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서울 1945)이강국,김수임,모윤숙

구자열 |2006.08.12 01:58
조회 460 |추천 0

김해경(한은정 분)은 김수임, 최운혁(류수영 분)이 이강국이라면, 문석경(소유진 분)은 모윤숙, 이동우는 김규식이라 할 수 있겠죠."   윤 PD는 "김해경은 일제강점기 이화여전을 나와 주한미군 헌병사령관 베어드 대령과 동거하던 중 조선민주주의공화국 초대 외무상을 지낸 이강국을 북으로 탈출시킨 후 6.25발발 이틀전 총살당한 실존인물 김수임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밝혔다.   윤 PD는 "이 드라마를 준비하던 중 전숙희씨가 김수임을 주인공으로 한 실명소설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는 발간되기도 했지만, 실화를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다"라고 전제하며 "그외 일제강점기 피아니스트로 이승만 정권에서 사교클럽을 운영하는 문석경은 시인 모윤숙 여사를, 이동우는 미군정으로부터 신임받고 자유시장을 선택하는 김규식 선생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설명했다.   윤 PD는 이어 "극중 이동우의 아버지 이인평(최종원 분)은 인촌 김성수와 비슷하다"며 "대한민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그 시대에서 민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친일할 수밖에 없었던 일들도 적나라하게 그려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밖에도 여운형, 허가이, 김구 등 실제 인물도 극에 등장하게 된다.    

이강국 (1906~1955) : 드라마 상의 최운혁 (류수영)

 

경기도 양주출생으로 1930년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학교)을 졸업하고, 1932년 독일로 유학, 베를린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재학 중 프롤레타리아과학동맹 등의 단체에 간여하면서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5년 귀국 후 이주하 등과 원산에서 좌익노조를 결성, 활동하다가 1938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 ·15광복 후 본격적으로 공산주의활동을 재개하여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장,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1946년 2월 좌익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그해 9월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하는 선언서를 발표, 박헌영과 함께 체포령이 내리자 월북하였다.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사무국장, 1948년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상업성법규국장, 1950년 인민군 야전병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 남로당사건에 연루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5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김수임 : 드라마 상의 김해경 (한은정)

김수임은 개성 출신이다. 집안이 가난했으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여전에 진학했고,

8 ·15광복 전에 이화여자전문을 졸업한 미모의 인텔리여성으로 영어회화에 뛰어났다.

세브란스병원에서 미국인의 통역을 맡고 있을 당시 학교 선배 모윤숙을 통해 다섯 살 위인 이강국을 알게 됐고 동거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미국대사관의 통역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수사기관의 고문으로 있던 미국인과 외인주택에서 동거하면서 사교계의 여왕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던 중 이강국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그를 미국인 고문관의 집에 숨겨두었다가 1947년 월북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강국은 김일성정권에서 초대 외무부장으로까지 발탁되었고 그 뒤 대남공작을 펼치자 이 계획에 동조하여 자기집을 남조선노동당의 거점으로 사용하였으며, 각종 기밀을 빼돌려 남로당에 제공하였다.

 

한편 육군특무대에 수감 중이던 남로당의 빨치산책인 사형수 이중업을 빼내 의사로 가장시켜 월북시켰다.

 

1947년부터 1년 여 동안 여러 차례 이강국의 연락원을 자기집에 숨겼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조선은행권을 서울로 운반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등 간첩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950년 4월 초 수사당국에 체포되었고, 가택수색에서 권총 3자루, 실탄 180발 및 북한으로 보내려던 많은 기밀물건들이 압수되었다. 같은 해 6월 15일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6 ·25전쟁 직전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강국과 김수임의 사랑이 소재가 된 소설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


 

실천적 지식인, 이강국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소설가 유진오의 회고록에 따르면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 전신) 3대 천재로 유진오 자신과 허달 그리고 이강국을 거론하고 있다. 이강국과 정치적 방향이 다른 유진오조차 이강국의 비상한 두뇌를 언급할 정도라면 이강국이 조선 최고의 수재였다는 설이 허언은 아니었지 싶다.

