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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회 특집

최명진 |2006.07.09 21:12
조회 50 |추천 0

100회 특집

나의 일대기. 1부

1984년 4월 19일 나는 해운대 어떤 산부인과에서 태어난다.  산부인

과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 나지 않는다.

그저 해운대 산부인과라고 들어왔고 지금까지 그렇게 기억한다.

어릴 때의 특별한 사항으로는 나의 장이 좋지 못했단 것.

항상 그랬다. 특히나 내가 지금보다 어릴 때는 더욱 강조하여 어머

니께서 그러셨다.

“명진아, 너는 장이 나쁘단다. 그래서 엄마 젖도 일찍 떼고…”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는 소젖을 먹고 자란 소새끼(?).

그리곤 기억이 나는 건 안락동에 살았던 기억이고, 기억엔 없으며

사진이 기억하는 건 서면 어느 집에서 살았던 기억이다.

내 유아기의 안락동은 참 많은 사연이 있는 동네였다.

사연이라니까 거창하지 사실은 그냥 이런저런 사건들이었다.

우선 내 유아기 사건을 하나하나 기억 나는 것들로 구성해 보겠다.

첫째, 강구.

쉽게 바퀴벌래라 아는걸 우리집에선 강구라 불렀고, 분별력이 없던

어린 나는 그게 표준어라 생각했다.

내가 아장아장 기어(?)다닐 때였다.

우리집 대청에 강구 한 마리가 뽀로록~ 기어가드랬다.

그때 마침. 움직이는 것에 많은 관심을 보이던 나는… 냅다 손을 뻗

어서 그것을 퍽! 잡았다.

그리곤 유아기 어린이들이 다들 하듯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곤… 볼것도없이 씹어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딱딱한건 날개였다.

날개두짝을 웃으며 입에서 꺼냈다고 한다.

활짝 웃으며…  난 믿지 않는다. 날 놀리려는 우리 가족의 계략이라

고 생각한다.

둘째, 병아리.

우리집은 가끔 병아리를 키웠다.

주로 내가 국민학교(그땐 그렇게 불렀다.)에 입학하기 전에 키웠

다.  형(나보다 3살이 많다.)이 국민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오는길에

병아리를 사와서 기르는 경로로 우리집은 병아리를 길렀다.

하지만 우리집은 다른집과 좀 다른 경향이 있다.

그건 바로 키워서 먹는다는 점이다.

대략 3회정도 길렀는데 1회를 제외하곤 지극정성으로 길러서 성숙

한 닭을 만든 다음에 먹었다.

기르는것도 참 열성적이었다.

어릴때 어머니께 주워들은 말로는 병아리일 때 졸면 죽는다는 것이

었다.

그래서 얇고 긴 몽둥이를 준비해서 유치원을 마치고 오면 항상 병아

리들 앞에 앉아서 졸면 대가리를 툭~ 툭~ 때려서 깨우곤 했다. 
그렇게 때리기만 했느냐. 그것도 아니다.

어릴땐 쌩쌀을 먹을 수 없단 얘기를 듣고 쌩살을 친히 잘근잘근 뽀

도독 뽀도독 씹어서 주곤 하였다.

그리고 아침마다 동네 밑에있는 밭에(밭이 있어서 촌동네라 생각하

면 오산이다.)가서 배추를 뜯어와서, 솔직히 허락없이 가져와서,더

욱 솔직히 훔쳐와서 주곤 하였다.

그렇게 잘 먹어대니 이놈의 병아리들은 금새 벼슬이 나고 금새 장성

했다.

그렇게 장성한 녀석들은 별별 희안한 행위를 해가기 시작했다.

새벽이면, 어른키 두배는 되는 나무에 어떻게 올라가서 울어재끼는

것이다.

미쳤나 싶었다. 날지도 못하는 것들이 어떻게 그 높은곳엘?

옥상에서 뛰어내려서 나무에 착지했다고 생각하기엔 닭대가리가 그

리 썩 좋진 못하단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닭들은 본분을 잃고 수시로 우리집 개를 폭행하기도 했으며

새벽마다 시끄럽게 굴기도 했으니 필히 사형에 처해야 했다.

집행자는 언제나 우리 할아버지.

닭을 잡는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닭의 목을 두손으로 욺켜 잡으신 할아버지의 양손에 힘이 들어가나

싶더니 순간 284도 정도 회전을 하고는 뚝! 뜯어 버렸다.

