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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4대 미인.ㅋㅋ

정윤석 |2006.08.03 16:13
조회 125 |추천 0


 중국 고대의 4대 미인은 누구일까. 당 나라의 양귀비, 한나라의 왕소군, 월나라의 서씨, 삼국지의 초선이다. 고대 미인은 저마다 역사 배경을 가지고 있다.

 

양귀비의 본명은 옥환이다. 그녀는 현종의 열 여덟 째 아들 수왕의 부인이었다. 현종은 아들에게서 며느리를 뺏는 대신 미녀 둘을 하사하였다. 그녀는 22살에 후궁이 된 뒤 5년간 비구니가 되었다가 27살에 왕비가 되었다. 현종을 둘러싸고 벌어진 그녀와 매비의 총애 싸움은 유명하다. 4대 미인은 각기 한 가지씩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양귀비의 결함은 겨드랑이에서 암내가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종이 양귀비를 총애하는 원인이 되었다. 양귀비의 일생이 목욕의 일생인 데는 그런 연유가 있다. 서안의 관광지 중 하나인 '화청지'는 양귀비의 목욕탕이다.

 

양귀비에게는 안록산이라는 정부가 있었다. 안록산은 양귀비의 시녀에게 선물을 주어 귀비와 접촉했다. 그는 대장군이었다. 그는 양귀비를 '양 어머니'라고 불렀다. 두 사람의 관계를 희석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불렀는지도 모른다. 그는 매우 뚱뚱하여 몸무게가 2백 킬로그램이나 되었다. 배가 많이 나왔는데 스스로 "이는 임금에 대한 충성'이라고 했다. 그는 755년 안사의 난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756년 현종은 사천성으로 도망한다. 그 해 다시 진현 대장군의 난이 일어나고, 양귀비는 서안에서 서쪽으로 70킬로미터 떨어진 흠평현에서 죽는다.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살을 권유하였고, 양귀비는 목을 매달아 죽었다. 현종은 돌아오는 길에 그곳에 들렀으나 시체는 찾지 못하고 옷만 찾았다고 한다. 이곳 양귀비의 무덤은 처음엔 흙으로 만들어졌으나, 나중에 돌무덤으로 바뀌었고, 다시 시멘트 무덤으로 바뀌었다. 양귀비가 일본에 가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양귀비의 무덤이 일본에도 있다는 것이다. 양귀비는 서른 여덟 살에 죽었다. 718년부터 756년까지 살았다.

 

왕소군은 한나라 양제의 궁녀였다. 당시 궁궐에는 궁중 화가가 있어서 궁녀들의 얼굴을 그렸고, 황제는 그 화첩을 가지고 궁녀를 선택하였다. 그림이 예쁘게 그려지도록 하려면, 그 화가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인물에 자신이 있었던 왕소군은 궁중 화가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화가는 그녀의 얼굴에 있지도 않은 점을 그려 넣었다. 나중에 변방의 흉노족을 달래기 위해 흉노족의 두령인 선우에게 보낼 선물로 여인을 고르는데, 한나라 양제는 궁녀들의 화첩을 보고 얼굴이 점에 있는 왕소군을 찍었다. 막상 왕소군이 흉노족에게 가는 날, 그녀의 미모를 보고 놀란 양제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왕소군의 결점은 어깨가 좁다는 것이다. 어깨에 뽕을 넣어 옷을 만드는 풍습이 거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진짜 아름다웠던 이는 월나라 서씨였다. 그녀는 본래 월나라 범려 장군의 부인이었으나, 범려 장군은 오나라 왕 함려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만다.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물 속의 물고기도 입을 딱 벌리며 가라앉고 만다고 하여, '침어지미(沈魚之美)'라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려도 예뻤다고 한다. 서씨의 흠은 발이 긴 것이었다. 농가 출신이어서 전족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즘도 80세 이상 된 할머니 중에는 전족으로 발이 한 뼘밖에 안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지주의 집이라든지 좋은 집안 출신임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전족의 유래는 다산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자식을 많이 낳아야 군사력도 강해지기 때문이다. 전족은 딸이 태어나면 발을 가죽으로 꿰매어 못 자라게 하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도 아기의 발보다 조금 큰 정도이기 때문에 걸음걸이도 작고 도망을 못 가게 된다.

 

삼국지의 초선은 여포의 부인이다. 나중에 동탁에게 빼앗겼다. 초선의 단점은 귓방울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귀걸이를 무거운 것으로 했다고 한다.

 

중국 최고의 여걸 측천무후는 당 태종 때 궁녀의 하나였다. 그 후 미랑으로 승진하였는데, 당 태종 이세민이 보기에 예뻐서 아끼고 사랑하였다. 고종이 즉위한 후 측천무후를 죽이지는 못하고 곁에 두었다가 비구니가 되게 하였다. 나중에 고종은 그녀를 다시 데리고 왔다. 측천무후는 궁녀로 14년, 황후로 35년을 지냈다. 측천무후는 당나라 때 중종을 폐하고 현종의 아버지인 예종을 옹립하였다가, 다시 예종을 폐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에 등극하였다. 그녀의 무덤은 남편인 당 고종 이치의 무덤에 합장되어 있다. 측천은 위씨 황후를 '공주를 죽였다'며 모해하였다. 측천무후는 손녀인 영태공주를 살해하였다. 영태 공주가 열 여섯 살 때 소년과 말싸움을 한다는 이유로 죽였다. 친손녀였다. 즉 당 중종의 친딸이었다. 측천무후가 죽은 뒤 중종이 다시 즉위하고 나서, 그는 딸 무덤을 건릉 옆에 합장하였다.

 

서태후는 손자와 장기 바둑을 두다가 홧김에 손자를 죽였다. 손자가 십 수명이나 되니까, 그렇게 죽일 수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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