 

이강국은 1906년 경기도 양주출생으로 그의 집안은 유서깊은 양반가문이었으나 가산이 파산하여 그는 충남 예산의 친척집을 떠돌면서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이강국은 조선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가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친척집을 전전하며 성장한 이강국은 보통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독학으로 일본어를 마스터해 보성고보에 입학했다고 전해지는데, 제도권 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그가 어떻게 보성고보에 수석으로 입학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참고로 보성고보에 입학한 이강국의 동기생으로 "조선의 랭보"로 불리우는 천재시인 임화가 이강국과 한 반에서 공부를 했다고 전해지는데, 임화역시도 1953년 남로당 숙청시 이강국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보성고보 재학시절부터 수재로 이름을 날렸던 이강국은 조선의 내노라하는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경성제국대 법문학부에 입학한다. 재학시절 좌익써클 "경제연구회"에 가담해 무산대중의 계몽운동에 앞장서는 등 이때부터 항일 공산혁명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헌신하기로 작심한 그는 고등고시를 거쳐 판검사가 되는 안락한 길을 미련없이 던져버린다. 이강국은 졸업 후 경성제대 조교로 근무하다가 독일 유학을 떠난다. 베를린 대학 법과에 적을 두고 그는 독일 공산당에 가입하는 등 본격적인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하게 되는데, 독일 유학시절 경성제대 미야케 교수에게 독일 공산당 팜플렛 등을 보낸 게 발각되어 귀국하자마자 미야케 교수와 경성트로이카의 이재유가 연계된 "적색노조"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서대문 경찰서에서 탈출한 경성트로이카의 거두 이재유가 국립대학 교수이자 일본이었던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의 관사에 은신한 게 발각되어 그 당시 일본과 조선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이 사건은 미야케 교수와 연줄을 대고 있었던  이강국한테까지 파장을 일으켰다. 미야케 교수는 이재유의 단순한 은신처 제공 수준을 떠나 경성트로이카 조직과 함께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에 가담한 걸로 알려졌는데, 독일에 있는 이강국이 국내의 이재유 주도의 공산당 재건운동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재유 그룹이 1935년에 개최될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 유학중인 이강국을 옵서버라도 보내겠다는 대안이 마련된 걸로 보면 국내 공산주의 그룹과 긴밀한 연락 관계에 있었던 건 분명하지 싶다.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된 이강국은 경성제대 동기생 최용달과 원산으로 내려가 이주하를 주축으로 한 "적색노동조합 재건"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이강국은 이때 코민테른 제7회대회의 결의내용 즉 "반제 반파쇼 인민전선론"을 수용해 원산노동운동을 종전의 노동운동이 내세운 "개량주의 반대" 투쟁보다는 "전 인민 속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중노선을 강화한다. 따라서 애국적 민족 부르주아지, 소부르주아지, 인텔리를 포함한 광범위한 인민을 민족 해방 운동에 견인한다는 방침 아래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과 더불어 반제 반전의 인민전선 운동을 전개한다. 인민전선 운동에서 이주하는 조직을 담당하고 최용달과 이강국은 운동자금 및 좌익문헌 입수를 맡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자위대같은 행동대를 조직하여 무장봉기를 위한 계획까지 세워졌으나 1938년 10월 조직원들이 대거 검거되어 와해되고 만다. 이강국 역시도 원산 철도국 파업 조종 혐의로 피검되어 투옥된다.


3년간 옥고를 치룬 후 석방되지만 얼마 후 재차 구속되어 그 이듬해인 1942년에 석방된다. 이강국이 석방되던 1942년은 일제의 극악스런 파쇼통치로 사회주의 운동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암흑기였다. 민족 개량주의 우파세력은 아예 대놓고 조선의 혼과 얼을 유린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었고, 좌파 진영에서도 전향자가 속출하여 일제의 "반공 캠페인" 도구로 전락하거나 전향하지 않는 자들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죄다 지하로 잠수를 타버린, 사회주의 운동은 거짐 씨가 말라버린 상황이었다. 원산노동 운동의 동지 이주하가 잠적하고, 경성콤의 이현상은 지리산으로 피신하고, 박헌영은 광주 벽돌공장으로 잠행해야 했던 시절이 그런 시절이었다. 석방 후 이강국은 일제의 패망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여운형이 1944년 8월에 조직한 비밀결사 "건국동맹"에서 책임자로 활약한다.

 

해방 후 이강국은 건국동맹을 모태로 발족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 서기장으로 피선되고 건준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자 인공 서기장에 선출된다. 일제말기 건국동맹을 거쳐 해방 후 건준 시기까지 여운형을 보좌했던 이강국은 여운형을 가리켜 "일본제국주의의 포악한 위협과 교묘한 회유속에서도 권위와 절도를 지키면서 지하의 투사, 지상의 신사로서의 전술을 겸비한 사람"이라고 추종하며 따랐는데 그랬던 그가 여운형의 중도좌파 노선이 아닌 박헌영의 극좌노선에 줄을 선 점은 납득하기 다소 어렵다.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한 박헌영은 그야말로 성골 스탈린주의자에 해당되지만 서유럽의 낭만과 지성을 호흡한 이강국은 극좌노선보단 중도좌파 노선과 궁합이 잘 맞을 사람인듯 싶은데 그의 행보가 의외이지 싶다.

