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빈치 코드 깨기 *
* 진실 혹은 거짓
우리는 지금 역사상 스스로 가장 지혜롭고 자신감있는 세상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당당함이란 정말 어떤 사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사람들이 같도록 만들 정도이다. 그 선상에 댄 브라운과 가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댄 브라운은 서문에서 매우 분명하게 사실(Fact)임을 강조하며 시작하였다.
“1909년에 설립된 유럽의 비밀 단체, 시온 수도회는 실제로 존재하는 조직이다. 파리 국립 도서관은 1975년에 기밀문서로 알려진 양피지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아이작 뉴턴, 보티첼리, 빅토로 위고, 레도나르도 다 빈치를 포함한 수많은 시온 수도회의 회원들 이름이 있었다.”(다빈치 코드1, 9)
이같은 당당함은 1988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 “예수의 마지막 유혹”을 개봉하였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스콜세지 감독은 영화의 첫 장면에 매우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밝혔었다.
“이 영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므로 허구이고 특정종교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혀둡니다”
하지만 댄 브라운의 입장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스콜세지의 표현과 달리 는 마치 진실을 밝히려는 전사의 의지가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댄 브라운은 인터뷰를 통하여서도 강력하게 사실에 근거했음을 주장한다. 그러니까 음모로 감춰져 있었던 진실을 파헤친다는 입장에서 접근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영화 홈페이지에서 강조하는 것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지금까지 믿어왔던 역사가 완전히 뒤바뀌는 거지. 이건 인류의 믿음이 걸린 전쟁이야.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전 세계가 걷잡을 수 없는 충격에 휘말릴지도 몰라.”
이처럼 당당하고 자신감있는 표현앞에서 우리는 단순하게 자신의 소설과 영화의 흥행을 노리기 위한 판매 전략 정도로 무시할 수도 있다. 실제로 댄 브라운이 사용하는 소설기법은 팩션(fact+fiction/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처음에 댄 브라운은 단순히 팩션 기법을 가지고 소설을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브라운의 입장은 사실에 무게를 두고 발언한 것이 사실이다. 다음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댄 브라운의 입장을 알 수 있다. 2003년 11월 3일 방영된 ABC 방송의 “Good Morning America"라는 프로그램에서 진행자 찰스 깁슨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처음에 다빈치 코드를 쓰기 위하여 관련 자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실 여부에 상당히 회의적이었습니다. 처음 이 책을 위하여 조사할 때에는 그러한 가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을 수없이 방문하고 2년 동안 관련 내용을 철저히 조사하고 나서는 오히려 그런 가설이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바로 이 책이 과거 오래동안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사실을 소설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2005년 6월 방영된 ABC 리포터 엘리자베스 바가스와의 프로그램에서도 댄 브라운은 `다빈치 코드`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학자들을 상대로 조목조목 근거를 대며 자신의 주장을 편다. 책에서 설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속 성배에 대한 진실, 다빈치가 그랜드 마스터로 있었던 시온 수도회라는 비밀조직에 대해 자료조사를 통해 얻은 증거를 제시하고, 심지어 예수의 후손으로 알려진 싱클레어 가문을 직접 찾아가 만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댄 브라운은 바가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도 처음엔 마리아 막달레나와 성배에 관한 이론에 대해 회의적으로 접근했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러나 조사를 끝낸 후 이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며 예수 결혼설과 성배 이론을 강하게 지지하였다.
* 조심스러운 접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 것에는 흔쾌히 찬성할 수 없다. 포스트 모던 시대에 자유로운 창작활동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상영금지 반대같은 것들이 기독교의 편협함으로 오해되거나 오히려 그 영화를 홍보하는 효과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가장 큰 피해 대상인 오푸스데이의 반응 역시 심각하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톨릭의 오프스데이는 에서 예수와 막달라마리아의 후손(성배)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해치는 조직으로 등장하지만, 직접적 대응보다는 간접적 ‘훈계’만을 했다.