대가리 몸통이 일체형이던 닭이란 개체가 순간 이체되어 따로논다.

푸드득 푸드득도 잠시.

험한꼴을 못보게하시던 할아버지덕에 털뽑히는 광경은 못봤다.

한시간즘뒤, 닭은 백숙이 되어 나의 피와살이되어 현재까지 함께하

고있다.

그럼여기서 잠깐.

3회중 2회를 먹었으면 1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

기 마련이다.

앞서 말했듯이 닭들은 날았다.
어린마음에 닭은 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래서. 좀 큰 병아리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혹독함을 못견디고

죽어갔다.

그저 높이 던져서 푸드득거리게 만들다.

이것들이 익숙해지면 옥상에서 낙하했다.

몇회엔 살더니 결국엔 죽어버렸다.  어린마음에 상심이 컸다.

엄마도 상심이 컸다. 조금만 더 컸으면 튼실한놈하나 먹나했었다고

한다.

이 닭고기가 아주 특이하여 아까울 가치가 있었다.

먹어온 모이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노마가 닭이다~ 싶으려면 허한 흙 모래 요런건 안먹는다.

먹이는 음식중 제일로 치는 몇가지가 있었는데, 영양만점 지렁이!

언제나 비온뒤 좀 험한동네였던 우리동네 흙에선, 항상 지렁이들이

숨을쉬기 위해 땅위로 기어올라와서 병아리들의 목구멍으로 넘어가

곤 했다.

좀 씹어서 삼키지 싶은 아쉬움이 항상 감돌았지만, 그래도 잘먹었다.

그리고 여름철 파리!

옥상에 천지로 날라다니는 파리들. 우리 병아리들은 날 수 없었기

에, 너무 느렸기에 그 날아다니는 초코렛들을 못먹어 항상 아쉬워했

다.

그리하여 나는 방역도 할 겸 모이도 줄 겸 해서 붉은

“피의파리채”를 들고 척살을 해대면, 우리 파트너 병아리 1,2 는 냅

다 달려와 경쟁하듯 먹어댄다.

하지만 과식은 금물이다. 모가지가 새카맣게 부풀면 그만둬야 했다.

더 이상 먹었다간 큰일나는 수가 생긴다.

하여튼 이리도 좋은 생식을 해대고 내게 쫓겨 뛰어다닌 병아리들은

장성하여, 훌륭한 고기로 변신해 지금 내 뼈와 피와 살이 되어 함께

한다.

병아리얘긴 이정도만 하자.  이제 개로 넘어가자.

셋째 똥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집엔 개가 있었다. 불과 주택에서 2층집

으로 옮기기 전에만 해도 있었으며, 항시 개를 사랑했다.

생각나는 개는, 어렴풋이 짱구(제일 짬을 먹었다.), 가장 많은 추억

이 있는 짠주(성깔이 더럽다), 진돌이(대한민국 똥개 100마리중98

마리 이름이 진돌이란다.), 깜순이, 등등등…..

여튼, 우리집은 똥개만 키웠다. 이름만봐도 안다.
메리~ 요론거는 똥개에게 사치라고 생각한다. 그저 무식한 이름을

지어다 주었다.  그만큼 무병장수했고..

이제 그놈들 하나하나와의 추억을 더듬더듬 해보련다.

어째뜬. 짱구.

그놈의 개는 짱구는 못말려 훨씬 이전에 세상에 선보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래서 솔직히………. 나로선 별 기억이 없다.

집안의 말을 좀 빌리자면…  영리하다고 했다.  똥개 주제에 손달라

면 손을 주었고 발달라면 발을주는 영특함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진에서 새하얗게 보였다.

그리고 나의 1:9 가르마를 탄 어린시절 모습 옆에 있던게 생각난다.

그게 다다.

그리고 진돌이. 진돌이는 깜순이와 비슷한 시기에 굴러들어온 놈이

다. 진돌이는 우리 형의 개이며, 깜순이는 나의 개였다.

덩치가 너무너무 큰 진돌이와, 새카만거 빼면 아무것도 볼것없는 우

리 깜순이.

깜순이는 내개란 이유로 형에거 숱한 구박과 괄시를 받으며 자랐으

며 어느순간 팔려나갔다.

새카만게 팔려나갈줄 알았다.  그것도 헐값에…  덩치도 작았다.

