도 아닌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굴은 약간 귀여운 편이지만 치아가 좀 고르지 못했다. 하지만 난 그저 그녀와 이야기하는게 좋았을 뿐이다.
그렇게 한시간 가량 떠들었을까? 어느순간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앉아있었다. 꽤 긴 시간동안 파도 소리를 들었고, 그녀에게서 났던 모닥불 냄새는 점점 희미해졌다. 난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났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고 안으로, 안으로 울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들이 너무나 야속했고, 내가 이곳에 있다는게 너무나 미웠다. 그리고 옆에 한국말도 할줄 모르는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 그녀가 있다는게 너무나 슬펐다. 난 울었다.
울음이 잦아질 때 쯤 그녀는 날 안았다. 그리고 나지막히 '울지마'라고 서툴은 발음으로 말했다. 그녀가 '울지마'란 말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난 모른다. 지금도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알게 되었는지 한국인 친구가 있는지 한국어에 관심이 있었는지 추측조차 할 수 없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일본어에 한국어로 '울지마'란 발음과 비슷한 말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있었다. 따뜻했다. 우리 위로 별이 몇개 떠 있었고, 내려 놓은 CDP 이어폰에서는 아직도 이파네마 아가씨가 해변위를 보사노바 스텝으로 폴짝 폴짝 걷고 있었다. 그녀의 귓언저리에서는 모닥불 냄새가 났다. 차아 차아 파도 소리가 모닥불 냄새와 뒤섞여 내게 울렸다.
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의 서늘함에 일어나보니 그녀는 없었다. 난 그녀의 흔적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날 두고 그냥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아니 그녀가 있었는지 조차 확신할 순 없었다. 난 주섬주섬 일어나 어제 갔던 슈퍼가 문을 열길 기다렸고, 슈퍼 아줌마에게 손짓 발짓 다해가며 나의 사정을 설명했다. 이윽고 호텔 전화번호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근처 호텔에 전화를 해서 행방불명된 한국인 여행객이 묵고 있는 호텔을 수소문 했나 보다. 그렇게 난 다시 호텔로 돌아왔고, 그 날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제 불현듯 작년 이맘때 고베 해변가에서 만난 그녀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 따스함과 이파네마 아가씨가 생각났다. 조금은 쓰던 맥주와 모래가 들어가 버석거렸던 과자들, 그리고 모닥불 냄새. 모든게 잊혀지지 않았다는 걸 난 느꼈다. 그리고 해변가에서 그녀와 부둥켜안은채 잠이 들었을 때 어렴풋이 예전에 사랑했던 그 사람을 만났다는게 기억났다.
왜 하필 그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와 난 다시 만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