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하셨어요?"
"......!"
팔뚝에 링겔주사를 꼿고 누워있는 미선의 얼굴은 창백하고 죽은 사람의 그것을
보는듯했다.
"언니. 왜 그랬어? 얼마나 걱정했는줄 알아?"
"그래요. 이건 옳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선주가 울상으로 말하고 추림이 이어서 말했는데도 미선은 묵묵부답이었다.
다행이었다.
미선이 자살할 심산으로 용산에 위치한 한강둔치에서 물로 투신했을때 운동하던 한때의
무리가 지나치다가 발견하고 구해낸 것이다.
그녀의 고향집에 연락을 해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추림은 일단 미선을 설득하고 마음을
엿 볼 생각이었다.
"산사람은 살아가야 하는것이 의무입니다. 미선씨가 이렇게 갔다면 아마 가장 슬퍼할
사람은 대준과 가족들일 겁니다. 할일이 산더미지 않습니까?"
추림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선주나 말하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자는듯이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자는 사람은 지금 미선처럼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추림은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한번 절망에 빠진 자의 넋은 쉽사리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법이다.
기억과 상처의 잔재가 오래도록 남아 그 자신들의 생명력을 갉아 먹는 것이다.
"가고 싶었어요! 그의 곁으로 가고 싶었어요."
문득 미선의 입에서 나직한 푸념같은 말이 흘러 나왔다.
"가면요? 가면 그가 반갑게 맞아 준답니까? 그는 이런 미선씨의 행동에 무척 실망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 언니. 언니의 이런 행동을 대준 오빠도 원하지 않을거야. 너무 바보같잖아."
"살아 갈수가 없어요. 답답하고 무섭고, 두려워요. 온통 그의 흔적뿐인 이세상을 혼자의
힘으로 도저히 견딜수 없었어요."
추림의 미선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단순히 그가 그리운 것만으로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혼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아픔이란 육신의 상처보다 몇배는 더 지독하게 느껴졌다.
육신의 상처는 아물지만 마음과 정신의 상처와 황폐함은 쉬이 아물지 않는다.
끝임없이 고통을 느껴야 하고 수도없이 치료해 나가지만 그럴수록 더욱 진하게 커지는
상처가 내면의 그것이었다.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시골에 연락해서 가족들을 오라고 해야겠어요. 미선씨.
전화번호 좀 알려 주세요. 미선씨의 이런 모습을 가족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
엄포용 말이다. 그녀에게 함부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추림의
의도였다. 미선의 얼굴이 조금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은 추림은 미소를 머금고 다시
입을 열었다.
"미선씨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가족들은? 부모님들이 편하고 즐거우실줄 알았어요?
부모 보다 먼저 죽는것도 불효라 했어요. 하물며 생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자식을
부모가 어찌 받아 들이겠어요. 다시는 이런 미친짓 하지 말아요."
"힘들었어요. 견딜수 없을만큼 힘들어서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했는데...
왜 살아났는지 모르겠어요. 날 왜 구했는지 이제 어쩌라고!"
"살아야 할 운명이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어서 입니다. 신이 정해준 거죠.
대준도 그랬을 겁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견디어내야 합니다. 미선씨의 일은 무척
유감이지만 단 하나의 죽음이 얼마나 커다란 풍파를 불러 오는지 아십니까?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래 언니. 나 놀랬단 말이야. 어떻게 그럴수 있니? 다시는 이러지마!"
미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려가며 선주가 투정을 부리듯했다.
미선의 상태는 거의 정상적이었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아서 나약해져 있는 것 빼곤
모든게 좋았다.
"저랑 약속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말입니다.
대준의 일 하나만으로 저는 힘든만큼 힘든 놈이었습니다.
미선씨마저 이러시면 제가 먼저 죽어 버릴겁니다."
"미안해요. 모든게 싫었어요. 그가 보고싶고... 너무 지쳐 있었거든요.
내가 바보같은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편했어요. 그에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가 않았거든요. 미안해요. 추림씨. 부담드려서 죄송해요."
"미안한건 미안한거고 약속이나 하세요. 또 그럴거예요? 어서 말씀하세요."
"......!"
"언니 어서 말해! 안그런다고. 굳게 약속하란 말이야. 다시는 안그런다고!"