그리고 진돌이…  정말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개였다.

개라면 자고로 무식하며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있어야 한다.

죽도록 뚜드려패도 새우깡 하나에 눈녹듯 살살 녹아서 꼬리치는 그

런 개가 진정한 애완견이자 식용견으로 안성맞춤이다.

그렇게 쪼매난 내가 등치 산만한 개를 괴롭혀도, 밥주는 아줌마 아

들인걸 어떻게 알고는 진심으로 잘해주었다.

고맙다. 그 진돌이란개.

내가 이렇게 장성한걸 안다면 행복해 하겠지(?)

그개는 그랬다. 물고문과 빗자루 몽뎅이 고문에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아주 사랑스런 개였다.

그러던 어느날. 궂은날은 계속되고, 산만한 똥개가 집에 돌아다니며

개냄새를 풀~ 풀~ 풍기자 우리 어머니의 심기가 불편하셨다.

왜! 왜! 왜! 하필!!!!  내가 보는 앞에서 개장수가 지나가고, 그걸 어머

니가 들으셨을까.

당장 뛰어나가 개장수를 불러 새우신 어머니는 능숙하게 몇번 튕기

며 값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때당시 디스가 800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13만원에 우리 무식한 똥개는 팔려갔다. 영양탕으로.

난 그때 결심했다.  절대 영양탕을 먹지 않기로.

그리고 난 상심이 너무너무 큰 바람에 뛰었다.  동네 어귀에 아주 으

슥한 곳으로.

사나이가 울고 또 울어도 아무도 모를만큼 으슥한 곳으로.

한참을 울었을까. 눈탱이가 탱~ 탱~ 부었을무렵 그만해야겠구나

싶어서 눈탱이 옳게 될때까지 안울고 놀았다.

내가 사랑하던 똥개가 팔렸단 사실을 까맣게 잊고서… 아주 행복하

게…  사악하리만큼 행복하게…ㅎㅎㅎ

그리고 짠주.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우리집 똥개중에 똥개.

짠주.

그녀는… 쏘가지가 너무 못되먹었다. 튕김도 심하고 나보다 쌀밥도

더러운 것이 너무 못되먹었다.

그래서…  난 많이 응징해줬다.

ㅜㅜ 생각해보니 난 애완동물을 참 많이 괴롭혀 주셨다.

한날은 이것이 새끼를 쳤다. 어디서 바람나서 애비가 누군지도 모를

새끼를 한부대나 낳아놨다.

근데 귀여웠다.  눈도 안뜬게 뽈뽈거리며 어미의 젖을 찾아다니는

꼬라지가 귀여웠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이것을 좀 만져봐야겠다 싶어서 손을 개집으로

집어 넣었다.

그때!!!

으르릉!!! 하며 내손을 덥석하고 물었다.

그것도 똥개가! 불독이나 도사견 정도는 되야 병원가서 개가 물었다

그러지.

똥개였다. 그깟 똥개가 날 문것이다.  그리하여 난 병원이고 뭐고 없

이 그냥 괴롭혔다.  ㅡ.ㅡ 솔직히 피도 안났다. 살짝 입을 갖다 댄 것

이다.

여튼! 아무리 미물이라도 새끼 깠을땐 담요라도 덮어주는게 미덕이

 

라지만, 어린나는 거기까진 못미쳤다.

그래서 괴롭혔다.

그리고 여러가지 엽기 행각을 일삼았다.

 

개주제에 옥상에서 똥을 싸고는 똥꼬를 땅에 질~ 질~ 끌고 다니며

깔끔을 떠는 것이다.

꼴사납고 보기흉해 그때그때 난 응징해줬다.

그리고 허구헌날 당한 그녀는 정말정말 엽기행각을 벌였다.

어머니가 그녀를 옥상으로 유인한뒤 길목을 차단하고 내가 새끼들

을 데리고 좀 놀았던게 화근이 되었다.

내가 유독 귀여워 만지작 거린놈을 그녀가 물어 죽이고 꿀떡 삼킨것

이다. 한마디로 개가 보신탕을 먹은 진리다.

그것도 웰빙인 날것으로.

그때부터 느꼈다. 아… 그녀는 무섭구나.

그뒤로 그녀와 눈도 안마주치며 동맹을 맺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짠주가 없어졌다.

