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서 배울점이 너무도 많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도 결국은
오랜 역사속의 굴레와 다르지 않다는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으로 결국 나라는 작아지고
외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굽신거려야 하는 현실.
묘청의 난을 보며 현재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본다.
1135년 고려의 중 묘청은 서경(평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오랫 동안 진행되던 천도 계획이 한 순간에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임금 인종은 서경에 큰 명당기운(大華勢)가 있다는 묘청의 진언에 따라 그곳으로 친히 방문했다. 그리고 지세를 살핀 뒤 평양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1129년(인종 7년)에 마침내 새 궁궐인 대화궁이 완공되어 왕이 다시 서경으로 행차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권신이던 김부식은 서경 천도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개경에서 터를 잡고 있는 보수세력들이 김부식의 주장에 합세해서 인종을 설득했다. 묘청은 요승(妖僧)이며 본디 서경에 뿌리를 둔 자로 개경의 기득권들을 물갈이하여 권력을 차지하려는 음모를 부리고 있다고 김부식은 주장한다. 권신들의 줄기찬 주장에 인종은 마음이 흔들리고 드디어 천도 중지명령을 내린다.
묘청이 인종을 설득했던 주장은 이렇다. "신 묘청이 서경의 임원역 땅을 보니, 이는 음양가에서 말하는 대화세입니다. 만약 궁궐을 세워 이곳으로 옮기시면 천하를 합병할 수 있을 것이요,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다 신하가 될 것입니다." ('고려사') 이런 주장과 함께 묘청은 왕에게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쓰기를 권했고 금을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종은 묘청의 이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15개 항목의 유신정교를 선포하기도 한다. 서경 천도에 제동을 걸었던 김부식 일파는 묘청의 북벌(北伐) 주장에 대해 오랜 사대(事大)의 전통을 위반하는 삿된 생각이라고 몰아부친다. 묘청의 정책들은 나라의 안정을 크게 해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같은 갈등은 결국 파국을 부른다. 묘청은 서경 천도가 좌절되자 서경에 나라를 세운 뒤 국호를 대위국, 연호를 천개로 선포한다. 그리고는 개경을 향해 진격한다. 이같은 서북인들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나선 장군은 김부식이었다. 묘청 캠프에선 조광이란 부장이 배신을 해서 묘청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항복한다. 이로써 1년 만에 이 난은 진압된다. 묘청 캠프에는 정지상이라는 당대의 스타시인이 있었다. 묘청을 인종에게 소개한 사람은 원래 정지상이었다. 그 또한 난리 중에 김부식에게 죽음을 당한다. 묘청에 대한 기록은 김부식에 의해 철저히 누락되고 왜곡된다. 중국이 사마천의 사기를 통해 춘추전국을 읽어야 했듯이 우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통과하지 않고 삼국시대를 만날 수 없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묘청을 '반역전'에 올려놓고 맘껏 욕했다.
묘청의 난이 새로운 관점으로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신채호에 의해서이다. 그의 조선사 연구초에는 대략 이렇게 되어 있다. "서경의 싸움을 역대 사가들이 다만 김부식이 반적을 친 싸움으로 알았을 뿐이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 이 싸움은 낭불(郎.佛) 양가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과 한학파의 싸움이다. 또 독립당과 사대당의 싸움이고, 진보 대 보수의 대결이다.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다. 이 싸움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에 정복되고 말았다. 그러니 어찌 이 싸움을 한국 천년사의 가장 큰 사건이라 하지 않으랴."
헌재가 내린 위헌 결정에 대한 파문을 보면서, 약 900년 전에 벌어진 저 천도 갈등을 곱씹어 보는 건 어떨까. 진보와 보수가 죽기 살기로 싸웠던 저 혼란의 시대를 살펴, 충고말을 얻어낼 순 없을까. 천도가 기득권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이 되고, 또 지역간의 이익이 교차하는 점 또한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묘청이 요승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가 역사에서 패배했을 뿐이기 때문이라는 신채호의 지적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천도 갈등은 복잡한 정치 사회적 계산과 맞물리고 또 정치 노선과 외교도 거기에 다시 얽혔다. 물론 상황을 맞비교할 수야 없지만 닮은 점이 꽤 있다. 그런 것에서 교훈과 통찰을 끌어내지 못하고 내내 같은 비극과 소모전을 되풀이하는 것이 '역사 치매'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