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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포의 대한민국 예찬론

전후석 |2006.08.05 23:01
조회 3,067 |추천 13

글을 쓴다.

 

얼마 전 한국이 16강 진출에 탈락했다. 2002년 초에 미국에 오는 바람에 경험할 수 없었던 한국에서의 길거리 응원을 2006년에나마 한국에서 경험 할 수 있었다는 건 나에게는 굉장히 큰 행복이었다. 미국 학기가 끝나자마자 일부러 비행기표를 일찍 끊어 적어도 한 경기, 단 한 경기만이라도 한국에서 관람을 하고 싶어 발버둥쳤다. 광화문에서의 단 하루의 길거리 응원은 나의 작은 소망이었기에.

하지만 2006년 6월 24일 광화문 사거리 한가운데서 경험했던 나의 길거리 응원 경험은 내가 꿈꿔왔던 그런 환상과는 사뭇 그 모습을 달리하였다. 아주 조금. 오쳔만 명의 그 잠재되어 있는 “한”의 응어리가 폭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는 다시금 쓰디쓴 침을 삼켜야 했다. 그 단단한 응어리가 나의 쓴 침에 의해 부식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그렇게 경험해 보고 싶던 길거리 응원은 축구 게임의 승패를 떠나 그 모두가 한 마음이 된 상태에서 미친 듯이 분출해 대는 그 “한”의 외침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 그런 것 같다.

 

우리나라는 참 대단하다. 축구게임 하나로 50만 명의 인파가 한자리에 모인다. 가정환경이 어땠던, 살아온 삶의 백그라운드가 어땠던, 학력, 출신, 경력, 신분이 어떻든 “월드컵” 이란 사실 조금 유치한 명목아래 모두가 하나되기를 원한다. 늘 서로 헐뜯고 깎아 내리기에 연연한 것 같아 보여도, 가끔은 남의 불행을 자기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 같은 풍조에도, 너무나 치열해서 숨도 쉴 수 없는 갑갑한 경쟁사회처럼 보여도, 우리는 하나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이런 모두의 잠재된 소망아래 길거리 응원이 생겼을 것이고 월드컵이란 공차기 대회에 목숨 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월드컵이 모두를 하나로 통합한다기 보다는 역으로 모두의 하나됨을 위한 간절한 염원이 월드컵을 통해 분출되는 것뿐이다.

 

대한민국.

우리의 “대~한민국” 구호는 외국 어디에 나가도 자랑스럽게 인정받는다. 나와 피부색과 머리색이 다른 외국인이 나에게 웃음지으며 부정확한 바름으로 “대한민국” 구호를 외쳐 줄 때 나는 순간이지만 잠시나마 그와 동질감을 느낀다. 국경을 떠나, 인종, 문화를 떠나 그가 그 구호로 나에게 넌지시 함유하는 것은 하나됨의 손길이다.  한국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 다른 이방인에게도 그 시너지를 분출 하고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흡입력을 지녔다. 이 모든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만 갖고 있는 “한”의 매력에서 비롯 된 것 같다.

 

한국은 대단한 나라이다. 30만의 인파가 너무나도 쉽게, 질서정연하게, 또 당연하게 모여든다. 한국인은 대단한 민족이다. 세계 어디를 가봐도 끈끈하게 뭉쳐 한국에서 외치는 똑 같은 “대한민국” 구호를 메아리처럼 외쳐댄다.  미국에서 경험했던 3만 명 가량의 한인 교포들과의 응원과 한국서 경험했던 30만 명 가량의 한국인들의 응원에서 다른 점이라고는 단 한가지도 없다.  명목상 나는 코리안 어메리칸이지만 한국에서 과반수 이상을 산 경험에서 비추었을 때, 시청광장에서 죽어라 대한민국을 외치는 중학생 소년의 눈빛과 LA 한복판에서 단 한번도 가본적 없는 자기 모국의 구호를 외치는 한인 2세 소녀의 눈빛에는 똑 같은 우리나라 특유의 열정과 정서가 담겨져 있다.   미국에서 한인 2세 친구들이 처음으로 대한민국에 대하여 소속감을 느끼고 USA 보다 Republic of Korea 를 당연한 듯이 “자기의 나라” 라고 여기며 응원할 때면 나는 감동을 받는다. 그 누가 저 선량하고 순수한 자기 모국에 대한 사랑을 표출하는 젊은 2세들에 대해 손가락질 하며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고 비방할 수 있을까?  그 누가, 골이 들어갈 때면 터져 나오는 한인 2세들의 저 행복과 감동에 겨운 “대한민국”의 외침에 의심된 눈초리를 보낼 수 있을까?