선주가 다그치듯 미선을 종용하며 대답을 들으려 했다.
한숨을 내쉬고 추림을 응시하던 미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입으로 말하세요. 무엇을 하나 걸고요. 시시한거 말고 가장 큰 무언가를 걸고
약속 하세요."
"알았어요. 엄마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요. 다신는 그러지 않겠어요."
일렁이는 눈빛으로 미선을 바라보던 추림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한번의 경험은 두가지 경우를 낳는다. 다시 시도하거나 다시는 생각지도 않거나 하는
경우의 수를 낳게 되는 것이다.
후회할지도 모른다. 힘들어 충동적인 죽음을 택했지만 살아난 목숨의 의미를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
"좋아요. 어머니 이름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겠지요? 저랑 약속한거 백년만 지키세요.
더 바라지도 않을 것이니. 딱 백년만 지키는 겁니다."
"피이. 사람이 백년동안 어떻해 사냐?"
눈치없는 선주가 추림의 말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얼굴을 구기고 선주를 노려본 추림이 야단치는 시늉을 보이자 선주가 헤벌쭉 거리며
웃었다.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미선이 힘든지 잠이 들었다.
일찍 가기 뭐해서 병원 구내 식당에 들러 밥을 사먹고 선주의 장난을 받아 줘가며
세시간을 더 머물고 미선에게 건강하란 인사를 남기고 병원을 나섰다.
오늘 하루만 머물고 내일 퇴원할 것이다. 곧 익숙한 자리로 돌아가겠지만 한동안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맞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추림이 선주에게 작은 머리핀 셋트를 사주었다.
칠월이면 선주는 미국으로 출국하게 된다.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수도 있었다.
일요일의 시간이 지나갈수록 선주가 초조해하고 다급해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조급해진 것이다.
아직 출국할 날은 많이 남았다 할 수 있지만 당장 헤어져야 하는 현실은 기정사실로
굳어져 있어서 미련이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곳을 돌아다니자 떼쓰고 먹었던 밥을 또 먹자고 앙탈 부리고 막상 그러자고
하면 그녀는 먼저 지치고 질려했다.
하는수 없이 술집에 들러 밤 열시가 넘도록 앉아 있었다.
추림을 바라보는 선주의 눈빛이 강한 집착을 담은채 일렁거렸다.
부담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든 추림은 오늘 만큼은 선주가 하자는대로 무엇이든
들어주기로 작정했다.
"너 왜 그렇게 바라보는데? 안 어울려 임마."
"내가 어떤데? 난 지금 널 그리고 있단 말이야. 머리속에 너의 모든것을 담아가며
그리고 있는 중이니까 뭐라고 하지마."
"내가 사진한장 줄까? 아니 그럴필요도 없겠네. 벌써 가져간 사진이 열장도 넘을텐데."
"알고 있었어? 히이. 난 모르고 있는줄 알았는데 들켰네."
추림의 앨범을 들추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열장이상 몰래 가져간 것은 진작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냥 모른척 하고 있었을 뿐이다.
"너 술 조금만 마셔! 오늘 너무 오바하는거 아니야?"
"아니. 안취해. 끄떡도 없으니까 날 좀 내버려 두실래요?"
끄떡도 없는것이 아니었다. 얼굴이 빨갛게 홍조가 피어올랐다.
선주의 주량을 알고 있는 추림이었다. 기껏해야 맥주 세병이면 그녀는 취한다.
소주는 반명이 주량이었는데 선주는 항상 자신의 주량을 착각하고 있었다.
"왜 오는데? 그냥 거기에 앉아 있지않고?"
선주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가 추림의 곁으로 다가왔다.
추림의 몸을 안쪽으로 밀치며 찰싹 붙어 앉은 선주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있었다.
운다.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추림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차라리 두개의 마음이 있다면 정말 그 중 하나는 선주에게 주고 싶을 정도로 그녀를
아끼는 추림이었다.
자신을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녀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공감하고
있었다. 외사랑은 슬프다. 와사랑은 힘들다. 외사랑은 혼자서만 외롭게 빛나는 법이다.
"추림이 사랑하는 여자의 일부만큼만 날 사랑해 주었으면 했어.
아주 조금만 그녀에게 대해 주는것 처럼 한번이라도 날 그렇게 해주었으면 싶었어.