당연히 우리 교회는 이 정도의 영화 때문에 호들갑을 떨지않아도 될만큼 교인들의 신앙적 역량을 키워야하고 나름대로 문화적 대응력을 높이는 미디어 교육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영금지 운동을 하는 그룹을 무작정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표현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표현과 경고가 필요한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지 문제라면 단순한 반대가 극단적인 표현이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선으로 보이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상영금지 반대하는 그룹보다는 상영금지 요청하는 이들을 비웃거나 “다빈치 코드 정도 가지고...”라는 낙관적 시각을 띄는 그룹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분명 문제없는 것일 수 있지만 동시에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논쟁
지금의 상영금지 요청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이런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더욱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이해를 돕기 위하여 2002년도 있었던 상영금지 반대운동할 당시를 논쟁들과 결과들을 가지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원래 이 영화는 1988년 제작되었고 수입이 시도되었으나 개신교계의 반발로 실패로 끝났다가 다시 상영이 시도되었다.
이때 기독교계 특히 한기총은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였지만 기각되었다. 2002년 이 개봉되었을 때 영화는 매우 큰 반응을 일으켰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동안 기독교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하던 사람들이 봇물처럼 말하기 시작하였고 반응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때도 지금처럼 매우 심각하게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보수 기독교계는 반응을 하였고 영화를 영화 그대로 보자는 움직임도 교회안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한 목사는 이 영화에 대하여 “기독교를 비판하겠다는 목적을 갖는 영화도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의 격렬한 반대는 “민주주의에서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인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고 결국 “문화시대의 개방성에 역행하는 행동으로 한국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인식을 강화할 소지”를 준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지적은 오늘에도 똑같은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분명 옳은 지적처럼 보인다. 상상력에 기초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개방성을 가질 때 세상은 오히려 기독교에 호감을 갖게 될지도 모르는 것인가 하는 의견이 설득력을 지닐 수도 있다. 특히 예수의 인간됨에 대한 부각은 기독교에 대한 호감을 이끌게 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 다른 목사는 한 일간지에 실은 글에서 영화가 그려낸 예수의 이미지에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삶의 유혹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예수의 모습에서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낀 것만은 감추고 싶지 않다”는 말을 피력한 다. 사실 이런 논리 전개는 새삼스러운 입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기독교안의 논쟁들과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된다고 본 것은 이같은 영화를 본 비기독교인들의 반응때문이었다. 한 일간지의 기자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이전보다 기독교에 더 가까워졌다는 느낌은 확연하였다”라고 말을 하였다. 여기가 문제의 자리였다. 그러니까 그 기자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깝게 느껴졌다고 하는 기독교는 어떤 내용의 기독교였을까하는 점이다. 그는 정말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통로를 이 영화에서 발견하였다는 말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에 가까워졌다는 말은 기독교가 아니라 유사기독교에, 예수가 아니라 왜곡된 예수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시내산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은 후, 그 금송아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이미 하나님이 아닌 것처럼 그 기자가 가깝게 느낀 예수는 금송아지와 같이 더 이상 예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이와같은 논쟁을 보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 영화가 가지고 있는 왜곡된 지식때문이고, 그 왜곡된 지식은 분명히 일반 비기독교인들이나 초신자들에게 당연한 이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댄 브라운의 경우 의 주장을 사실이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화니까 간단하게 대응하려고하던 반응으로 끝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무작정 대책없이 방관할 수 없게된 것이다. 만일 댄 브라운이 말하는 것이 단순히 상술이 아니라 그가 말한 것처럼 사실이라면 그토록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이면에 깔려있는 음모는 없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역사적 예수와 예수 게임
우리가 조금만 유의해서 살펴보면 댄 브라운의 와 같은 주장들은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같은 주장과 꼬리를 물은 논쟁은 크게 세가지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역사적 예수 논쟁
-이단 기독론 논쟁
-예수 게임식의 논쟁
첫째는 신앙고백과는 별도의 역사적 예수 논쟁이고 두 번째는 신앙고백과 관계된 논쟁이다. 이 논쟁은 초기 교회 아리우스 논쟁과 같이 기독론 논쟁이었고 이단과 유사기독교 그리고 정통 기독교의 구분이 되는 논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선데이서울과 같은 자료를 가지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결론적으로 는 세 번째 부분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의하는 것은 그 주장을 첫 번째 논쟁이나 두 번째 범주의 논쟁으로 끌고 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기총등의 보수 기독교 그룹의 반대가 격렬한 이유도 바로 이단논쟁으로 결부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의깊게 살피지 않으면 역사적 예수 논쟁을 하는 사람들조차 예수 게임 방법론을 무심코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 신학대학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예수가 행했던 오병이어 기적에 대한 모 교수의 해석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신 것이 아니라 한 어린 아이가 자신이 먹어야 할 오병이어를 주님께 내어놓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들이 몰래 감춰두었던 떡과 고기들을 내어놓아서 나눠 먹었기 때문에 오천명이 먹고도 12바구니가 남을 수 있었다고 하는 해석이다.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이야기처럼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이 얘기를 말하는 사람은 강하게 주장할 뿐만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설득당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접근은 역사적 예수를 밝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폴 마이어가 주장한 예수게임(복음서를 바탕으로 예수에 대한 전체적 윤곽을 그린 후 나머지는 자기 마음대로 왜곡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이어야 한다/참조: 폴마이어, 다빈치 코드 진실인가? 허구인가?, 14-15)과 같은 성격이 짙은 것이다.
