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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KAL 여객기 폭파 사건, 조작인가 진실인가

김영종 |2006.08.27 19:58
조회 344 |추천 3

KAL 여객기 폭파 사건 개요
아래 내용 정리는 한겨레 21 2003년 11월 기사에서 참조한 것입니다.
http://h21.hani.co.kr/section-021014000/2003/11/021014000200311190485063.html

1987년 11월 29일.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우고 바그다드를 떠나 서울로 향하던 KAL 858기가 버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실종.

승객은 대부분 중동 건설현장에서 수년 동안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건설 노동자들. 

현지조사에 나선 한국 정부, 국가안전기획부를 통해 언론에 ‘북한 테러설’을 흘리기 시작.


사건 발생 이틀 뒤, 바레인을 탈출하려던 폭파범 용의자 중 한명인 김현희(일본명 하치야 마유미·당시 24살) 생포, 공범인 김승일(하치야 신이치)은 독약 앰플을 깨물어 자살.

당시 한국에선 대통령 선거가 한창 진행 중, 전두환의 독재정권 시대가 끝나고 ‘6월항쟁’을 계기로 군정 종식과 민주적 정권교체의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안기부는 대선 하루 전인 12월15일 김현희를 서울로 압송. 이 압송 장면은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고, 다음날 치러진 대선에서는 ‘12·12 및 5·18의 주역’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13대 대통령에 당선.

수사를 주도한 안기부는 1988년 1월15일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의 김정일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 공작원 김현희에게 친필지령을 내려 KAL 858기를 폭파시킨 사건”이라고 발표.

김현희는 살인 등 혐의로 기소된 뒤 1990년 3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 그러나 정부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살려두는 것이 정치·외교적으로 효용 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 한달 만에 김현희를 특별사면.


의혹들
아래 내용은 KAL858기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측 주장을 정리한 것입니다.
(http://www.kal858.or.kr/main_kor.htm)

김현희는 북한 사람이 맞는가? 

1. 김현희가 어릴 적 평양에서 찍었다는 꽃 주는 소녀(화살표가 가리키는 사람). 김현희는 두 차례나 자신이 아닌 화동소녀를 자신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는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국정원은 최근 김현희가 꽃을 준 사람은 이동복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 또한 거짓말이다. 

안기부는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증거로 김현희의 어릴 적 사진을 몇장 공개했지만 사진 속의 김현희와 실제 김현희의 귀 모습이 크게 다를 뿐 아니라(귀 모습은 지문처럼 법의학자들에 의해 그 사람의 신원을 밝히는데 쓰인다) 사진 속의 주인공임을 주장하는 북한 여성이 나타남. 당시 월간조선은 사진속 그 소녀가 김현희가 아니고 사실은 그 옆의 다른 소녀가 김현희라고 주장, 그러나 김현희는 그 옆의 다른 소녀가 자신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2. 김현희가 진술한 존재하지 않은 평양 주소 - 김현희가 1987년 12월 수사과정에서 밝힌 자신의 평양주소 ‘평양시 문수구역’은 83년 3월에 없어진 주소로 밝혀졌다.

3. 김현희의 아버지가 앙골라 무역대표부의 수산대표라는 사실 - 그런 직책과 근무자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국정원도 이를 시인했다. 

4. 김현희가 쓴 자술서에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북한에서 사용하는 단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북한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닌 것이 약 1백개나 됨. (예를 들어 자술서에서 `녀안내원` `오뻬라`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실제로 북한에서는 사용하는 단어는 `녀성 접대원` `오페라` 혹은 `가극`이라고 함)


김현희의 KAL기 테러 당시 행적은 왜 의문 투성이인가?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김현희, 김승일 이동경로와 KAL 858기 행로, 한겨레21 2003년 11월자

1. 김승일, 김현희의 모스크바-부다페스트 비행기편 - 김승일, 김현희가 탔다는 비행기편은 확인 결과 없었다.