이제 안된다는 것을 알았어. 그렇지? 안되는거지? 내가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던것 중
하나의 이유를 재공한 사람이 추림이야. 차라리 멀리 가버리고 싶었거든."
"무슨 소리야. 난 선주를 남처럼 생각해본적 없어. 이렇게 같이 친근하게 앉아 있잖아."
"바보. 누가 그런거 말이야? 나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지는 않잖아?
추림은 날 친구 로만 생각하잖아."
"아니야 난 많이 설레고 가슴도 두근거린다고! 봐. 만져볼래?
여기에 이렇게 뛰고 있는것은 그럼 뭘까?"
추림이 선주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가슴에 댔다.
장난칠 분위기가 아니지만 무거운 분위기를 원치 않아 추림은 진지해지려 하지 않았다.
힘들었다. 선주마저 자신에게 부담감을 주는것이 이제는 못내 두렵고 겁나게 느껴졌다.
떠나는 사람들! 남겨지는 사람! 힘들었다. 모두 온통 가려고만 하고 있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추림을 만나게 되면 어찌 대하게 될까? 지금처럼 이런 마음일까?
아니면 다른 마음일까? 가기싫어. 예전에 했던 말 그대로 그냥 네 곁에 머물며 지내고
싶은데... 역시 안되겠지?"
"......"
어떤 대답도 하기 싫었다. 죽거나 죽어가려 하는 자들 투성인 요즘에 정작 죽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모든것이 부담되었고 무거운 중압감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혼자이고 싶었다.
친구도 직장 동료도 심지어는 가족도 없는 혼자이고 싶었다. 자유. 올곧이 자유롭게
허허로이 살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무엇도 지니고 싶지 않았고 소유하고 싶지
않았다.
무소유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강제로 잡아가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헌데 자신의 삶은 오로지 강요와 억압앞에 놓인 운명처럼 여겨졌다.
피곤했다. 쉬고싶었다. 잠깐만이라도 편안한 휴식을 하고 싶었다.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날 선주는 추림에게 눈물과 한숨을 길고 길게 늘어 놓았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선주를 추림은 업다시피 해서 데려와 재울 수 밖에 없었다.
잠꼬대를 심하게 하며 선주는 추림의 품에 안겨 잠든 채 마지막 만남을 보내고 있었다.
그 마지막... 오랜 시간이 지나야 다시 만나지게 될 순간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 * *
1993년 6월 5일 토요일.
날이 이제 여름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주말은 날이 무척이나 따사롭고 맑았다.
박도형 부장과 이상열 부장이 단합대회를 한다며 논다고 하는 회사 사람들은 모두
불러 모았다. 오랜만에 회식을 하자는 말이 전해지자 일찍 일을 끝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었다.
여전히 우울하고 허무한 날을 보내고 있던 추림은 빠지려 했지만 사람들의 어거지에
떠밀려 참석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두시경에 근처 식당으로 모여든 사람의 수는 모두 아홉이었다.
점심을 먹으며 간단히 반주로 곁들기 시작한 술자리에 근처 회사사람 몇몇이 가세해
인원은 열을 넘어 버렸다.
술에 목숨거는 사람들 같았다.
일차로 식당에서 마시고 이차를 호프집에 들러오후를 보냈다.
삼차로 술 내기가 붙었는데 편을 나누어 당구장으로 향했다. 당연히 술 내기였다.
무려 오십만원을 건 그 내기에서 박도형과 추림이 낀 팀이 이기게 되었다.
저녁을 먹으려 해물탕 집에 들르고 다시 이어진 자리가 단란주점이 되었을 때는 저녁
아홉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어떤 이들에게 가혹한 운명의 시간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개봉동 동양공전 근처에 위치한 단람주점 블랙홀은 근방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고급화된 주점이었다. 물론 남영기업 사원들의 주 단골처였다.
내기돈과 따로 거두어 모아진 백만원이 오늘의 이벤트 비용이었다.
몇몇이 술에 취하거나 약속이 있어 떠나가고 사람들은 여덟명이 남았다.
"야! 너 어디가? 이새끼가 이리안와?"
추림이 몰래 빠져 나가려고 하자 박도형이 눈을 부라리며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피곤하고 지치고 술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거려 했는데 그에게 걸린 것이다.