그리고 또 엄마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목장에 양때들 양치러 갔다고… 그말에 속기엔 난 너무 자랐었다.

양치기 소년이란 책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내용과 별 상관없다)

난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울진 않았다.

난 다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당시나이 대략 6살)

개도 키웠겠다 닭도 키웠겠다. 이젠 도전이 필요하였다.

흔하지 않은걸 길러야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우리가족은 고심한 끝에 남생이를 선택했다.

넷째 남생이.

쉽게 자라나, 거북이로 오해하는 비슷하게생긴 남생이 말이다.

처음엔 두마리였는데 한마리는 엄마가 절에 다니는 관계로 언젠가

절에서 방생이란걸 하는 시즌에 금정산 어느 개울물에 풀어줬다. 지

금쯤 많이 컸을텐데…

어쨌든 한마리,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기르기 시작했다.

이름은 없었다.

이름을 불러봐야 쳐다도 안봤으므로.

그러고보면 우리 가족은 참 계산적이다. 부를 필요가 없는 생물에겐

이름이 없었다.

꽃도 마찬가지고.

하여튼 그놈은 대략 10년을 길렀다.

그간에 바퀴벌래도 먹고, 거미도 먹고, 개미는 기본이며, 송사리, 사

마귀까지 섭렵하며 웰빙으로 잘 먹었다.

그리고 나와의 관계도 썩 좋았다.

그녀석이 내 손가락을 물고 늘어지기 전까지는.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남생이 등딱지에

끼어있는 이끼를 가족 누군가의 칫솔로 깨끗하게 닦아 주었으며…. 

폐활량이 걱정되어서 잠수를 오래오래 시켜 주었으며… 심심할까봐

얘기도 자주 나누었으며…

하여튼 우린 잘 지냈다.

하지만 항상 불만이 있었다. 한창을 얘기하고 들여다보면 이녀석은

그냥..  눈만 껌뻑.

그럴때면 뭍으로 꺼내놓고 질책을 하곤했다.

대가리를 툭 치면 대가리가 쑥~ 들어간다.  그럼 집이좁은 그녀석

의 뒷다리는 쑥~ 나온다.

그럼 난 뒷다리를 툭 치면 대가리가 쑥~ 나온다.

그걸 한 백번즘하면 애가 지친다.

그게 벌이었다.  난 그러다 손가락을 물리고 우린 또 대화없는 사이

가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들어가면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아파트.

물이 바뀌었다. 물에사는 생물에게 물은 소중한 것 같았다.

평소 먹던물이 바뀌니까 죽었다.

당연히 사랑하던 그놈이 죽었으니 묻어줘야 했겠지만…

다 큰 나로서는 귀찮아 그냥 3층에서 내다 보이는 소나무 숲으로 돌

려보내곤 자연으로 돌아갔다고 스스로 합리화 했다.

그리고 우리가 키운 것으로는 새도있다.

이건 별로 할말이 없다.

구관조며, 하얗게 보였다.

솔직히 돈주고 산건 아니다.  어느날 날개가 뽀사져서 우리집에 날

라 들어왔고…  우리는 날개에 빨간약과 후시딘을 병행하여 발라주

었고, 우리에 가둬서 키웠다.

그렇게 우리집의 새가 된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날개 병신인 이녀석을 믿고 방심했다가 푸드득

~ 하고 날라가 버렸다.

어머니에겐 너무 불쌍해서 보내줬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이녀석 어디선가 날 생각하고 그리워 하

겠지 싶은게 뿌듯하다.

그리고 도마뱀.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시절 우리 안남 국민학교에는 도마뱀이 유행

을 하였다.

자기집에 도마뱀 한두마리 없으면 사람취급을 못받았다.

그리하야 나는 맘맞는 친구놈 하나와 온천천을 이잡듯이 뒤져서 도

마뱀을 수마리 건졌다.

가끔 자신의 꼬리를 끊고서 꿈틀거리는 그것을 먹고 날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뛰었지만… 난 속지 않았다.

초등교육을 받는 지성인이었기에.

어쨌든 난 그녀석들과 잘 지냈다.

그녀석들의 집은 `전지와전구세트` 라는 노란 가방이었다.

(초등학교 과학관련과목 준비물) 한날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난 도마뱀을 기르는걸 관두게 되었다.

그 노란가방을 살짝 열어서 우리 도마뱀들이 잘 자라나 확인하려는

그순간!

