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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12 / 불화에서 일어난 화려한 반란

정병모 |2006.09.02 23:56
조회 310 |추천 1

풍속화의 성과를 반영하여 새로운 도상을 제시한 .『불성대보 부모은중경』 용주사간, 1795년.  (이미지 출처 : 한국의 풍속화)

 

 

불화에서 일어난 화려한 반란


 

     “그 때에 세존께서 대중을 거느리시고 남방으로 나아가시다가 마른 뼈 한 무더기를 보시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하시어 마른 뼈에 예배하셨습니다.”


   부처님이 마른 뼈 무더기에 오체투지를 하였다. 제자가 물었다. 왜 뼈 무더기에 절을 하십니까? 뼈에는 백골과 흑골이 있는데, 어머니는 아이를 낳느라 피를 많이 흘리기 때문에 뼈가 하얗게 된다. 이 뼈는 백골이기에 어머니의 고통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예배한다고 부처님이 대답하였다. 문제는 “오체투지”라는 구절이다. 오체투지는 팔, 다리와 머리를 땅에 대어 자신을 한껏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행위이다. 분명히 경전에 세존이 오체투지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고려시대인 1378년 이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불설대보 부모은중경』의 에서는 부처님이 합장을 한 채 단지 고개를 숙이는 정도로 그쳤다. 차마 부처님을 땅에 엎드리게 하지 못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도 오랜 세월동안 고려시대의 도상을 답습하는데 그쳤다.  

 

『불설대보 부모은중경』, 1378년, 보물 제 705호, 삼성미술관 리움.

(이미지 출처 : 한국의 풍속화)   

 

    그런데 1795년 용주사에서 간행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의 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드디어 경전 내용대로 부처가 땅바닥에 오체투지한 것이다. 기존의 권위에서 탈피하여 참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이다. 경전의 내용대로 부처님이 엎드리는데는 무려 400여 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아울러 부처님의 겸손한 행위를 강조하는 광배의 빛이 강렬해지고, 그 주의의 제자들이 많아지며, 구름도 훨씬 장식적으로 표현되었다.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미지 출처 : 조선시대 풍속화)
 

    이처럼 '화려한 반란'을 주도한 이는 김홍도로 생각된다. 이 판화의 밑그림을 누가 그렸는지에 대한 기록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의 양식이나 간행 당시 용주사의 상황으로 보건대, 김홍도가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변상도를 김홍도가 그렸을 것으로 보는 가장 큰 이유는 가 김홍도의 과 유사한 구성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마름모꼴로 이루어진 권속들과 구경꾼, 땅에 엎드리는 부처님과 씨름꾼, 왼쪽 위 두 명의 제자와 오른쪽 아래 두 명의 구경꾼의 놀라는 표정, 가운데 아래의 등을 보인 제자와 소년 등이 상응된다. 풍속화가 불화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고려시대 이후 400여 년 동안 그다지 변하지 않던 의 구도가 용주사판에서 과감한 변신을 이룬 것이다. 만일 밑그림의 작가가 화승이라면, 이처럼 과감한 변화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홍도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도석화에 풍속화적인 기법을 적용한 화가도 김홍도란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용주사 대웅전 삼세불화, 1790년 (이미지 출처 : 단원 김홍도>