박도형은 이미 어느정도 취기가 올라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해 있었다.
한번 마시면 끝장을 내는 두주불사형 인간이었다.
"나 그만 가면 안됩니까? 형님들끼리 노시던지 하세요. 여긴 제가 낄 자리가 아니잖아요.
쪽팔려서 같이 못 놀겠네. 아가씨들 앉혀놓고 노는거 제가 싫어 하는거 아시면서.
저 그만 갈랍니다."
"이게 죽으려고 용을 써라! 이새끼야 형님들 노는데 니가 수발해야지 가긴 어딜가!
이리와서 죽치고 있어. 딱 한시간만 있다가 가라."
"니기미. 내가 무슨 조선시대 하인도 아니고... 제기랄거!"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은게 사실이어서 삐띡한 말을 내뱉었다.
"뭐라고? 신발놈이 엿까고 있다고?"
이 인간이 또 성질 더럽게 나오려고 한다. 추림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가서 앉아
버렸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넘쳐났다.
넓고 화려한 곳이어서 늘 만원이 이곳은 사실은 불법 영업의 온상 같은 곳이었다.
허가는 2종인데 영업은 1종중에서도 특 1종으로 하고 있었다.
걸리면 엄청난 벌금과 함께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지겠지만 안전장치없이 술장사 하는
사람 드문 법이다.
양주와 맥주를 테이블이 넘치도록 주문하고 벌써 스테이지로 걸어나간 사람들이
아가씨들을 끼고 음악에 맞추어 되지도 않는 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다른 손님들과 엉키고 설키어 가며 노는 꼴들이 모두 하나같이 그놈이 그놈 같았고
좁아터진 홀이 부담될 지경이었다.
커다란 룸이 네개가 있었지만 손님들이 들어차 홀에서 놀게 된 것인데 박도형과 이상열
부장은 그것을 가지고 불만스러워 하다가 술값을 내려치는 구실로 써먹어 버렸다.
감흥이 일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절대 빼거나 하지 않을 추림이었지만 요즘 그의 심사는 매우 복잡하고
기복이 심했다.
흥미를 잃어버린 매사속에 그가 추구할 것은 오로지 고독이었으므로 이런 자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술을 홀짝이고 있을 때 한떼의 손님들이 몰려 들어 왔다.
모두 하나같이 건장하고 비슷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는데 건달들로 보였다.
마담과 지배인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하며 얼마 남지도 않은 자리를 만들었다.
느낌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또 어디 가려고?"
이 인간은 어찌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것 같았다.
전화좀 하려 밖에 나가려 했는데 어느새 다가왔는지 박도형이 베베 꼬이는 발음으로
물어왔다.
"전화좀 하고 올게요. 안가요. 바로 앞이니까 금방 올게요."
"너 가는거 아니지? 가면 죽음이다."
"참나. 뭐가 무서워서 내가 간다고? 놀고 계시라고요. 나갔다가 올게요."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정말로 전화할 생각이었다. 유미의 집으로 더 늦기 전에 전화해 보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었지만 또 모르는 일이라 생각했다.
지하인 블랙홀을 나와 바로 입구 앞에 놓여진 공중 전화로 향했다.
아무래도 술에 취했나보다. 이렇게 심란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밤늦게 전화할 생각을
하다니. 이런적은 드물었지만 최근에 그렇지가 않았다.
어제도 했었고 그제도 했었다.
할때마다 유화가 받아 부담은 덜 했지만 여전히 유미의 소식은 들려 오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리자 역시나 유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추림씨. 또 술마셨어요? 안마신다 그랬잖아요.-
유화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하고 친근했는데 추림은 그런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지껏 소식이 없다면 찾아 봐야 하는거 아닙니까?"
-찾아 봤어요. 고향에도 연락해 봤고 친구들에게도 물어 보았지만 모른다고 해요.
잘 있겠지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유화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언니 유화는 알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유화가 모른다고 말하고 있으니 대놓고
물어보기가 부담스러웠다.
"저 사실은 무척 힘들어요. 누구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답답합니다.
유미씨가 왜 사라졌는지 이유라도 안다면 덜 할텐데... 이건 너무하다 생각됩니다.
저 돌아 버리겠습니다."