준비하고있던 한놈이 확~ 튀어나온 것이다.

깜짝놀라서 난 뚜껑을 닫아버렸고 모가지가 그놈은 꼈다.

그리고 입을 딱 벌리곤 요상한 소릴 냈다.

무서웠고 징그러웠다.  그래서 그만길렀다.  솔직히 집안의 반대도

너무 심했고 하여서 포기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지천에깔린 개미.

개미 왕국을 한번 구현해 보려는 유아기때의 열정으로 개미를 모았

다.

투명한 병에 모래를 한가득 담아두고 개미를 수백마리 잡아다가 넣

었다.

내가 생각하던 왕국의 형태는 없고 스트래스 받은 놈들은 서로를 죽

이기 시작했다.

결국 하루가 지나면 시체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불교인 우리집의 뜻에따라 그만두게 되었다.

이렇게 나의 애완동물 일대기는 마무리 지어야겠다.

하나 아쉬운게 있다면…  파리나 모기등을 못길러본게 아쉽다는 얘

길 남기고 싶다.

여기서 잠깐…  여기까지 읽은당신… 정말 수상하다.

정말 심심한가??  여튼 이야기는 계속된다.

다음으로 다룰 주제는… 처음이란 주제다.

처음이란…  첫사랑, 첫키쓰, 첫뽀뽀, 등등등 많다.

생각나는 것 요것 저것을 한번 정리해 보겠다.

첫 뚜드려 맞음.

소싯적부터 어머니께 맞은거는 빼고… 좀 충격적으로 처음 맞은거

는 형에게였다.

내가 중학교 3학년, 형이 고등학교 3학년. 우리둘의 몸무게는 대략2

0Kg정도 차이가 났지만…  항시 친구처럼 지냈기에 그런 체형의 갭

은 무시하고 살았다.

하지만 어느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땡깡을 좀 부렸다.

형에게… 그랬더니 그날따라 좀 흥분한다.

난 분위기파악 못하고 더 땡깡을 부렸다.  설마 동생을 치기야 하겠

어?

쳤다.

귓방망이에 아구지를 때려 강냉이를 턴건 아니지만..

멱살이 잡히고 궁지로 몰려보니 뚜드려 맞은 것 보다 훨씬더 위협적

이었다.

그래서……  다시는 절대로 안까불었다.  그일이 있은 이후론…

여지껏 동생이라 봐줬던건가보다…  빠뜨릴뻔 했는데…

난 참 소심한 인간이었던 것 같다.

그때 형과 삐져서 대략 반년을 말도 안하고 살았다.

말이되는가?  한집에서 사는데 반년을 말을 안하고 살았다는게..

나도참 끔찍하리만큼 답답한 인간이다.

군대안갔음 큰일 날 뻔 했다.

첫사랑~

애석하게도 난 첫사랑이 없다.

첫사랑이라 믿었던게 와르르 무너져 내렸는데… 차마 쪽팔려서 말

은 못하겠고… 그냥 난 아직 사랑을 모른다.

그래서 첫사랑 보다는 풋사랑~ 이란 주제로 얘길좀 하려 한다.

때는 바야흐로 초등학교4학년?

김모씨의 딸을 사모하게 되었다.  참 어이없게도 별 기억이 없다.

그냥… 편지좀 쓰고… 통화좀 하고… 것말고는 기억이 안난다.

그냥 혼자 보고싶고, 같이있고싶고 그런 감정을 처음느낀 사람이라

고 해야 할까?

좀 이른감이 없지않게 팍팍 들지만…  그래도 참 순진허니 풋풋하니

꽤나 오래갔던 것 같다.

6학년 졸업할 때 가슴아팠으니… 대략 3년은 갔다.

징하다… 그 콩만한기 뭘 알고 그리도 좋아라~ 했을까…  무슨 소

나기 에 나오는 등장인물도 아니고…  그때 일기를 좀 잘써뒀더라면

좋았을텐데… 지금 참 아쉽다…  어땠을까 싶은 궁금증 때문에…

그리고… 첫 여행.

제주도다… 여행다운 여행은 제주도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물론 군에 입대하고는 사시사철 한달이 멀다하고 산좋고 물맑은데

로 뛰어다녔지만…  그전에는 제주도다.

