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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5일 히스토리아

김연희 |2006.07.28 10:23
조회 18 |추천 0
1987년 7월 5일 연세대 경영학과 학생 이한열이 서울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숨졌다.
21세였다. 이한열은 그 해 6월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의 유해는 7월 9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그 해 1월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아 숨진 서울대언어학과 학생 박종철과 함께 이한열은 1987년 6월 항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박종철의 죽음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었다.
항쟁은 6월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로 시작됐다. 그리고 7월 9일의 '애국 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은 항쟁의 뒤풀이 였다고 할 수 있다. 스물 갓 넘어 죽은 박종철이나 이한열의 이름 뒤에는 더러 열사라는 말이 붙는다.

그들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박종철이나 이한열이 그 시대의 별난 젊은이는 아니었다. 전두환 군부의 폭압 정치는 한 세대의 젊은이 다수를 잠재적 열사로 만들었다. 그것이 그 시대의 불행이었다

전국적 시민 항쟁의 물결을 감당하지 못해 6월 29일 당시 집권당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 뒤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노태우는 비록 군인 출신 저이인이기는 했으나 대통령이 된 뒤 조심스럽게 민주화의 시동을 걸었다.

5년뒤 김영삼은 31년만의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되었고, 다시 5년뒤 김대중은 광복 뒤 평화적 정권 교체의 주인공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15년전이라면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 자유에는 박종철과 이한열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피가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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