 

일례로 건준과 인공시절 이강국은 여운형의 비공식(?) 비서격으로 여운형의 일거수 일투족을 밀착 수행하며 보좌했는데, 해방직후 여운형을 수행하여 서대문 형무소와 마포형무소에 수감중인 사상범과 경제범등의 석방에 입회를 하였고, 또한 여운형을 수행하여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을 방문해 8.15이후 경과에 대한 보고를 하는등 여운형의 오른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여운형에 대한 이강국의 각별한 애정은 1946년 7월 17일에 발생한 여운형 피습사건과 관련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테러의 배후로 지목했다가 이시영으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하였다. 여운형의 측근은 아니었지만 여운형과의 특별한 관계는 여운형을 이어 10년 후 대통령감이라는 장미빛 청사진이 나돌기까지 하였다. 이강국이 조선공산당 중앙 상임위 간부로 활동하면서도 여운형 노선과도 유대관계를 지속했던 것은 그가 겸비한 합리주의와 사상적 지향의 상호 작용이지 싶다.

 

박헌영 사단의 이승엽, 이주하, 이현상, 김삼룡이 박헌영의 수족과 몸통이라면 이강국은 박헌영 사단의 핵심 브레인이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내에서 정책 기획력으로 천재로 불리울만큼 천부적인 전략가였는데, 해방정국의 정치적 대립기에 조선공산당의 정책을 기획하고 분석하는 업무는 사실상 그가 주도하였다. 패기와 명석함을 토대로 안으로는 조선공산당의 최고 이론책이자 밖으로는 진보적 민족주의계열과 중도좌파계열을 아우르는 이강국의 정치적 역량은 해방정국에서 눈부시게 돋보였다.

 

이강국은 건준과 인공의 서기장을 거쳐 1946년 2월에 결성된 "민주주의 민족전선" 사무국장에 피선된다. 민전이 조선공산당의 외곽단체라는 지적이 있지만 5명의 의장단(여운형, 박헌영, 김원봉,백남운, 허헌)중 조선공산당 출신은 박헌영 한 명밖에 없었다는 점과 김원봉, 장건상, 김성숙, 성주식등 김구의 임정파도 민전에 합류하는 등 민전은 진보적 민족주의계열과 좌익계를 총망라한 대조직이었다. 이강국은 박헌영이 부정적으로 인식한 "좌우 합작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여운형과 보조를 같이 하기도 하는데 우파와의 타협을 전면 거부하는 조선공산당 외골수들에 비해 이강국은 우파와의 협상을 열어놓는, 유연한 정치감각을 소유한 보기 드문 인재였다.

 

1946년 9월 월북하기 이전까지 이강국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 투쟁을 전개하며 좌우합작을 통한 "민주주의 통일 임시정부" 수립에 열을 올리지만 미군정에 의해 체포령이 떨어지자 월북을 선택하고 만다. 이강국은 일제말기 자신과 동거전력이 있었던 내연의 여자 김수임의 집으로 피신하여 숨어지내다가 그녀의 도움으로 미헌병 사령관 차를 이용, 38선 밑 선죽교까지 당도하여 38선 길잡이를 통해 북한으로 넘어간다(김수임의 인생에 피박을 씌운 이 월북 사건은 이강국이 북에서 숙청 당할때 "미제 간첩"이라는 부메랑으로 날라온다. 남쪽에서 김수임은 이강국의 마수에 걸려들어 조국을 배반한 여간첩으로, 북쪽에서 이강국은 여자한테 빠져 국가기밀을 미국에 넘긴 미제 스파이로 처형당하는 아이러니한 운명과 조우한다).

