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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양이 맅풕.

유대현 |2006.08.22 18:59
조회 11 |추천 0

가계부를 적고 있을 때였다.

언제나 그렇듯 맅풕은 조용히 나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맅풕은 등을 약간 구부리고 가슴은 당당하게 펴고 앉아있다.

꼬리는 오른쪽으로 엉덩이에서 뒷다리의 허벅와 발바닥의 최외곽면으로 보드랍게 말려져 있다.

꼬리의 끝은 왼쪽 발다닥 앞에 살짝 닿아있다.

나는 가만히 맅풕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귀엽다거나 귀찮다는 시선은 아니다.

그저 맅풕이 저기에 있구나 하는 정도.

그때 갑자기 맅풕이 말했다.

 

 "슈퍼에서 샀던 물건들이 생각이 안나는 모양인데 내가 가계부를 적어줄까?"

 

음....무척이나 자연스런 음색이다.

보통의 고양이들이 내는 그런 고음도 아니다.

어떻게 된 것이 고양이가 중저음의 목소리를 낼수가 있는거지??

나는 대답했다.

 

"응, 기억이 안나. 네가 기억하고 있다면 네가 적어주길 바래."

 

맅풕은 슬그머니 나를 밀어내더니 자연스럽게 가계부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볼펜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발과 발톱을 이용하여 솜씨좋게 글을 쓴다.

글은 목소리만큼이나 매력적이다.

 

'오...어쩌면 나보다 낫군.'

 

맅풕이 말한다.

 

"오징어 땅콩과 점심을 먹을 때 강냉이를 팔러 왔던 할머니에게 껌 산 돈 천원은 식비로 넣을까? 아님 그냥 주전부리로 넣을까?? 이웃돕기??? 내 생각에는 새로 태어날 천사를 위한 기부라고 써넣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점심을 같이 먹었다고 하니까 분명 오징어 땅콩은 오징어와 땅콩에 매료되어 있는 같은 과 여자 후배이다. 그녀는 신입생 오리엔테니션에서 자신은 지금 오징어와 땅콩과 사랑에 빠졌으니 혹시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더라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또박또박 말했다. 꽤나 반반한 얼굴이라서 바로 대쉬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녀의 사랑은 단호했다. 왕따가 되어가던 그녀와 내가 친해진 건 순전히 그녀의 이기심때문이었다. 열람실에서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집으로부터 도망을 나왔던 나는,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해서 잠이 들었다가 밥 때를 훨씬 넘겨서 공복을 채울 겸 오징어 땅콩 과자를 먹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오징어와 땅콩과 사랑에 빠진 줄로만 알았지 그 과자까지 사랑을 품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아무튼 나는 그로써 그녀의 마음에 들게 되었고 가끔 시간이 맞으면 점심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되었다. 그날의 메뉴는 생각하지 않아도 오징어 덮밥이었을 것이며 추가로 땅콩 조림을 다섯 번은 리필했을 것이다.

내가 말했다.

 

"좋은 제목의 지출명목이야. 좋아, 그걸로 써줘."

 

맅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글을 적는다.

이제는 자세가 조금 바꼈다.

두 앞발을 앞으로 해서 왼쪽 발로 가계부를 누르고 오른 발로 글을 쓴다.

즉, 엎드려 있다.

꼬리는 이제 부드럽게 허공을 s자로 움직이고 있다.

가계부 쓰는 것이 즐거운지 갸르릉 거리고 있다.

 

맅풕은 삼개월 전부터 내가 키우는 고양이다.

전날 먹다남은 닭고기를 정리하다가 집 앞에 엎드려서 조용히 날 바라보는 고양이가 있어서 뼈를 발라 고기를 물려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 전날 닭고기를 먹으면 다음 날은 반드시 그 자리에서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깨끗하게 발라먹은 날에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남지 않았어. 배가 고파서 아주 깨끗하게 먹어 치워버렸거든. 그렇다고 해도 오늘 니가 배를 주리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언제부턴가 의식적으로 술안주는 닭고기가 되었고, 먹기전에는 반드시 한 조각 정도는 고양이의 몫으로 남겨두고 다음날 뼈를 발라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 고양이 앞에서 닭 뼈를 바르고 있을 때 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에서 살래?"

 

물론 농담이었다.

맆풕은 도도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애교와 어리광이라고는 없는 놈이었다.

감사하다는 야옹 소리도 없이, 한 번 돌아보는 일도 없이 고기를 먹고 가는 놈이었으니까.

그날도 그렇게 고기를 먹이고 난 간다며 일어서서 집 문을 여는데 나보다 먼저 고양이가 들어간다.

그리고는 옛날부터 봐뒀던 자리란 듯이 제일 아랫목에 자리 잡았다.

난 순식간에 제일 좋아하던 아랫목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자, 다 적었어. 확인해봐. 아마 빠진 건 없을꺼야."

 

그렇게 말해놓고 오랫만에 인간의 말을 하고 글을 써서 피곤하다는 듯이 기지개를 한 번 켜더니 아랫목에 들어가서 잠을 잔다.

왜 잠을 자려는데 기지개를 켠 걸까하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난 가계부를 확인한다.

정확하다.

중간에 새로 태어날 천사를 위한 기부라는 글씨가 보인다.

난 어느새 깊이 잠들어 있는 고양이를 본다.

그리고는

 

'내가 생각이 안나서 고양이가 사람의 말을 하게되고 대신 가계부를 적어주는 일은 어쩔 수가 없는 거야.'

 

라고 생각한다.

난 주섬주섬 내일의 시간표 대로 책을 챙긴 후 맅풕 옆에 눕는다.

맅풕의 숨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맅풕을 품안으로 끌어들인다.

맅풕은 나의 팔베개를 베고 있다.

맅풕은 한 쪽 눈을 잠시 지그시 뜨고 날 바라본다.

고양이의 눈은 정말 매력적이다.

다시 눈이 감긴다.

갸르릉 소리가 나면서 맅풕은 잠이 든다.

나도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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