청소년기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단돈 10만원들고 배표끊고

자전거 빌리고 묵어가고 먹고, 참 어떻게 살았는가 모르겠지만 하여

튼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제주도 푸른밤에 별똥별을 보았으니 나의 청소년시절은 허무하지

않았다고 과감히 말하겠다…

첫 시험.

자격증 같은 첫 시험을 나는 초등학교때 봤다.

워드프로세서.  요즘은 누구나 갖고있는 흔하디 흔한거였는데… 그

때까지만해도 그리 흔하지만은 않았다.

특히나 초등학생이…  무슨 사법고시나 되듯이 열심히 하여서 필기

와 실기를 한방에 패쓰한 수재였다.

지금은…  역학의 큰 벽앞에서 좀 시련을 겪고 있지만…

소싯적엔 수재였다…

첫이별(?) 난 이별이 참 애매한 인간이었다.

뭐 어떻게 어떤식으로 헤어졌나 거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냥 직접 얼굴보고 “헤어져!”하고 헤어진적이 없는건 확실하다.

거의 문자질이나 전화질로 헤어졌다.

바보같다..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그래서 앞으로 누군갈 사귄

다면 꼭 얼굴보고 얘길하고 헤어져야겠다.

그게 소심한 나의 꿈이다…

첫뽀뽀.

좀 빨랐다.

남들보다… 대략 7살 유치원 국화반때였다.

증거물이 아직도 집 어딘가에 있다.  다혜란 친구였다.  생생하다.

얼굴은 앨범보면 기억이 난다.

생일날 사진을 찍기위해 사랑은 눈꼽만큼도 없는 그런 형식적인 뽀

뽀였다!!!!

내 첫경험을 그렇게 허락하는게 싫었던, 비싼남자였던 나는 사진에

서 아주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지금 다시했음 좋겠다.  것도 좀 알 때 해야 좋지…  안그런가??

첫구입.

아마 고등학교때였다.

뭐 돈좀 나가는걸 처음 구입한건 고등학교때 처음으로 친구와 돈을

합해서 산 오토바이 일 것이다.

그거사고 이래 저래 말도 탈도 많았지만… 그래도 재밌는 시간이었

다.  그것 때문에 죽을뻔도 여러~~번 했지만…

가끔은 보고싶을때가 있다…  제대로 한번 꼴아박하서 폐기처분 해

버렸지만…  너무 맘에드는 녀석이었다.

사랑스럽기도 했었고… 내가 앉으면 어찌나 씽~ 씽~ 잘 달리던

지…  아직도 빠등~ 빠등~ 하고 떨리는 기분이다…

고때 생각에 잠시 또 쪽팔린다…  125cc짜리가 무슨 뿅카나 되듯이

타고 다녔으니… 얼마나 흉했으랴…

첫싸움.

기억나는 첫 싸움은 초등학교 아주 저학년때 였다.

어느 교회 비슷한곳에 가게 되었는데… 우리형과 옆집형 이렇게 셋

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시덥잖은 녀석이 와서 깝쭉깝죽 대는데 형들은 걔가 너

무 어려서 뭐라 하지도 못하고… 뒤를 봐줄태니 죽도록 까란 얘기를

내게 해주었다.

난 앞뒤 가리지 않고 댐볐다.

정신차리고 보니… 다들 말리고 있었다… 까는 정도가 과했다 그런

다…  사람은 싸우면 안된다고 그때 느꼈다.

그래서 앞으로도 싸울 계획은 없다.  요즘엔 싸움도 돈이 있어야 한

다.

첫담배.

이것도 남들보다 일렀다.

유치원시절…  근데 자꾸 이렇게 얘기하면 난 아주 불우한 유아기를

보낸지 알겠지만… 나 나름대로는 아주 유복하게 자랐다고 생각한

다.

정말 난 유복하고 즐거운 유년기를 보냈다.

어쨌든… 처음으로 담배를 핀거는 유치원시절.

형과 놀던도중 우리형이 담배한번 피워보라 그랬다.

그것도 꽁초로…  피다 만 꽁초는 다시피면 맛이 참 떫고 쓰다.

그때는 그런건 모르고 그냥 담배가 뭔지도 모를 나이였다.

그래서 형의 꾀임에 넘어가 피웠다.

한번 쭉~ 들어마시고 죽을뻔했다.

기침을 한 100번을 하고는 형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친형이 맞나 생각도 했고…  내가 100번 기침하는동안 우리형은 배

꼽잡고 웃고 있었다.