 

1946년 9월 미군정의 좌익 검거령을 피해 월북한 이강국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북조선 인민위원회 초대 외무상, 북조선 최고 인민회의 1기 대의원(국회의원), 상업성 법규 국장, 인민군 병원장, 무역성 조선일반제품 수입상사 사장등 요직을 두루 거친다. 월북 후 1953년 숙청되기 이전까지 이강국의 정치여정은 역경과 풍랑을 비켜가는, 순탄한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온 듯 싶지만 크고 작은 위기에 몇 차례 몰린적이 있었다. 북조선 노동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 종파분자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 후폭풍은 1948년 수립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즉 공식 출범한 북한 정권의 내각에 등용되지 못하는 불운으로 이어진다.(박헌영은 외무상으로 이강국을 강력추천했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이강국의 북한내각 진입 실패는 그 개인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권력 지분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북로당(만주∙갑산파, 연안파, 소련파)과 남로당이 뜨거운 각축전을 벌려 겉으로 보기엔 4개파가 권력을 사이놓게 나눠 먹은 듯 싶지만 박헌영이 북한의 부수상겸 외무상에 취임한 걸 제외하면 북한내각에 등용된 남로당파는 사법상 이승엽, 노동상 허성택, 농업상 박문규에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강국을 위시한 남로당 계열은 1948년 공식 출범한 북한정권의 권력에서 상당부분 소외되었고, 막강한 권력의 핵심 요직은 김일성의 북로당이 장악한 형세였다고 봐도 무방하지 싶다.


이강국이 1950년까지 재임했던 상업성 법규국장 직책은 북한의 사실상의 정권수립으로 규정된 "북조선 인민위원회(1947년)"의 초대 외무상을 역임한 이강국의 빛나는 캐리어에 비해, 가오다시가 제대로 안서는 직책에 해당된다. 이강국의 몸값이 하락했다는 걸 증명해 주고 있는데, 그래도 이때까지는 권력에서 밀려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1950년 전쟁와중에 취임한 인민군 병원장과 1952년 취임한 무역성 수입상사 사장 직책은 이강국이 권력에서 급속하게 멀어져가고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한때 북한 정치권력의 노른자까지 점위했던 이강국은 1952년 말을 기점으로 한국전쟁 패배 책임을 둘러싼 권력투쟁에서 직격탄을 맞고 곤두박질 치고만다. 1953년 8월 6일 이승엽, 이강국, 임화 등은 미제국주의를 위해 간첩행위를 했고, 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 음모와 테러·학살 행위를 자행하였고, 공화국 정권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군사재판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오욕으로 지고 말았다. 


김수임과의 붉은 로맨스에 함몰된 채 남과 북의 역사에서 사라진 혁명가 이강국. 이강국에 대한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탓에 단편적 사실을 나열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해방정국에서 이강국의 활약상은 분명 박헌영을 능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수임과의 연애질에만 국한시켜 호사가들의 가쉽거리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 게다가 박헌영의 그늘에 가려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한 복판을 관통하고 있었던 이강국의 정치적 역량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일제시대 사회주의 혁명에 투신했던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현장경험은 생략한 채 코민테른같은 국제 조직에 의존, 강령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관념적 탁상머리 운동에 매몰되어 있을때 공장속으로 들어가 일선에서 노동자와 호흡한 이강국은 그 시대 관념적 좌파 지식인들과 확실히 비교가 된다. 이강국의 가장 큰 매력은 경성제국대와 독일유학파라는 매혹적인 "학벌자본", 즉 고등고시를 거쳐 판검사로 진출해 부와 권세를 요란하게 누릴 수 있었던 안락한 삶을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데 있다. 또한 노동해방과 인민해방의 전선에 섰던 자들이 일제의 극악스런 파쇼통치로 전향하거나 잠적하는 쓰라린 현실속에서도 그는 끝까지 혁명의 지조를 지킨 순결한 혁명가였다는 것, 혁명가 이전에 양심적, 실천적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그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싶다.  

 

김수임, 그녀의 진실은?

어제 밤 방영된 KBS 인물현대사에서 만난 그녀의 이야기는 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난 그녀의 아들, 채 한살도 안되었을 때 어머니를 잃은 김원일 목사는 시종 담담한 얼굴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김수임. 1911년에 태어났고, 십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민며느리로 팔려갈 뻔 했다가 그녀의 타고난 총명함을 알아본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고등학교와 이화여전을 졸업, 세브란스 병원에서 외국인 의사의 비서로 일한다. 불행했던 과거를 벗어나 사교적인 성격으로 주변 선후배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고, 당시에 흔치 않은 고등교육을 받은 직업 여성으로서 잡지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한다.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남자는 이강국. 경성제대 출신으로 독일 유학을 가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한 사회주의자. 89세가 된 김수임의 의붓 여동생은 말한다. "이강국은 우리 집에 놀러와 사진도 같이 찍곤 했었죠. 우리 언니가 나보다 키가 작았어요. 그런데 이강국은 아주 잘났어...얼굴도 희고... 그런 남자가 왜그리 조그만 여자랑 만났나 몰라.... 언니와 이강국이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이승만 정권에서 나까지 잡아갈까봐 모두 불태워버렸지..."