2. 김승일, 김현희가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날인 1987년 11월 13일은 금요일로 평일이었다. 그러나 김현희는 <고백록>에서 “그 날은 토요일이어서 주변에 있는 고기집도 우체국도 모두 문을 닫은 채 휴업이었다”라고 기술.

3. 부다페스트의 비밀 아지트 전화번호라고 안기부가 발표했던 ‘164635’ 전화번호는 비밀 아지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유치원의 전화번호.

4. 빈에서 묵은 호텔의 방 번호가 암 파클링 호텔 322호실 이었는데, 603호라고 틀리게 발표.

5. 김현희는 아부다비에서 새벽2시45분경에 도착해서, 아침9시에 바레인으로 갔다. 아침9시 이전에도 김현희는 다른 비행기를 타고 아부다비를 떠나 유럽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게다가 바레인은 남한과만 단독수교를 맺은 국가이고, 대한항공의 중동진출 거점있었으며, 80년 중동전쟁 때, 교민 철수의 거점으로 활용될 만큼 남한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 남한 항공기를 폭파했다는 북괴공작원이 왜 북한대사관도 없는, 자신들에게는 극도로 불리한 지역으로 도망간 것이 의문.


KAL858기는 정말 폭파된 것인가?

1. 사고 당시 안기부는 "비행기 동체가 산산조각나서 잔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진술. 그러나 1983년 소련 공군기의 미사일에 의해 요격 당한 KAL 007기의 경우에도 비행기의 동체를 포함한 잔해 및 승객의 유류품들이 발견됐음. 게다가 1차 수색이 실패로 끝난 직후인 12월 10일 안다만 코코 제도 부근에서 미군 정찰기에 의해 부유물이 발견되자 수색팀과 함께 수색을 하자고 제의했으나 정부는 거절함.

2. 수심이 2천~3천미터 이고, 상어 떼가 득실거려 시신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한 발표 - 버마가 사고조사보고서에 밝힌 추락지점의 수심은 70미터 정도에 불과하고, 상어가 득실거리는 지역도 아니다. 

3. 90년 3월 사고발생 2년4개월여 만에 기적적으로 발견된 KAL858기의 동체조각들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미국 MIT 박사가 분석한 결과, 폭발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조각들 가운데는 김현희가 폭탄을 설치했다고 한 좌석 근처의 것도 있었다. 안기부는 그 동체조각들을 폐기처분했다.

4. 사고지점이 특정되지 않아 블랙박스 탐지장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발표. - 87년 12월 중순 - 블랙박스가 아직 신호를 보내고 있을 시점 - 경 이미 KAL858기의 추락지점에 대한 좌표까지 보고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해저수색이나 블랙박스 수색을 하지 않았다.

5. 안기부가 얘기한 사고지점과 버마가 작성한 사고조사보고서 상의 사고지점은 약200Km의 거리 차이가 있었다. 

6. ‘KAL858기 폭파’에 사용됐다는 폭약의 종류와 양 - 안기부는 콤포지션C-4폭약 350g을 라디오에 넣어서 폭탄으로 사용했다고 발표했으나, 라디오에는 폭약 350g이 들어갈 수 없고, 안기부도 임의로 폭약의 종류와 양을 추정했음을 시인했다.

7. KAL858기는 미국에서 수리 받고 나온 지 85시간 만에 사고를 당했고, 88년2월이면 퇴역할 비행기였음. 이런 노후기종을 바로 해외편에 운항시키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임. 게다가, 이 항공기는 1987년 9. 2 김포공항에서 앞바퀴가 나오지 않아 비상동체착륙을 하는 등 과거에도 두 번씩이나 기체결함으로 사고가 발생하였고 사고기 출항은 고장수리한 후 첫출항이었음.

8. 실종된 승무원 권미경양의 어머니에게 아부다비에서 교체된 승무원인 박은미양이 KAL 858기에 기름이 새고 있다는 무선연락을 들었다고 이야기를 했고 그후 사고소식을 들었다며 미경양과 친구인 은미양이 연락을 했음.

