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주자학은 퇴계의 아류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교조화의 길을 걸은 조선 주자학과는 다른 독자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1618∼1682·사진)는 일본 주자학의 대표적인 학파인 기몽(崎門)학파의 창시자로 6000여 명의 제자를 키워냈으며 일본문화의 부흥을 주장한 국학 창시자 중 하나인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1776∼1843)를 배출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20년 뒤 태어난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1618∼1682·사진)는 퇴계 이황을 사숙한 일본인 주자학자로 정통 주자학자임에는 틀림없다. 야마자키는 주자를 존경해 그 호인 회암(晦庵·캄캄한 암자)을 따라 자신의 호를 암재(闇齋·캄캄한 방)로 지었다. 그는 퇴계에 대해서도 ‘(주자보다) 수백 년 뒤에 태어났음에도 백록동서원에서 직접 주자의 가르침을 받는 것과 다름없다’고 깊은 존경을 표했다.
하지만 퇴계를 사사하고 주자를 존경하여 호까지 추종한, 그토록 철저한 주자학자였던 그로부터 한일간의 전혀 다른 주자학이 나타났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학계에서는 퇴계를 사사한 일본 주자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는 그가 중국의 주자학보다 더 교조적인 한국 주자학과 달리 신도와 연결된 이단의 주자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사상가로 평가받을 소지가 크다.
그렇다면 그가 일으킨 일본 주자학이 일본 천황제도를 지탱하는 사상체계로 등장하여 한일 주자학이 서로 달리 발달하는 계기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주자를 신봉하고 퇴계를 사사하긴 했으나 “공자가 대장이 되고 맹자가 부대장이 되어 군대를 끌고 일본에 쳐들어온다면 무기를 들고 싸워 공자와 맹자를 포로로 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곧 공맹의 도”라고 말할 만큼 주체적으로 주자학을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주체의식이 그로 하여금 일본의 전통신앙인 신도(神道)에 심취하도록 했으며, 신도와 유교가 하나라는 신유겸학(神儒兼學)을 주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심신(心神)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이는 조상신과 성현에 대한 제사 이외의 제사를 이단시한 주자학적 전통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일본 주자학의 창시자인 야마자키 안사이의 사상에 대해 분석한 학술서가 저자 다지리 유이치로(田尻祐一郞) 도카이대 교수에 의해 출판되었다. ‘야마자키 안사이-일본 주자학의 원형’이라는 이 책은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출간되었다. 성균관대출판부의 유학사상총서로 출간된 이 책은 야마자키 사상의 모순성을 접할 기회를 준다. 저자는 야마자키 사상의 모순성에 대해 인간의 자기중심성 극복을 위해 주자학과 신도의 통일을 시도한 것으로 분석했다.
정통 주자학을 도입하였으나 교조적인 답습에만 매달리지 않고 일본의 전통적 신도와 접목시킴으로써 오늘날 ‘일본주의’라고 불리는 독특한 일본사상체계의 원류인 국학의 한 지류가 되도록 한 야마자키에 대해 우리나라의 정통 주자학자들이라면 폄하할 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주자학자들이 신유겸학의 일본 주자학을 주자학적 정통성을 상실한 이단으로 평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야마자키 안사이의 그런 유연한 자세, 주체적인 학문의 수용자세가 더 바람직하게 보인다. 학문이든 종교든 교조적인 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신축적이고 유연한 입장을 통해 한발자국이라도 발전시켜 나가는 입장이 더 바람직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