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특이한
국혼 사례들
- 왕과 유부녀/과부의 결혼, 그리고 자녀의 위치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족의 결혼은 혈통을 중시한다.
왕실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혼이 이루어지기도 했던 것을 보면 자명하다.
혈통 못지 않게 중시한 것은 상대가 국익을 위해 권력을 유지하거나, 혹은 확장할 수 있는 가문인지의 여부였다.
왕실과 정식 혼인으로 인연을 맺을 때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1. 권력/가문 - 왕실을 떠받칠 수 있는 군사력, 정계에서 차지하는 발언권이 탄탄하면기존 왕실이 신하들의 권력에 눌렸을 경우 뒷받침이 될 수 있다. 국제 결혼의경우는 얼마 만큼 강대국인가, 상대 여성이 해당 국가에서 어느 정도의 서열에 있었는가, 그 여성에게 달려있던 권한을 얼마나 끌어올 수 있는가를 보았다.
2. 부 - 왕실 재정을 튼튼히 할 수 있는 가문이라면 어느 정도 용인 되었다.
3. 미모 - 공주, 왕비의 이미지에서 반드시 아름다움이 연상되는 이유가 어느 정도 왕실을 대표할 얼굴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미모' 가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혹은 1, 2 번의 사항이 다소 미미하더라도 어느 정도 미인이라면 간택 후보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 그 때문이었다.
4. 처녀성 - 왕실 혈통이 달린 이상 여성의 순결은 당연히 중요했다. 왕실의 첫날밤이 장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귀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면 피가 묻은 천을 걸어서 보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여성이 숫처녀가 아니면 나중에 태어날 계승자의 친자 여부 및 계승 서열 문제로 이리저리 복잡하기 때문이죠.)
이러한 기준 때문에 국혼은 정략 결혼의 대명사가 되었고, 불타는 사랑이 전제된 혼인은 피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혼에도 예외는 존재했다. 왕이 정식 왕비 이외에 애인(후궁)을 두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 상대가 너무 격이 떨어질 경우에는 구설이 있을 수는 있었다. 지금부터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왕, 그리고 황제가 정식 왕비 및 황후를 맞을 때 그러한 전례를 깼던 사례들이다.
[한국]
* 고구려 시대 (왕위 계승을 인정받기 위한 왕자와 이를 이용한 후비의 결탁)
산상왕 : 형이자 선왕의 비였던 우씨를 아내로 삼았다. 이는 선왕이 살아있을 때부터 통정해서 일어난 불륜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대 왕이 승하했을 때 계승 서열을 두고 암투가 벌어지고 있을 시에, 우씨는 산상왕을 다음 왕으로 점찍고 적극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산상왕은 형수였던 우씨의 힘을 업고 즉위한 것이다. (형사취수를 이행한 것이 아니었다.) 왕비의 가임 연령이 한참 넘었기 때문에 후계자를 얻지 못하자, 산상왕은 후녀라는 여인을 차비로 맞아 왕자를 하나 얻게 된다. 이 당시 왕비 우씨의질투와 견제가 극심했으나, 후계자 문제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받아들였다. (후녀 이후에는 차비나 기타 후궁을 들였다는 기록이 없다....)
* 백제 시대 - 해당 기록 전무함.
* 신라 시대 - 족내혼과 골품제, 마복자를 인정한 제도에 따른 관계에서 재가녀와 그 자식의 지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얽고 얽히는 혼인 관계는 매우 복잡했다. 그러나 모두 혼외정사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정통 성골/진골 왕족으로의 왕위 계승은 별도로 이어졌다. (재가녀나 색공지신으로 인한 관계의 산물인 왕손들은 왕족으로 인정은 받았으나 왕위 계승에서는 거의 제외되었다고 보면 된다.)
* 고려 시대 (왕위 계승 및 족내혼 유지를 위한 종친들의 합의. 족내혼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으나 재가녀를 맞은 전례는 흔치 않았다.)
