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그윽하게 깊었고, 불어오는 바람결은
이미 잔인한 가을을 닮아있었다.
우리는 그 잔인한 흐름을 타고 여름의 장벽을 넘어
갇혀진 공간의 놀이터 의자에 앉았다.
밤하늘은 높고 지루했으며, 쾌청했다.
가을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밤하늘 같은 너의 눈동자는 까맣게 영글었고,
나는 그 눈동자에서 별을 따려 손을 뻗었지만
나는 그 눈동자에 이는 혼돈과 견딤의 불꽃을 보았다.
너는 강건한 척 말쑥이 견뎌내고 있지만
재로 만든 성(城)에 사는 너를 나는 잘 알고 있지.
손만 닿아도 무너지는 재로 만든 성(城).
하지만 그 성에서 나올 수 없는 너와 너의 현실.
내 젊은 날의 꿈이자 열정이었던 너의 얘기는
꿈의 대화처럼 감미롭고 향기로워야 할 텐데
그악하기만 했던 너의 삶 속에 나는 또 견딤을 배우며,
자꾸만 붉어지는 눈시울에 너의 곁을 지키지 못하고,
혼자 일어나 갇혀진 공간을 베슥베슥 겉돌며
모래에 너의 행복을 썼다 지운다.
가눌 수 없는 슬픔은 오로지 갇혀진 공간과
바깥 현실의 괴리를 넘나드는
도둑고양이에게만 맡기고,
메마른 모래에 떨어지는 눈물 한 조각.
나는 한참동안 그네를 타다 그 반동력으로 다시
너에게 튕겨져 갔지만 여전히 혼자 움직이는 그네를 보며,
어쩌면 너와 내 삶도 저렇게 혼자 움직이는 그네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짐작해 본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토해낸 한마디,
너를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여라. 아주 온전히.
나는 죄인인지라 꼿꼿이 너를 바라보지 못하고
훔쳐만 보지만 그렇게 훔친 것이
비단 너의 모습만은 아니리라.
내 소매 끝에는 훔친 눈물의 흔적이.
내 뒷덜미에는 사무치는 그리움의 흔적이.
내 뒤꿈치에는 돌아서는 아쉬움의 흔적이.
고스란히 훔쳐져 나를 옥죄인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고,
산짐승이 산을 떠나 살 수 없고,
사람이 사람을 떠나 살 수 없다지만
나는 너를 떠나 이렇게 모질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모진 생존의 대가로 네게 했던 약속대로
나는 오늘 너의 슬픔을 아주 조금이나마
내 등에 이고 간다.
네 안에 쌓인 가늠할 수 없는 서글픔과 서러움은
내가 이고 가마, 재로 만든 너의 성(城)이 무너지기 전에.
돌아서는 너의 등 뒤로 나는 빈 깡통 같은 목소리로
네가 절대로 알 수 없는 진실 하나를 말하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뿌연 연기를 뒤로 하고 사라져간 길은 걸었다.
귀뚜라미 여치 풀벌레 소리가 무성한 밤길을
나는 끝없이 걸으며, 진부하기만 한 시한부 인생의
마침표에 대해 기대해보았다.
언젠가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는가,
내 삶이 길지 않기를 바라지만 너희들의 죽음을
내가 직접 받아주고 나 역시 떠나고 싶다던 말을.
망자는 말이 없지만 나는 그 망자의 몫까지
깊이 슬퍼하고 울며 언제까지나 돌아서는
너희들의 뒷모습을 바라봐주고 싶다던.
풀벌레 소리가 무성했던 정겨운 흙길이 끝나고
끝없이 펼쳐진 지루한 검은 아스팔트 길.
내 인생의 흙길은 끝나고 내 앞에 남은 건 아스팔트뿐이다.
너와 갇혀진 놀이터에서 은은한 가을빛을 내며 빛나던 별들이
빛을 잃어간다, 빛을 빼앗겨간다.
아침이 밝아온다. 별의 빛을 가리며. 빛을 죽이며.
내 젊은 날의 꿈아, 정열아, 빛을 잃지 마라,
세상 어디에서도 내가 너를 찾을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