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대한제국 황실가족

이소희 |2006.08.12 01:20
조회 173 |추천 2

 

 

★고종황제의 가족사진

왼쪽부터의친왕, 순종 융희황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앞), 셋째아들 영친왕(뒤), 고종 황제, 순종 황제의 왕비 순종효황후 윤대비, 의친왕의 왕비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고종 광무황제(1852~1919)

영조의 현손(玄孫)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1852년 음력 7월 25일 정선방(貞善坊)소재의 흥선군 사제에서 출생하였다. 즉위 후인 1866년 9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1863년 보위에 올랐다. 1873년 친정을 시작한 이후 여러 개화정책을 펼쳤지만 일본의 침투를 끝내 막지 못하여 1910년 나라를 빼앗기게 되고 1919년 돌아가셨는데, 이는 일본이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정권은 민비의 척족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민씨척족정권은 흥선대원군이 취하였던 강력한 척사양이정책(斥邪壤夷政策)과는 달리, 안으로 정계 일부에 자라고 있던 대외개방의 움직임과 밖으로 근대 일본의 국교요청(國交要請)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어 새로운 국교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서 고종은 점차 일본을 혐오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후 3국간섭으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고자 친로정책(親露政策)을 펴게 되었다.

이에 일본공사(日本公使:三浦梧樓)는 친일정객과 짜고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궁을 습격, 민비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폭거를 자행하였다.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왕비를 잃었으며, 일본의 압력으로 폐서인(廢庶人)조처까지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 민씨 복위의 조서(詔書)를 내려 비의 전을 태원전(泰元殿)에 설치한 뒤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택되고, 비로소 홍릉(洪陵)에 국장되었다(1919년 金谷陵으로 옮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군사적 압력과 정치적 간섭을 강화하자, 고종은 친일세력을 물리치고자 친러정객과 내통하고 1896년 2월 돌연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친러정부가 집정하면서 열강에게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국가의 권익과 위신이 추락하고 국권의 침해가 심하여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선양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하였으며,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명성황후(1851~1895)

고종의 아내로 1866년 중전이 되셨다. 고종의 곁에서 자신들의 친척을 등용하여 권력을 쌓고 그런 일환으로 개화정책의 중심에 섰지만, 일본편 들었다가, 청나라편 들었다가, 마침내는 러시아편 들다가 일본군들에 의한 을미사변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본관은 여흥(驪興), 성은 민씨(閔氏)로,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태어났다. 증(贈) 영의정 치록(致祿)의 딸이다. 9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책봉되었다.

1873년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면서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자, 대원군파를 숙청하고 쇄국정책을 폐하여 일본과 수교하였다.

 

1884년 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일본 세력의 침투가 강화되면서 김홍집(金弘集) 등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을 궁중에 잠입시켜 건청궁(乾淸宮)에서 그녀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그 뒤 일본에 의해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광무1년)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묻혔다.

 


 

 

 

★순종 융희황제

 

순종(純宗)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1872년 2월 창덕궁의 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척(拓)이며 어머니는 명성황후이다. 태어난 다음해 세자에 책봉되었고, 아홉 살 때인 1882년에 여흥민가의 규수와 혼인하였다. 바로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1872-1904)이다. 순종의 재위기간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약 3년 동안이었으며, 재위에 오르는 과정뿐 아니라 평생을 암흑 속에서 보내야 했다.

순종은 일제의 침략으로 가장 큰 정신적 피해를 입은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순종은 어머니 명성황후의 비극적인 최후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 열국 외교관의 보고에 따르면 을미사변 당일 왕태자(후일의 순종)는 일본 자객의 칼을 맞아 기절하였고, 왕후(명성황후)는 절명의 순간에도 왕태자를 외쳐 불렀다고 한다. 당시 왕태자비(후일의 순명효황후) 역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그 날 이후 왕태자는 넋이 나간 듯 때때로 건청궁(乾淸宮)을 맴돌았다. 때로는 모후(母后)가 최후를 맞았던 옥호루(玉壺樓)를 들여다보며 어마마마를 부르짖다가 혼절하곤 하였다.

 

 

★순명효황후 민씨

 

순명효황후는 여흥(驪興) 민씨(閔氏) 여은부원군민태호(驪恩府院君) 민태호(閔台鎬)의 딸로 1872년 [고종9년]에 태어나 11세때에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의 피를 뒤집어 쓴 것은 상당한 정신적 충격이었고, 그와 더불어 몸에 병이 있었다. 매천야록을 살펴보면 '고종 41년(1904) 9월 28일, 황태자비 민씨가 승하하니 이때 순종(純宗)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광무8년] 33세였다. 황태자(순종)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구자라 우울하게 세월을 보내던 황태자비는 홧병에 걸려 매일 경대와 책상을 때려부셔 민영소가 하루에 하나씩을 새로 들여보냈다. 이렇게 몇 년을 지내자 핏덩이가 응어리졌는데, 의관이 잘못 진단하여 태기가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보약을 계속 복용하다 승하한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에 체류중이었던 외국 기자도 그 상황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몇 겹이나 천을 덮고 그 위로 진맥을 하니 제대로 진맥할수 있겠는가' 라는 구절과 '몇십명의 의관 중에 임신이 아닌 것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라는 구절이 있다. 자료들로 짐작해 보건대 황태자비 민씨는 을미사변 때의 정신적 충격, 아이를 못 낳는 우울함, 잘못된 처방 때문에 승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순정효황후 윤비

순정효황후 윤비는 순종황제의 비다.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중전다운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옥새를 감춰 두고 내놓지 않은 일이며, 한국전쟁 때 낙선재로 쳐들어온 인민군들에게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 라며 호통쳐서 내쫓은 일, 왕조가 무너지고 순종이 승하한 뒤에도 일제에 항거하며 낙선재를 지켜낸 그 당당한 기품 등.....   또한 공산치하에서 어느 누구 하나 황후라고 돌보아주는 이 없는 혹독한 가난과 고독한 피난살이에서도 황후로서의 자존심을 저 버리지 않고 끝내 낙선재를 되찾아 흩어진 왕족들을 기다리던 윤황후였다.