그때 결심했다… 나 다시 담배피면 소새끼다…

정확히 7년뒤에 다시핀다…  맞다 난 소새끼다… 앞서 얘기한듯이

난 소젖을 먹고 자란 소새끼다~~.

처음 물에 빠짐.

솔직히 물에 빠진적은 많다.  하지만 정말 내 발이 닿지 않는 깊이에

긴장되게 빠져본건 나 중학교때.

그때가 절정이었다.

우리가족과 아버지 친구 가족들 총 3가족 정도가 계곡에 놀러를 갔

다.  바위 위에서 내려다보니 물이 참 맑았다.

내가 거기 서면 기껏해야 무릎팍에나 올까 하는 정도의 수심 이었

다.  그래서 뛰어내렸더니 몸이 쑥 빨려들어가 수면이 저~ 위에 있

었다.

자맥질을 한창 했다.  그때 우리 형의 모습이 보였다.

다급한 내 표정이 웃겼나보다… 내가 똥줄이 탈 때 우리형은 항상

웃었다… 배꼽잡고…

그리고 몇차례 더 자맥질을 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보인다…

 

우리아버지 비디오 카메라로 찍으신다…

유전인가보다… 핏줄이 위험하면 즐거운건 유전인가보다…

난 그때 결심했다… 독하게 살아야겠구나…

그래서 정말 풀을 잡고서 바위를 기어 올라왔다.

소심한 나는 그날 가족들과 얘길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다.  물에빠져 죽을뻔한 기억.

그리고…… 이제 처음으로 뭐 할만한게 없다.

거기까지가 내 처음이다…

사회생활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언급이 되었으니 군생활에 대해서

어느정도 언급이 필요 하겠다.

나는 04-73006849라는 군번을 가진 대한민국 육군병장 만기전역을

한 자랑스런 대한건아다. 라고 소개하고 싶지만 솔직히 누구나 다

하는거라서 별로 자랑꺼리도 안된다.

그냥 특공대라 남달리 했다 뿐이지 부질없다.

얘기를 풀어가 보련다.

2004년 2월 3일… 나는 의정부에있는 306보충대로 내발로 걸어갔

다.  친구 두놈이 같이 동행해 주었다.

그날 헤어지면서 태웠던 마지막 담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한달하고 한주동안 담배를 필 수 없다는 압박감도 있지만…그걸 떠

나서 친구와 이별을 한단 사실이 얼마나 섭하던지…

지금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얘길 한다만 그땐 참 암울했다.

우리를 수십열 횡대로 세우더니 뒷편 스텐드에 있는 가족들에게 인

사를 시키고는 이상한 강당으로 끌고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들은 첫마디

“씨팔!!  사회물 덜빠졌지…  안뛰어!!!??”

그렇다… 난 군대에 온 것 이었다.

그렇게 2박 3일을 똥쌀 시간도 안주는 그곳에서 굴렀다.

훈련소를 가면 좀 덜하려니 하는 기대로 버텼는데 나의 자랑스런 5

사단 훈련소는… 똥쌀시간은 물론이고 씻을 시간조차 할애하지 않

았다… 그리하야 난 엄청난 일을 벌이기도 했고…

우선 내가 입대한 5사단 훈련소에는 나와 비슷한 기수에

“이민우”가 있었다.  탤런트다..  왕으로 자주 나오고 카이스트 나오

는 사람이다..

처음본거는 식판들고 지나가다 툭 부딪혀서 “죄송합니다”하고 얼굴

을 봤을 때 그양반이 듣기만하던 “연예인”이었다.

헐렁하고 볼품없는 군복에 빵모자 귀도리 씌워놓으면 다 똑같을 줄

알았던 그는 후광이 비쳤다…  하여튼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항상 새벽시간에 이 글을 조금씩 쓰는 관계로 정신이 혼미

한 나는 그 똥얘길 까먹을까봐 지금 써야겠다.

변비는 우리 훈련병의 적이었다.  난 사회에서 변비에 변자도 모르

고 살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나는 군인이었다.  빡빡하게 짜여진 일과대로 생활

하다 보니 똥쌀 시간은 일과에 없어서 변비에 걸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야간종교행사가 있던 어느날…  법당으로 이동하던 도중 신호가 급

하게 온 것이었다. 신호로 따지자면 쌔빨간 적신호였다.

