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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 -반구정- 여행을 떠나요!!

황명희 |2006.07.14 23:42
조회 36 |추천 0


     -  풍수지리 -

 

청백리의 대명사인 黃喜(1363~1452) 정승은 조선 초기의

명재상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풍수지리 세계에서는 황희정승을

태어나게 했다는 명단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래서 풍수지리를 배우거나 관심있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답산을 하는 곳이다. 황희 정승의 조부 묘는 남원시에서

서쪽으로 비홍재를 넘어 순창으로 가는 24번 국도 변에 있는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산촌 마을 뒷산 중턱에자리 잡고있다.

산촌 마을 앞 국도에서 동쪽으로 산촌 마을 뒷산을 유심히

바라보면 묘소가 보인다.마을을 통과하여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상하장으로 여러 기의 산소가 보이는데

제일 위쪽에 있는 묘가 황정승 조부의 묘이다.

여기 묘를 쓰게 된 인연이 있다.황희 정승의 아버지인

황군서가 고려말에 전라북도 장수로 귀양을 왔는데

장수 현감이 황군서를 귀찮게해,남원으로 와서 지금의

관한루원에 서제를 짖고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살았다.

그런던 어느날  스님이 머리에 콩대를 매어 놓은 채 잚은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는 도중 황군서 집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와 뜻이 통하는 친한 시이로 오부자의 신후지지를 잡아

주기로 약속하고 미리 시주를 많이 받아 불사를 사용하는데

사용했다.나옹대사는 오부자의 신후지지를 잡기 위해 여러

차례 답산을 하였지만 비록 용을 찾기가 쉬우나 재혈이 어렵다.

말대로 대명당을 찾기는 했으나 정확히 재혈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 여러 차례 답산을 하여 재혈을 하게 되어 혈자리를 표시해

두고 오부자를 찾아 갔는데 마침 오부자가 출타 중이었다.

그때 오부자의 아들들이 그 동안 시줏돈만 받아 가는 나옹대사에

대해 심한 악감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명당을  쓰기 위해 산채

(山綵산신제를 지낼 때  태우는 비단)값으로 많은 돈을

아들에게 요구하다가  봉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때에 황군서는 제자들을 도움을 받아 산채 값을 마련하여

주고 나옹대사에게 얻은 명당에 자신의 아버지인 황균비를

이장하였다. 이후에 황군서의 부인에게 태기가 있었는데

장차 아이를 큰 인물로 키우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고 하여

당신의 서울인 송악(개성)으로 이사를 했고,황희는 고려말인

공민왕 12년에 개성에서 황군서의 둘때 아들로 태어 났다.

 

   -반 구 정-

 

한가지 재미난 것은 갈매기 구(鷗)자를 써서 만든 정자가 황희의

반구정을 만든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황희 정승이 희끗희끗한 나이가 되어 갈매기를 벗하며 남은

세월을 몽땅 다 보냈다는 임진강.그때,황희 정승은 노을에 물들어

붉은 주름을 또르르 말고 있는 저 임징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자신이 죽고 난 뒤 500여 년쯤이 지나면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갈라질 것을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황희 정승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앞으로  닥쳐올 민족의

아픔을 일찍감치 달래기 위해 남북을 자유스러이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동무 삼았는지 모른다.그저 임진강을 둘둘이 말은

철조망만 바라보아도 가슴에 가시가 파고드는 것처럼 아프다.

임진강 너머 북한으로 지는 해가 해가 고요한 강물 위에 바알간

한숨을 울컥울컥 토해내는 것만 같다..

 

세조 때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호를 따서 한강변에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 (지금의현대아파트11동 뒷편)도 있었다.

하지만 황희의 반구정은 갈매기와 벗한다는 뜻이 있었지만,

한명회의 압구정은 갈매기를 누른다는 뜻이었으니,어찌 청백리

황희 정승과 세도가 한명회를 비교할수 있겠는가.

반구정 주변에는 볼거리도 많다.애써 시간을 내어 방구정에

갔다면 가까이 있는 임진각연과 임진가,도라전망대,율곡 이이의

한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자운선원

(경기도기념물 제45호)통일공원 판문점,제3땅굴.도라산역까지

둘러보는 것도 여행을 즐기는 나그네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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