9. 안기부 수사보고서와 검찰 공소장 등에서 ‘공중 산산조각 폭발’로 표현했던 KAL858기 사건이 최근 국정원의 답변에는 ‘추락’으로 바뀌었음.

 

그 밖의 의혹들

1. 1987년 당시 실종자 명단이 호외보도, 최종보도, 재판 판결문에서 다 다르게 나타남.

2. 북한에 대한 제재결의안을 통과시키려고 소집한 유엔안보리 회의에서, 북한이 “아부다 비에서 남한 외교관 11명이 KAL858기에서 내렸다”라고 주장하며 KAL기 실종이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을 때, 왜 남한은 당시 승객명단을 보여주며 반박을 하지 못함.

3. ‘9시간 뒤 폭파’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중앙일보에 ‘9시간 뒤 폭파’가 보도됨. 

4. 88년1월15일 중앙일보에 실린 김현희의 자필맹세문의 용지와 내용 중의 ‘규율’이, 다음날 신문에 용지도 바뀌고, ‘규률’로 바뀜.

5. 실종유예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재판이 종결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교통부가 희생자 가족과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실종자들을 일괄 사망처리한 것에 의문을 가지며 황급히 사망자 처리함.

6. 바레인에서 김현희가 음독했다는 발표 - 김현희는 음독하지 않았음이 당시 현장에 있던 목격자, 의사들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김현희가 음독후 최초로 진찰한 바레인 살마나야 병원의 야코비안 응급부장은 마유미에게서 위 세척을 해도 독극물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며 김의 음독설을 부인함.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무엇을 해결했는가?

당시 노태우 정부는 숱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외면했다. 대신 정부는 유족들의 반대 속에 ‘실종자’들의 실종유예기간(항공기 사고는 1년)이 끝나기 전인 1988년 1월 사망신고를 직접 접수시켜 처리하고, 희생자 위령탑 건립을 밀어붙이는 등 이 사건의 후속 작업을 강행했다.

1987년 상기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됐으나, 그런 의혹들은 언론에 의해 철저히 묵살 당했고, 그런 주장을 제기한 사람들은 공안 당국에 의해 ‘불순분자’로 몰려 감옥으로 끌려가야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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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1988년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안무혁 한국발전연구원 이사장, 안기부 수사책임자였던 정형근 의원,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사건 재조사를 약속했던 이종찬 전 안기부장 (한겨레)

김현희는 사면 뒤 반공 강연회에 불려다니고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유명 인사’로 대접받았다. 노태우, 김영삼 정권 시절 안보강연, 신앙간증, 집필 활동 그리고 방송출연 등 다양한 대중공개활동을 함. 특히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는 3권 짜리 수기를 써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으며, 자신의 경호하던 남성과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고 행복한 삶을 살았음. 그러나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공개활동을 갑자기 중단.

1997년 김대중 정권의 출범 후 이종찬 국정원장은 1998년 10월 KAL기 사건을 ‘총풍 사건’(97년 대선을 앞두고 전 안기부 공작원과 청와대 행정관 등이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북한에 판문점 총격을 요청한 사건)과 함께 ‘북풍 의혹 사건’으로 지목해 재조사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유족들은 국정원 간부들이 자신들을 만나 얼토당토 않은 의혹을 계속 제기하면 북한과 연계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협박했다고 증언.

사건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김현희는 2003년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 현재 어디에 거주하는지조차 분명치 않음.

2004년 6월25일 대법원, 진상규명 요구하는 KAL858기 가족들을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김정일 프락치'라고 비방했던 이철승 자유민족회의 이사장에게 명예훼손 손해배상 명령 최종 판결.

2004년 6월28일 법원, 국정원의 <파괴공작> 판매금지 등 가처분 신청 기각 판결. 'KAL기 폭파산건은 역사적 사실로서 그 진상이 반드시 규명되어져야 할 사안'이라고 판결문에 명시

2004년 7월4일 천정배 열린우리당 대표, KAL858기 사건 재조사 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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