성종 : 제 6대 임금 성종은 제 4대 광종의 딸인 문덕왕후를 제 1왕비로 삼았다. 족내혼의 특성상 동복남매간에도 혼인을 했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왕비들은 모계의 성을 따다 휘칭을 쓰기도 했기에 얼핏 보아서는 예외적인 사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문덕왕후는 처음에 성종에게 이복형제가 되는 수명태자의 아들 흥덕원군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둔 과부였다. 당시 제 5대 임금인 경종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너무 어렸다. 따라서 광종을 계승할 명분으로 그의 딸인 문덕왕후와 결혼하여 - 서양자(사위가 되면서 동시에 양자가 됨)의 반열에 오르면서 동시에 족내혼 형식을 준수하기 위한 방편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문덕왕후는 성종에게 자식을 낳아주지 못했고, 그 이후 제 2왕비, 제 3왕비에게는 각각 공주 하나씩만 얻어 결과적으로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따라서 성종의 뒤를 이어서는 경종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목종이 7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다.] 문덕왕후의 딸은 흥덕원군 또한 왕자의 서열에 있었기에 궁주로 인정받았고, 후일 목종의 비가 된다.
* 조선 시대 : 건국 초기를 제외하고는 정식 왕비를 맞을 시에는 과부나 유부녀를 맞이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 대해서는 후궁의 경우를 수록하고자 한다.
연산군 : 제 10대 임금 연산군을 말하자면, 그의 여자로는 장녹수라는 이름이 빠질 수가 없을 것이다. 장녹수는 양반가의 서녀 출신이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로 살았다. 그리고 결혼해서 아들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기녀로서 노래와 춤에 능했던 녹수는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입궁하여 옹주를 하나 두게 되었다. 승은을 내릴 시에 이미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를 문제 삼지는 않은 듯 하다. 그러나 아들에 대해서 녹수는 끝까지 함구했고 중종반정이 있기까지 그들 사이에서는 큰 파탈이 없었다.
[연산군 일기]에서는 녹수의 신상에 대해 이러한 기록이 있지만, 그 아들에 대해 어떠한 처분이 내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유부녀였다는 것은 어느 정도 수용이 되었을지라도, 자식에 대해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함구했을 것이다.
[서양]
* 로마 시대 : 근친혼과 서양자 제도로 정통성을 보완한 왕위 계승 사례
네로 :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조카이면서, 전 황제인 칼리굴라의 여동생이었다. 전남편 가이우스가 죽은 뒤에 클라우디우스와 재혼한다. 클라우디우스는 첫 황후 메살리나에게서 브리타니쿠스를 두어 계승 서열 1위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메살리나가 애인과 짜고 역모를 꾸민 혐의로 쫓겨났기 때문에 어머니의 흠절이 문제가 되어 브리타니쿠스 또한 서열에서 한 걸음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아그리피나는 그러한 점과 더불어 네로가 브리타니쿠스보다 연상이라는 것을 노렸다. 당시 네로가 정통 황실의 핏줄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혈통부터 보완해야 했다. 따라서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딸인 옥타비아와 결혼하여 정통성을 보완하게 되고, 동시에 성인식도 치루어 제위 계승에 적합한 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게다가 네로는 브리타니쿠스가 성인식을 1년 앞두게 되자 혹시 반대파들이 그를 옹립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독살하는 치밀함까지 보인다.)
* 프랑스 : 사교계의 연줄을 위한 정략 결혼과, 황실 핏줄을 얻기 위한 이혼
나폴레옹 : 프랑스 대혁명 당시, 아버지의 유품인 검을 찾으러 온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브아르네 가문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당시 사교계에서 미모와 지성으로 유명했던 조세핀 브아르네였다. 나폴레옹은 그녀에게 매혹되어 결혼에 이르고, 황제가 된 뒤에는 그녀를 황후로 삼지만 둘 사이에서는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조제핀 한 개인에게도 매혹되어 있었고, 그녀의 신분으로 인해 연줄을 많이 얻어 황제의 지위 또한 굳건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후계자 문제는 별도였다. 하는 수 없이 조제핀과 이혼하고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여 아들을 둔다. 사실 그 이전에도 혼외정사로 둔 아들이 여럿 있었지만 궁정 법도가 있었고, 카톨릭의 계율이 있었기 때문에 정식 왕비/황후의 자식만이 후계자로 인정되었다. 조제핀의 아들과, 다른 애인들에게서 낳은 아들들에게는 귀족 작위를 내려주는 것으로 그쳐야 했다.
(출처 : '역사 속 특이한 국혼 사례들' - 네이버 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