     이 변상도를 김홍도가 그렸을 것으로 보는 또하나의 이유는 그가 1790년 용주사의 불화 제작에 주관 감동(監董)한 사실이다. 수원지령등록에 보면 후불탱을 김홍도가 감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대웅전에 걸려 있는 탱화가 김홍도가 당시에 그린 그림인지 아니면 20세기 초에 그린 그림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그 논의의 가장 큰 논점은 입체적으로 그린 서양화법이다. 몸과 옷에 음영을 넣어 이전의 불화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몸의 음영법은 당시 청과의 교류관계나 등 당시의 예를 비추어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옷주름의 표현이다. 예를 들어 대세지보살 중 치마 부분의 옷주름 표현을 보면, 흰색 안료로 하이라이트를 나타내었다. 이러한 표현은 18세기 후반의 그림에서는 아직 찾아볼 수 없고, 서양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된 20세기초에나 가능한 일이다. 이 때문에 원래 18세기 후반의 그림을 일제감정기 때 서양화풍으로 개채하였다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육안에 의한 논의로는 한계가 있고 엑스레이 촬영 등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설사 18세기 후반의 그림이라 할지라도, 김홍도는 감동역으로 참가했기 때문에 직접 붓을 댓다기 보다는 전체적인 구상과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몇몇 책에서 처럼 김홍도 작품으로 명기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용주사 대웅전 삼세불화 중 대세지보살. 붉은 치마 부분에 흰색 안료로 하이라이트를 표시한 방식은 20세기 이후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용주사 일을 마친 뒤 김홍도는 연풍현감으로 부임해간다. 그런데 앞글에서 설명하였듯이 3년만에 불명예스럽게 해직된다. 그래도 해직된 그해에 바로 원행을묘(園幸乙卯)의 행사에 동원된다. 워낙 정조의 신임을 받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원행을묘의 행사는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지금의 수원인 화성에서 베픈 잔치이다. 이 행사를 개최한 이유에 대해서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은 일은 유명하다. 어떻게 왕자가 자신의 부모의 지시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신하들의 당파싸움에 희생을 당한 것이다. 신하의 권력이 오히려 왕권을 좌우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할아버지 영조에 이어 등극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불행을 교훈 삼아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친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수원에 새 수도인 화성을 건설하는 계획이다. 겉으로는 철저히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참배하러가기 위해 그 주변 지역에 임금이 머물 행궁을 짓고 성곽을 쌓는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유교국가에서 효를 내세우는 일엔 반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수도를 화성으로 옮김으로써 한양에 기득권을 갖고 있는 신하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정략이 깔려 있다. 많은 비용이 드는 화성 건설의 정당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건설하는 도중인 1795년에 현륭원이 있는 화성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벌이는 것이다. 마침 이 해는 정조가 즉위한지 20년이 되는 때이기도 하다. 1795년 을묘년에 임금이 잔치를 위해 현륭원에 행차하였다는 의미로 "원행을묘"라 한다. 

 


           호암미술관 소장 (이미지 출처 : 단원 김홍도)

 

     아무튼 김홍도는 불명예스럽게 해임되었지만, 정조는 바로 김홍도를 화성에 급파하여 이 행사 내용에 대한 백서인 의 도설을 맡아 그렸다. 또한 김득신, 최명현, 이명현 등과 함께 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병풍은 원행을묘의 행사를 8폭의 화폭에 그린 것으로, 조선시대 궁중기록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그림 역시 풍속화가 기반이 되었다. 이전의 형식적인 기록화와 달리 자유로운 흐름과 구경꾼들의 생활상이 담긴  총합적인 풍속화로 그려진 것이다. 그 배경의 산수는 금강산 사행부터 시작한 조감법의 시점에 스펙타클한 공간 속에 담고 있다. 김홍도가 당시 화성의 가을 풍경을 그린 의 에서도 금강산그림처럼 장대한 스케일의 공간이 펼쳐져 있다. 이 작품은 얼마전 애석하게도 불타버린 서장대와 주변의 풍광을 그린 것이다. 

 

          김홍도 서울대박물관 소장. (이미지 출처 : 우리 땅 우리 진경)

 

       김홍도의 그림에서는 풍속화와 진경산수화가 모든 그림의 근간이 되고 있다. 풍속화는 신선도와 불화와 같은 도석인물화와 궁중기록화에까지 활용되고, 진경산수화는 궁중기록화의 배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풍속화와 진경산수를 통해 쌓은 그의 회화적 역량은 그의 창작 작업의 든든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용주사판 에서 일어난 조용한 반란도 풍속화처럼 어떤 권위에 얽메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 정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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