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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Allure 에서...

국립발레단 |2006.07.26 00:28
조회 56 |추천 0


스튜디오에 먼저 도착해 그녀들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바깥쪽으로 45도쯤 벌어진 길고 가는 다리가 어떤 무브먼트를 그려낼지 은근히 기대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세 여인은 화장기 없이 말간 얼굴을 하고, 커다란 소파 위에 나비처럼 앉아 있었다. 한 발 늦었다. 통유리 창으로는 어슴푸레한 저녁 빛이 내려앉기 시작했고, 천장이 높은 스튜디오에선 약간의 한기가 느껴졌다. 4월 중순에 시작되는 공연 의 세 주역인 김주원, 홍정민, 윤혜진. 한 작품에 출연하지 않았다면 한 앵글에 담을 이유가 없을 만큼 각자의 캐릭터가 짙은 세 명의 발레리나였다. 셋 중 맏언니인 김주원을 남겨두고, 홍정민과 윤혜진이 먼저 메이크업실로 들어간다. 혼자 남겨진 김주원은 두꺼운 코트를 꽁꽁 싸맨 채, 히터 온도를 최고로 올려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더니 검은색 플랫 슈즈에서 발을 빼내어 소파 위 다리 사이로 쏙 집어넣는다. “추운가요?” “네… 많이요.” 순간, 내가 뭔가 크게 잘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발레는 온몸의 근육과 관절이 완전히 풀린 상태에서 시작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몸을 다치게 되니까요.” 그녀는 방금 전까지 땀냄새가 후끈한 연습실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였을 터였다. 그러니 사방이 시멘트 콘크리트인 이 공간에서 한기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성급히 히터 온도를 높였고, 목도리를 풀어 그녀의 허벅지 위에 놓아주었다. 그녀는 구멍이 숭숭 뚫린 큼지막한 주머니에서 반질반질한 토슈즈를 꺼냈다. 그리고 파우치에서 23호쯤으로 보이는 트윈 케이크를 꺼내 토슈즈에 꼼꼼히 바르기 시작했다. 뼈마디가 앙상한 가늘고 긴 손가락… 문득, 그녀의 몸도 저 손가락처럼 여리지만 강해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하는 사람들의 뼈와 근육은 철저하게 재구성된 것이에요.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선을 만들기 위해 뼈의 위치를 바꾸고, 모든 근육과 신경들을 긴장시키죠. 몸은 물론 신경세포 하나까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해요. 예를 들면 아랫배는 넣어야 하고, 무릎은 꼿꼿이 펴야 하고, 골반을 돌려야 하고, 갈비뼈는 모아야 하고, 턱은 들어야 되는 식이죠.” 무섭게 들리지만 숭고한 의미가 담겨진 말이었다. 육체로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위해 그야말로 뼈를 깎는 아픔을 감내한다는 뜻이었다. 발레리나는 아주 오랜 시간을, 아니 발레리나의 수명이 다하는 마지막 그날까지 혹독하게 뼈와 근육의 조율을 반복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세 여인이 조심스럽게 우리 앞에 그 ‘숭고한 몸’을 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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