 

2002년에도, 또 이번 2006년에도, 골이 터지는 순간 몇 백 년간 쌓여온 한국국민의 “한”이 개개인의 입을 통해, 심장을 통해, 마음을 통해 터져 나올 때면, 그래서 주위 모두 껴 앉고 흐느껴 기뻐할 때면, 과연 “너”와 “나” 사이를 가르는 수많은 잣대와 편견들이 그래도 꿋꿋이 제자리를 유지하고 있을까 의문이 간다. 그렇지 않은가. 그 넘쳐나는 엄청난 양의 시너지 안에서 하나된 우리를 발견할 때 그딴 이데올로기나 학력, 신분은 너무나 하찮은 세상의 기준대에 불과하지 않은가?

 

태극전사들의 “투혼”.  최진철의 이마에서 피가 날 때 그가 나의 가족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그와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서 identify 를 하기 때문이다. 이천수가 그라운드에 엎드려 눈물을 흘릴 때 나의 눈에서도 물이 나오는 이유는 그와 나는 똑 같은 한국민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안정환이 슛을 하고 애통한 듯 눈물을 머금으며 땅을 칠 때 나는 그와 같이 땅을 치며 한탄의 한숨을 내 뿜는다. 그와 나는 똑 같은 한국인이다.

축구를 이야기 하자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스포츠를 이야기 하자는 것도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 국민은 어느 스포츠가 되었던지 한국인이면 마치 자신의 일인 양 맹목적인 응원을 보낸다.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단지 자국민이기 때문에 맹목적인 응원을 보내고 호들갑을 떨며 성원을 하는 국민은 우리나라 국민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홍명보의 승부차기 이후에 환희 웃던 웃음이 있던 날은 나 개인적으로도 태어나서 가장 기쁜 날이 되어버렸고, 이종범이 일본을 역전하는 2루타를 날리고 1루를 향하여 포효하며 뛰어 갈 때는 나도 그 그라운드에서 그와 함께 행복의 탄성을 외치고 있었다.  한국인이 세계 어느 방면에서 이름을 떨쳐도 그것이 곧바로 나와 직결되며 나의 행복이 되는 이유는 나는 바로 그에게서 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인들만이 허락 받은 축복이며 특유의 민족성이다. 한국인 전체에 내제되어 있는 “한”의 정서로 우리는 늘 동질감을 느끼며, 여기에 덧붙여 “정” 은 우리를 하나로 끈끈히 묶어준다. 아름답지 않은가.

맺히고 맺힌 “한”이 스포츠 경기를 통해 표출될 때, 아니면 맹목적인 “우리”만을 주장할 때 외국인들은 이해를 못한다. 어디서 그런 자긍심이 나오냐고, 왜 운동경기에 목숨 거냐고. 이런 질문이 들어올 때면 나는 대답하기를 포기한다. 나의 우리조국과 우리 국민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은 오직 느낄 수 밖에 없기에.  내가 느끼는 지금 이 열정을 어찌 네가 알 수 있으랴. 이 몇 천년 간 전해져 내려온 “한” 의 정서를 어찌 하루아침에 너에게 설명할 수 있으랴. 내가 다른 한국인을 만날 때 곧바로 형성되는 신용과 애정의 “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대한민국은 위대하다.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린 우리 자체로 너무나 아름답다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민족에는 책임이 많다.  우리 안에서 더욱더 융합하고 협동을 해야겠고 더 나아가 다른 민족에게도 손길을 내밀어야 될 것이다. 우리끼리의 이데올로기 싸움과 물질주위로 인한 “성공”의 잘못된 개념은 곧 고쳐야 할 부분이지만 나는 우리나라를 믿는다. 반드시 우리만의 그 아름다운 장점들로 세계에서 칭송 받을 그 날이 올 것이다.  어떻게 아냐고?  나는 LA 와 시청에서 경험했던 수많은 젊은 친구들의 아름다운 외침과, 애국가를 부를 때 눈시울을 뜨겁게 적시던 그 이상한 기운을 느껴버렸다. 그 아름다움을 맛 본 이상 나는 더 이상 대한민국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국적상 미국시민이지만 나의 조국인 대한민국의 발전과 세계에 퍼져있는 한국인 개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늘 꿈꿀 것이다. 또 노력할 것이다.

나의 열정이 모두에게 뜨겁게 전달 될 때까지.

 

한국인 됨이 너무나 자랑스러운 Joseph Juhn 전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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