이런말은 처음이었다. 울컥거리는 무언가가 치밀어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마음이 또다시 울렁거렸다. 눈가가 시큰거리고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추림씨 절 한번 만날래요? 만나서 그냥 이야기나 해 볼래요?
답답한 마음 들어 드릴께요. 어때요? 그럴수 있나요? 전 유미의 언니잖아요.
둘이 서로 좋아하는 것을 이해하고 잘 알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
울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달랜 추림은 차라리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유화라도 만나서 실컷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고 싶었다.
"예. 그럴수 있다면 저도 좋겠습니다."
-좋아요. 이번주는 안되고 다음주 주말이 좋겠네요. 연락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술 많이 안마실 겁니다. 이제 그만 들어가는 중입니다.
네. 안녕히 주무시고요. 제가 전화 드리지요."
공중전화에서 나온 추림은 길가에 앉았다.
이제 더는 견디지 못할것 같았다. 너무 황막한 시간들이 악몽같이 흐르고 있었다.
양미선 그녀처럼 차라리 그런 결심이라도 했으면 싶었다.
유미가 걱정되기 시작했고 나쁜꿈을 자주 꾸곤했다. 현실에 집착한 것이 꿈에 나쁘게
나타난다지만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위 눌린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직접 경험도 하게 되었다. 정말 공포스러운
순간이었다. 무언가 무서운 형상이 나타나 밤새 괴롭히고 성기아 다녔다. 아무리 도망가고
숨어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 들었고 목숨을 해하려했다.
이토록이나 사람을 그리워 할 수 있다니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인지 어렵기만 했다.
귀찮고 피곤했다.
이대로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게 낳을듯 싶었다. 일행들과 박도형 부장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내일이면 까맣게 잊을지도 모른다. 조금 망설여지는 마음에 잠시 어떻해 할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 가는게 나을듯 했다.
느낌도 별로 안좋았고 무척 지치 느낌이었다.
추림이 담배를 피우며 집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야! 추림아!"
뒤에서 다급하게 크게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 추림은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회사 동료로서 자신을 잘 대해주는 형이었다.
"이추림! 큰일났다. 싸움났어! 급해 빨리 가봐야겠다. 너 한참 찾았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중심을 잡으며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추림을
바라보았다.
"싸움요? 누가요?"
"몰라 누군지는, 깡패들 같은데 지금 박부장님하고 근형이 형님이 난리도 아니다.
엄청나! 벌써 꽤 지났는데 몰랐어?"
다시 블랙홀 방면으로 빠르게 걸었다. 싸움이라도 별일 아닐거라 생각했다.
헌데 한참이나 된 싸움을 모를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무겁고 등곯이 으스스해져 오는것이 예감이 좋지 않았다.
지하를 내려가기도 전에 엄청난 고함과 소음들이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빠르게 계단을 건너 뛰며 내려간 추림은 블랙홀로 순식간에 들어섰다.
소란은 더 크게 들리고 씨끄럽던 음악은 어느새 멈추어져 있었다.
"맙소사!"
난리도 아니었다.
회사 동료들과 아까전에 들어왔던 건장한 사내들이 뒤엉킨 채 가게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가며 날뛰고 있었다.
싸움은 세군데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중 박도형 과장의 싸움이 가장 치열하고 거칠었다.
박도형은 거구라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덩치를 지닌 남자였다. 쉽게 말해 씨름판에서
구분된 백두급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빨랐다.
그런 덩치에 박도형은 살인 무술을 지닌 사람이었고 한때는 건달로 활동한 적이 있는
특이한 이력의 존재였다.
그런데 그가 밀리는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키는 박도형 부장과 비슷해 보였는데 몸놀림이 레슬링을 익힌
자세였다. 낮은 자세가 그랬고 방어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폼이였다.
상체를 드러낸채 한 남자와 치고 받고 있는 박도형은 어느정도 버틸듯 보였다.
문제는 다른 쪽이었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두군데서 벌어지는 싸움에서는 회사 동료들과 근처 회사의
사람이 힘겹게 싸우고 었었는데 이쪽은 겨우 네명이고 저쪽은 다섯이었다.
말려야 했다.
"멈춰! 새끼들아!"
