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X됐다, 피트 통 (It''s All Gone Pete Tong)

배경우 |2006.08.30 16:56
조회 72 |추천 2
http://www.itsallgonepetetong.com/


 역시 이번에도 스토리는 쏙 빼고 주관적 공감대만을 얘기해 보자. 모 광고에 보면 불가능은 아무것도 아니다, 영어로, Impossible is nothing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함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이 말을 '불가능은 없다'는 말로 오해한다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불가능이란 모두에게 항상 있다. 다만 얼마나 많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짐승보다 빨리 달릴 수 없던 불가능을 자동차라는 가능으로 만들었지만 새처럼 날 수 없다는 불가능이 그의 앞에 있었고 그것을 비행기라는 가능으로 만들었지만 또 다른 불가능은 항상 인간의 곁에 존재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불가능을 불가능으로 앎으로서 주변의 가능한 것들의 가능성을 찾으며 최종적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수영장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이동함에 있어 수영을 해서 가는 것과 걸어서 돌아가는 것은 똑같은 가능함이다. 이런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수많은 가능성들은 잊어버린 채 불가능이란 벽에 박치기만을 하며 고통스러워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불가능이란 벽. 그것은 때에 따라서 부숴버릴 수도, 넘어갈 수도, 돌아갈 수도, 또 다른 여러 가지 창의적인 방법이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불가능이 항상 존재하는 이유는 사실 불가능이란 우리가 상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능을 그 가까이에서만 관찰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이 세상보다도 큰 장애물로 보이고, 가능성이란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높은 하늘을 나는 자에게 불가능이란 저 멀리 아래에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맥가이버가 불가능을 직면했을 때, 그는 그 불가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FEEL받은 예술가의 손놀림처럼 그는, 주변 이곳저곳을 살펴 여러 가지 물건들을 적절한 곳에 사용하며 마침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냈다. 맥가이버가 여러 가지 물건을 사용하듯, 인간에게 있어 무에서 유를 창조함이란 엄밀히 말하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창조는 믹스다. 요리 하듯이, 재료란 우리가 세상에 있기 전부터 모두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잘 “섞을”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존재하는 음악의 샘플들로만 믹스를 하는 뮤지션의 작업을 독창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샘플’과 ‘독창성’의 의미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것은 피아노를 발명한 사람 외의 모든 피아니스트는 독창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믹스를 하는 뮤지션에게 있어 ‘샘플’이란 하나의 악기다. 그는 소리를 내는 악기 대신 소리의 한 묶음을 악기로 사용할 뿐이다. 독창성이란, ‘독창적인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닌 ‘독창적인 결과물’에 있는 것이다. 물론, 독창적인 재료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사람도 있고 그 자체도 하나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부터 자신만의 재료라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이런 독창성의 기초이론도 모르면서 작가나 작품에 대해 표절시비를 거니 마니 독창성이 있니 없니 비판하는 것들이 한국에 많이 있어왔다는 사실은, 한국의 예술수준이 이 정도밖에 발전하지 못한 대표적인 원인이다. 언더그라운드는 별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대중음악 같은 오버그라운드는 대중의 수준이 곧 그 수준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곳에 재미없게 본 영화를 REVIEW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의 좋은 것을 공감하고 싶다면 나도 좋은 것을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싶다. 좋은 것만 공감하기에도 SO MUCH BEAUTY 한 세상인데, 나쁜 것을 공감하며 서로 찡그리고 울어야 할 필요란 없다. 뉴스기사들에는 세상의 부정적인 면을 주제로 한 것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의 밑에 달린 꼬릿말들을 보면 그보다 더 비관적이고 열등적인 말들이 많았다. 그런 글을 쓴 이들도 마음속 깊은 곳에선 분명 그런 ‘낙오자의 꼬랑지’의 모습으로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긍정적인 기사 밑에서도 악플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칭찬하는 기사 밑에 같은 대상을 욕하는 댓글이 달린 것이 그 흔한 예다. 한국의 이런 문제는 인터넷사용률이 높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느 나라를 봐도, 이 정도로 악플이 많이 달리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고 ‘남을 비난하는 국민병’은 인터넷이 거의 없을 때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조금만 솔직하면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나는 가능한 비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한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라고 확신한다. 나도 아직은 이 국민병에서 100% 깨어나진 못했지만, 곧 완치되는 사람의 입장에서 내가 이 병에 관해 하는 말이 이것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어 언젠가 국민 대부분이 치료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우리가 비난하는 유일한 이유는 ‘남을 비난하고 싶어 하는 욕구’때문이며, 우리가 비난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바로 ‘남을 비난하고 싶어 하는 욕구’다. 이 분명한 사실을 인정해야 치료될 수 있다. 비난과 비판이 다르다는 생각 따위를 할 때가 아니다. 비판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힌다는 뜻인데, 비판한답시고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이 아닌 “그름만을” 가리어 판단하기 때문에 비난만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똑똑한 비판을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한 현상이 바로 이 국민병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깨어나서 옳음만을 가리어 판단하는, 즉 서로를 칭찬하는 붐이 일어난다면 선진국이 되어 앞서가는 건 단시간에 가능하다. 우리에겐 똑같은 양의 시간이 주어져 있다. 그 시간에 누구는 존경하는 사람의 홈페이지를 찾아 응원글을 남기고 그 사람의 좋은 친구가 되며, 같은 시간에 다른 누구는 증오하는 사람의 홈페이지를 찾아 악플을 남기며 그 사람의 귀찮은 벌레 한 마리가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 누구는 그 시간동안에 긍정적으로 살고, 누구는 부정적으로 산다. 이 들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 그것은 습관적으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자리하게 되며, 다른 하나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인생들은 현실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사는듯해도, 초현실적인 의미로는 다른 공간에서 살게 된다. 실제로 마주칠 일도, 뭔가를 공감할 일도 그만큼 소멸돼 가는 것이다. 결국 둘 중 하나는 당신의 인생이 될 것이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비난을 많이 하는 습성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불가능에 집착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는 불가능이란 문 앞에 딱 달라붙어 주변에 널린 가능성들은 잊어버린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열쇠를 발견하지 못하고, 똑같은 곳으로 통하는 옆문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길을 안내해주려는 사람의 말에 헛소리라며 비난한다. 반면, 열린 가능성을 자주 발견하며 사는 사람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을 수도 있고, 옆문을 발견해서 건너갈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의 안내를 들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항상 가능성을 발견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만을 바라보고 있을 시간이 없다. 항상 긍정적인 사람은, 좋은 것을 발견하느라 나쁜 것을 비난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고 싶은가? 비판하지 않으면 된다. 정 비판하고 싶으면, 자신의 ‘비판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비판하라. 그 외의 유익한 비판이란 이제까지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RECOMMENDS-Click-

추천수2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