앞의 오병이어 접근 역시 예수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앞에서 설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과 함께 S.G 브랜든(S. G. F. Brandon)은 그의 책 "Jesus and Jealots"에서 예수를 급진적인 혁명가로 묘사했고, 존 M. 알레그로(John M. Allegro)는 "The Sacred Mushroom and the Cross"에서 예수가 환각성분이 있는 광대버섯을 먹고 취해있는 상태에서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만들어진 가공인물이라고 주장했다. 호주의 도노반 조이스(Donovan Joyce)는 "The Jesus Scroll"에서 예수가 골고다에서 살아남았고 80세까지 살았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예수게임들은 신학적 근거를 가진 논쟁이라기 보다는 가십성 상상력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같은 접근은 성서속의 궁금중에 초점을 맞춘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야기, 청년시절이야기, 궁금한 유다와의 관계, 3년동안의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었을 것 같은 상상들, 이해할 수 없는 기적들... 이렇게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내용들은 상당히 많이 존재할 수 있다. 그것들은 모두 소설과 이야기의 소재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어간 것이다. 물론 역시 이런 예수 게임에 근거한 것이다.
* 왜 다빈치 코드를 말하려 하는가?
에 대하여 말하려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복음적 관심 때문이다. 즉 불신자들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를 본 불신자들이 자신의 가정에 있거나 친구들일 경우 그들이 던지는 의혹스러운 질문 앞에 대답을 하기 위함이다. 단순히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물음을 던지는 자들에게 대답을 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아직 를 본 자들의 결과물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이전 이 상영되었을 때 반응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한 일간지의 기자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이전보다 기독교에 더 가까워졌다는 느낌은 확연하였다”라고 말을 하였다. 여기가 문제의 자리였다. 그러니까 그 기자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깝게 느껴졌다고 하는 기독교는 어떤 내용의 기독교였을까하는 점이다. 그는 정말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통로를 이 영화에서 발견하였다는 말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에 가까워졌다는 말은 기독교가 아니라 유사기독교에, 예수가 아니라 왜곡된 예수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시내산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은 후, 그 금송아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이미 하나님이 아닌 것처럼 그 기자가 가깝게 느낀 예수는 금송아지와 같이 더 이상 예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 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든지 영향이 있을 것이란 얘기이다. 미국의 바나연구소가 지난 18일에 발표한 “Da Vinci Code Confirms Rather Than Changes People’s Religious Views”에 의하면 조지 바나는 약간은 낙관적으로 설명하였지만 전 미국 인구의 5분의 1인 5500만명이 를 접했고 그중 24%가 “영적 성장과 이해”에 심각하게 혹은 어느 정도 도전을 받았다고 반응하였다. 그러니까 영적인 분야에 긍정이든 부정이든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어진 조사결과 중 눈여겨볼 대목은 5%의 반응이다. 그 5%는 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바뀌게 하였다고 대답한 것이다. 5%라면 약 200만명 가량의 인원인데, 잠재적 크리스천으로 이루어진 미국이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주의깊게 관찰해야 할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