추림이 다급하게 고함을 지르며 회사동료가 일방적으로 구타당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멈추라고 했잖아!"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추림이 막 한대를 얻어맞고 뒤로 밀려나는 회사 사람의 등을
떠 안았다. 추림의 등장과 고함에 잠시 추춤한 건장하 사내가 곧 추림을 향해 기세를
올리려고 했다.
"그만! 이새끼들 그만안해! 거기! 신발놈 움직이지마!"
어찌나 고함이 컸던지 달려들던 놈이나 다른쪽에서 싸우던 이들이 순간적으로 행동을
멈추어 세웠다.
"억! 추림아 저기......!"
갑자기 조금전의 그 형이 추림을 부르며 손가락으로 박도형 부장쪽을 가리켰다.
그쪽을 무심코 바라본 추림의 눈에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상체를 드러내고 언제 빼들었는지 혁띠를 꺼내들어 연장대용으로 휘두르던 박도형의
옆구리 어림을 상대하고 있던 놈이 깨진 병으로 찍어가고 있었다.
"......!"
마치 영화의 슬로모션처럼 아주 느리고 또렷하게 그 장면이 눈에 가득 차 올랐다.
깨진 술병이 박도형의 옆구리에 그대로 찍히고 박도형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며 손을
휘둘렀다.
박도형의 옆구리가 찢어지면서 붉은 피가 허공으로 튀고 상대하던 놈은 뒤로 밀려
넘어졌다. 비틀거리는 박도형이 술취한 사람처럼 중심을 잃었다.
튕기듯 일어난 놈이 박도형에게로 다가가며 주먹을 말아쥐는 모습에서 슬로모션같은
광경은 사라지고 다시 현실로 보여졌다.
"억!"
놈의 주먹에 얼굴과 가슴팍을 얻어맞은 박도형이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그만!"
추림이 다시 도발하려는 사람들에게 소리치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가씨들과 종업원 그리고 손님들은 한쪽 구석에 모인 채 떨고 있었고 싸움에 가담하지
않은 몇몇은 멀건히 구경만 하고 있었다.
개자식들이다. 큰 소리만 칠 줄 알았지. 동료가 당하는데도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해! 모두 그만하라고! 형 박부장님안테 가서 상태를 살피고...
거기 그만하자니까! 다시 할꺼야?"
추림이 사납게 부르짖으며 사내들을 훓어 보았다.
냄새가 다른 놈들이다. 소위 말하는 생양아치들이 아니다. 이들은 전문 주먹들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한두명은 다른 모습이다. 말쑥한 정장 차림이 싸구려도 아니고
흔한 것도 아니었다.
"넌 뭐냐? 어린자식이 어따대고 깝치냐? 이새끼 죽어볼테냐?"
한놈이 추림의 언동에 기분이 상했는지 거칠게 말해오며 다가왔다.
물러설 추림이 아니다.
"엿까지 말고 이제 쌈질은 그만하자. 니들도 알아서 놀던지 해라. 애들도 아니고
술처먹다 쌈질이냐? 양아치들은 아닌듯 보이던데 알고 보니 양아치였나?"
이미 싸움은 멈추었다. 그러나 한쪽이 기가 밀리면 이 상황은 일방적인 게임이 된다.
추림이 도발적인 말에 놈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아쭈? 좀 까불줄 아......"
"추림아! 부장님이 죽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말에 주위는 싸늘한 침묵에 휩싸였다.
박도형 부장에게 갔던 형이 외친 소리에 그렇게 되고 말았다.
박도형 부장에게 몇 걸음 다가가던 순간 몸이 부들거리며 떨려오기 시작했다.
주먹이 저절로 말려 쥐어지고 어금니를 힘껏 소리나도록 악물었다.
피에 잠긴 채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박도형은 입을 벌린 채였다. 기척이 안느껴졌다.
추림의 정신이 하얗게 비워져가고 사물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떠들고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지만 소음들은 웅웅거리며 울렸고 움직임은
반투명한 커튼 뒤에서 움직이는 사물처럼 보여졌다.
추림의 동공이 축소되고 실핏줄이 드러났다.
추림의 분노가 깨어나고 있었다.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야수성이 지친 방황의 길 위에 놓여있던 순간을 틈나 너무도
쉽게 깨어나고 있었다.
잔인한 운명이 다가오고 있는 그 날, 추림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야수가 되어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44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