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천) 삼가 장터 3ㆍ1만세운동 :비문
1919년 기미년 음력 2월 17일(3월 18일) 삼가 장날에 백산의 이원영(李愿永), 상백의 오영근(吳永根) 정연표(鄭演彪) 정각규(鄭恪圭) 공민호(孔敏鎬)와 가회의 한필동(韓弼東)을 중심으로 삼가 장날에 모인 주민들이 합세한 가운데, 정연표 한필동이 정금당(淨襟堂)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5백 명 주민들이 함성으로 소리높여 연창하며 삼가 시장을 누비고 주재소를 포위했다. 합천경찰서에서는 경찰과 재향군인들까지 동원하고 주재소 일경과 합세하여 무자비한 폭력으로 애국 열사들을 체포 구금하는 등 밤 8시경에 강제로 해산시켰다.
1차 독립만세 운동 후 가회의 윤병모(尹炳謨) 윤규현(尹圭鉉) 윤재현(尹在鉉) 김태현(金台鉉) 허정모(許正模) 최용락 김홍석(金洪錫)과 백산의 이계엽(李啓燁) 이상동(李相東)은 다음 장날에 다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삼가 백산 상백 가회 대병 봉산 대양 용주 대의 신등 생비량의 유림 및 유지들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거사 계획을 수립했다. 변용규(卞容圭) 최영기(崔永基)와 백산면 주민들은 백산면사무소(운곡리 소재)를 불 지르고, 가회 및 생비량 등 인근 주민들은 농악을 울리며 행진하면서 삼가 장터로 집결하고, 상백의 공재규(孔在奎)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오영근 진택현(陳宅賢) 정원규(鄭元圭) 정치규(鄭致圭) 등과 더불어 주민들을 규합하여, 상백면사무소(평구 2구 소재)로 가서 면장에게 만세 삼창을 하게하고, 전주대를 넘어뜨려 통신을 마비시킨 후 삼가 장터로 집결하는 등 3만여 명의 애국 민중들이 삼가 장터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했다.
일제(日帝)의 혹독한 강압정치에 분연히 항거하고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주민들이 삼가 장터에 구름처럼 모여들자 의령 대의의 김전의(金典醫) 정방철(鄭邦哲)과 김달희(金達熙)가 일제타도(日帝打倒)와 대한독립의 당위성에 대해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다. 마지막 연사인 임종봉(林鍾鳳)에게 총격을 가하자 이를 보고 분노한 주민들은 몽둥이와 낫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주재소와 면사무소, 그리고 우편소로 노도(怒濤)처럼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함성을 지르자, 다시 진주헌병대의 헌병과 경찰들이 일제히 총격을 가했다. 주재소와 면사무소 앞마당은 피바다로 변했고, 그날의 만세소리와 함성 및 참상의 처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날이 기미년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이었다.
순국자는 공재규 윤성현(尹聖鉉) 박선칠(朴仙七) 김기범(金箕範)을 비롯하여 40여 명이 되고, 옥고를 치른 사람은 이계엽 오영근 윤규현 정연표 정각규 공민호 한필동 등 50여 명, 부상자는 임종봉 등 150여 명으로, 삼가 장터 만세운동은 그 참가인원의 규모와 운동의 격렬함, 그리고 경찰과 헌병에 의한 살육과 탄압해산에 의한 피해가 막대했고 시기적으로도 앞섰으며, 유관순(柳寬順)의 아우내 만세운동과 함께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거사였다.
모든 일에는 그 원인과 현상, 미래에 계승되는 것이 있으니 삼가 장터 기미 만세운동의 그 대강을 살펴보면, 가까운 원인으로 동서고금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제국주의 일본이 우리 대한제국을 강제늑탈한 후 자행한 극악무도한 헌병통치와 고종황제의 독살소식, 그리고 동경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및 불교 기독교 천도교 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기미 3·1만세운동과 곽종석(郭鍾錫) 김창숙(金昌淑) 김복한(金福漢) 등 유림대표 137인의 파리장서사건이 있으며, 국외적 원인으로는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러시아혁명과 약소민족대표자회의 등이 있다.
일찍이 삼가(三嘉)는 삼기현(三岐縣)과 가수현(嘉樹縣)을 합한 유서 깊은 고을이었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해 합천군 삼가군 초계군이 통폐합되어 합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이곳 삼가는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고향으로 합천과 의령지역 등은 임진왜란 때 그의 제자인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 남명학파 제자사숙(弟子私淑)인들이 경의(敬義)사상을 바탕으로 한 의병(義兵) 창의(倡義)와 눈부신 활약을 하여 국난 극복을 이룩한 중심지였다. 그러나 1623년 소위 인조반정 후 서인과 노론으로 이어지는 일당전제와 지역차별 등이 심화되자 1728년 이를 타파하기 위한 지역민들의 봉기로 인해 반역향(反逆鄕)으로 매도되어 중앙정계에서 배제되자 지역민들의 울분과 분노는 증폭되었다. 노론의 세도정치로 망국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일어난 1862년 진주농민항쟁과 1960년 3·15마산의거 등도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 분연히 일어서는 삼가의 기미 만세운동과 그 훌륭한 정신적 계승에서 서로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기미 3·1만세운동은 국외적으로는 반식민지 독립운동에 횃불이 되어 인도의 스와라지 운동과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예로부터 “선현(先賢)과 조상의 훌륭한 정신과 업적도 제자와 후손이 뛰어나야 그 빛을 발할 수 있다.”고 했다. 광복 일주갑(一週甲)인 오늘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感)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선조들의 우국충정과 어떠한 불의의 세력에도 분연히 항거하고 정의에 앞장서서 순(殉)하는 정신을 새롭게 기리면서 자손만대로 지켜 이어지기를 바라며 이를 새겨 세우니, 우리 나라와 민족 및 동방의 등불에서 나아가 천하만민과 세계평화의 등불이 될 것이다.
을유년(단기 4338년, 민국 87년, 서기 2005년) 8월 15일
삼가 장터 3ㆍ1만세운동 기념탑 건립 추진위원회 세움
글 철학박사 權仁浩, 조각 충북대 교수 柳坰沅, 그림 세종대 교수 李斗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