 

그녀처럼 옛이야기를 감춰두고 살았던 이화여전 시절의 후배가 어렵게 내놓은 한장의 사진에 김수임의 싸인이 보인다. "to my swee theart" 후배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스위트하트가 아주 많았어..그녀는. 그때 선배들이 참 후배들에게 어렵게 대했는데 김수임 선배는 달랐어.." 영어에 능통했고 외국인 의사의 비서 경력까지 갖춘 그녀는 해방 후 자연스럽게 미국인들과의 사교 클럽에 어울리고(당췌 모윤숙이 이런 클럽을 주도했다니 참.....) 당시 미국 헌병 사령관 베어드 대령과 사귀게 된다.

 

해방공간에서 좌익들이 모두 북으로 올라간 후 우익들의 세상이 된 남한에서 이강국이라는 좌익 거물과 사랑을 나누었던 김수임이 어떻게 비춰졌을 지는 자명하다.(그 이강국도 결국 1955년 박헌영과 함께 처형당한다...) 특히 '미모의 여간첩'이라는 설정에 심취한 건 예나 지금이나 선정적인 소재를 벌떼처럼 찾아다니는 건 여전한 언론들. 그녀가 재판 과정에서 아직도 이강국을 사랑하냐는 물음에 '아-니-요'라고 대답했다는 기사가 헤드라인으로 뽑혀 신문에 실렸다. 나, 김수임이라는 윤석화 주연의 연극에서도 그 대목이 클라이막스다.

 

그러나 어제 증언한 당시 재판에 참여했던 이의 증언은 다르다. 그녀는 자기를 아껴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겠다고 했으며 여전히 이강국을 사랑한다고 답했다. 그녀의 아들은 그게 바로 자기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라고 했다. 역사의 파도에 익사한 이가 자신의 어머니뿐이겠냐고. 그러나 어제 방송에 나온 것처럼 그녀의 인간적 면모를 되살리고자 한 는 소설, 이라는 연극에서조차 그녀의 간첩행위를 기정사실화한 것은 문제라고 생각된다.

 

특히 김수임을 사형에 처한 당시 재판 과정에 의문점이 많다는 사실이 어제 드러났다. 그녀가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기소당했지만 당시 그 법은 공포된 적도 없었고 그녀의 군법회의 판결문도 규정상 영구 보존돼야 하지만 현재 유실된 것으 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재판시작 3일만에 난 사형판결. 간첩행위를 동조해 처벌받았다고 알려진 베어드 대령도 실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으로 판결받았다니....

 

진실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인 것이다.

 

모윤숙 (1910.3.5~1990.6.7) : 드라마 상의 문석경 (소유진)

모윤숙,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문인이자 시인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모윤숙이 문인,혹은 시인이란 사실은 맞습니다 모윤숙은 190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지금의 이화여대를 졸업, 배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고 잡지사 "삼천리"에서 기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 작품은 "렌의 애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윤숙은 이러한 자신의 문필활동과 더불어 많은 정치활동을 합니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입단을 시작으로 친일부역행위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바꿔말하면 반민족행위에 참여했다는 얘기입니다.

이광수,최남선,서정주,이인직,김동인,주요한,유치환 등등이 그런 것처럼 결국 모윤숙도 일제와 타협의 길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지원병에게},{동방의 여인들},{어린날개} 등은 모두가 일제의 출정가격인 작품들입니다 모윤숙의 반민족문학활동은 8.15해방까지 계속됩니다.

{어머니의 힘},{내 어머니 한 말씀에},{여성도 전사다},{해군의 얼굴}, {꽃다발을 읽고},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모윤숙은 바로 미군정및 이승만과 유착하게 됩니다.  그후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모윤숙은 많은 공헌을 하게 됩니다. 당시 유엔한국위원단위원장인 인도의 메논을 회유한 일은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였습니다.  메논은 애초에 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했던 사람 입니다.

그런 메논이 갑자기 입장을 바꾸어 유엔에서 남한만의 총선거를 역설했던 것입니다.  여기엔 모윤숙의 역할이 지대하였습니다.

모윤숙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이번엔 공화당 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되기도 합니다. 다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문학진흥재단 이사장에 선임되고 삼일문화상까지 받습니다.  그리고 지난 1990년6월 82세의 일기로 사망 합니다. 

 

모윤숙은 사망할때까지 자신의 과오에 대해선 끝내 함구하였습니다 .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