난 조교에게 침착하게 1차로 어필했다.

대답은 “도랐냐?”

난 돌지경이었지 돌진 않았다.

그래서 참았다.  그리고 몇분후……  반은 돌았다…

그래서… “조교님!!!!  너무 급합니다!!!”

“너 돌았지… 그렇지?”

“예 정말 돌겠습니다… 꼭 좀 보내주십시오!!!”

 

그랬더니 어처구니 없어서 보내줬다.
대략 2.3초만에 모든 거사가 끝나자 2.4초 되던때 난 고민을 시작했

다.

휴지가 없었다.  빌어먹을 휴지가 보급이 안나왔던 것 이었다.

조교놈들이 다 삥뜯어 썼던 것 같다.

하여튼… 난 주변을 아무리 뒤져도 휴지는 없었다.

긁을 껀덕지도 없었다…  푸세식이라 휴지들은 모두 똥통 안으로 골

인~ 정말 당황스러웠다.

주머니를 한창 뒤적거리다 찾은 것… 바로… 손수건…

군에서 보급나온거 잃어버리면 큰일 난다는 소릴 들었지만…

지금 큰일이 났으므로 난 손수건으로 처리를 해버렸다.

그 뒤로 내 주머니엔 항상 휴지가 있었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화생방…

난 화생방 해봐야 그냥 눈좀맵고 코좀 따갑고 말겠거니 하고 편하게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막상 교장에서 풍겨오는 그 향기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우선은 대기했다….  뭐든간에 대기하는게 더 마음졸이기 마련이다.

막상 대학시험도 그렇고, 미팅가서도 그러며, 화장실에서 조차 그렇

다고 난 자신할 수 있다.

하여튼 미미하게 풍겨오는 향기를 맡기 40여분…

그러다 막상 우리조의 차례가 되어서 들어갔다.

물론 처음에는 방독면을 쓰고서 들어간다.  하지만 내 손이나 살갛

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부분은 모조리 따가웠다.

한번도 그렇게 넓은 부위가 따가운 기억은 없었는데…  아니다 어릴

때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때를 밀어주실때면 온 삭신이 따가웠다. 

미리 대비하라고 훈련시킨건가?

하여튼 그렇게나 공포를 먹고 있었는데 어느순간 조교가 방독면을

벗으란다.

난 숨을 참고 벗을 생각을 했다.

벗어!

벗어란 구령에 차라리 바지를 벗고 싶었지만 방독면을 절차에 따라

서 해체했다.(절차는 까먹었다.)

숨을 참았다.  무식하게 참았다.  군가를 시키고 난리를 떨어도 나는

꾹 꾹 하고 참았다.

그러다 나는 한계에 다다랐으며, 또 궁금하기도 하여서… 조금.

아주조금 들여마셔 보았다.

“흡~”

아악~~~  더 이상은 호흡이 내맘대로 안되었다.

기침이 미친듯이 나오며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미치기를 몇분이었을까… 

 

“써!” 란 구령에 다급히 쓰고는 밖으로 도망치듯이 나왔다.

그리곤 바로 벗었는데…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물이 질질 흘러나왔

다.

눈물 콧물 침.

3종세트다.  그꼴을 들어가기 전에 안보고 들어간게 다행이다.

그꼴을 봤다면 나는 들어가기 전에 겁먹고 죽었을 수 있다.

그렇게 화생방은 나를 괴롭히고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기억나는건 사격.

처음 들어본 총성.  충분히 두려움이란 존재에 대해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고요한 교장속에서 단발의 총성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나는 신병 교육대대에서 20발중에 총 12발을 맞춰서 가까스로 합격

하는 아주 보잘 것 없는 훈련병이었다.

하지만 자대에 가서 행하게 된 사격에서는 100발중 97~8을 맞추는

나름대로의 스나이퍼였다.

지금도 난 표적에 대해서 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외엔 하늘을 보면서 잠든 나날들. 근무를 서게 되면서 한 고향생

각과 가족생각 친구생각.

내 군생활에서는 그다지 순탄하지 않은 일들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

해 보면 나에게 해가되는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잃은게 있다면, 첫사랑에 대한 좋은기억, 누군가에 대한 믿

음들……

난 이번에 좀 어두운 주제는 피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것도 방금.

그래서 그 얘기는 하지 않으련다.

 

 

 

 

 

 

1부는 접자..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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