그녀는 왕조의 운명과 함께 침잠하는 자신의 운명을 불교에 의탁하기도 하였다. 한때 그녀는 성북동 흥천사 가까운 곳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그 절을 매일 찾아가 왕가의 며느리로서 왕조를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를 했다. 흥천사에서의 기도 덕분이었는지 그녀는 이승만 정부와의 끈질기고도 외로운 싸움 끝에 끝내 창덕궁 낙선재를 도로 찾아 일본에 있던 영친왕 내외와 덕혜옹주를 불러들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미약하나마 자신의 몫을 다하려 했던 조선의 마지막황후 순정효황후는 1966년  낙선재 석복헌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만다.



★영친왕

영왕 이은(李垠)은  1897년 생으로 고종의 3남이며 순종의 동생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서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후,  1920년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강제로 일본 황족의 딸(이방자 여사)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영왕의 귀국은 광복이 되었어도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63년 12월에야 가능하게 되었으나 이미 말을 못하고 게다가 기억상실의 상태였다.  그 후 7년간 병원치료도 헛되이 1970년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홍유릉에 안장되었다.



★영친왕비 (이방자 1901-1989)

일본 동경 출생. 황족의 장녀로 태어나 1918년 학습원을 졸업하고, 20년 당시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과 결혼하였다.  이 두 사람의 결합은 조선과 일본의 융합이란 차원에서 계획된 경략결혼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 1947년에 지정된 신헌법에 의하여 왕족신분을 상실한 두 사람은 무국적 상태로 있다가 63년 한국적( 韓國籍)을 취득하여 귀국하였다. 1970년 남편 이은 과 사별한 후 한국에 남아 부군의 뜻을 이어 신체장애자를 위한 〈명휘원(明暉園)>과 정신지체아를 위한 를 세워 사회복지활동을 하였다.



★이구 (李玖; 1931- 2005)

영왕과 이방자여사의 2남으로 태어난 이구씨는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으로서 일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단독으로 도미(渡美)하여 MIT공대를 졸업하였다. 직장동료였던 줄리엣여사와 결혼하였으나 한국에 돌아온 후 왕실의 품위를 그르쳤다는 질타 속에 파탄을 맞게 되었다. 이방자여사가 돌아가신 후 한국을 떠나셨으나 1996년 영구 귀국하셔서 부암동에 거처를 정하기도 하였으며 2005. 7. 16 일본에서 사망 하였다.


★덕혜옹주(1912-1989)

덕혜옹주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녀이다.  고종이 나이 환갑에 귀인 양씨로부터 얻은 외동딸로서 왕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지냈다. 그러나 1925년 12세에 동경유학을 빌미로 일본으로 끌려갔고 17세가 되던 1929년 어머니마져 돌아가시게 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을 얻게 되었다. 병세가 호전되던  20세에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하고, 결혼생활 3년만에 그동안의 시련으로 심한 우울증에 실어증까지 겹쳤다.  폐인이 된 몸으로 1962년에 환국하여 낙선재에서 1989년 운명하기까지 끝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대한제국

고종 실록 권 36. 광무원년(1897) 10월 11일조.

국호에 대한 논의는 이날 환구단 제사를 앞두고 국왕이 제안한 것으로 대한이란 새 국호도 국왕이 직접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삼한(마한, 진한, 변한)의 땅으로 나라(조선)의 초기에 하늘의 지시를 받고 한개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나라의 이름을 대한이라고 한다고 해서 안될 것이 없고 또한 매번 일찍이 보건대 여러나라의 문헌에는 조선이라하지 않고 '한'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 이어 '한'으로 될 징표가 있어가지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포하지 않아도 세상에서는 모두 '대한'이라는 이름을 알 것이이다. 라고 말하였다."


광무제 말씀인 즉슨 "과거부터 우리는 '한'이라 불리었으니 삼한을 통합하고 지금에 이르러 황제를 칭함으로 공포하지 않아도 세상은 우리를 '대한'이라 알것이다." 라는 것이다.

대한제국은 수립 원년인 1897년부터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까지 13년 동안 근대사에 있어 한민족의 개혁과 독립을 상징하는 국호입니다.

 

 

 

잊혀진 대한제국의 역사.. 구 한말.. 일제의 치하..

 

낯선 왜놈들에 의해 한 나라의 국모를 잃은 백성들의 고통..

내 어찌 모르리오..

내 아내를 잃고.. 내 나라를 잃고..

내 부모님을 잃고.. 내 자식을 잃으니..

이 어찌 분통하지 아니할수가 있겠는가..

내 비록 이 땅에 묻히지만 너희 왜놈들을 죽어서도 잊지 아니 할 것이며.. 두눈을 부릅뜨고 항시 너희를 지켜볼 지니라..

 

 

 

나는 조선의 국모다..

 

비록 타오르고 타올라

 

그저 한줌의 재로 흩어져..  

 

바람을 타고 빗물에 쓸려

 

외롭게 떠돌지라도..

 

이것이 어찌 내 마지막이라 하겠는가..

 

추천수2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