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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 젊은 날의 우상

이재문 |2006.09.12 20:49
조회 73 |추천 0


 

 

 

 

 

 

 

 

 

 

 

 

 

 

 

 

 

 

 

 

 

 

 

 

 

 

프로듀서 일을 한다는 것은 한명씩 젊은 날 우상을 잃어가는 과정 일지도 모른다.

내가 프로듀서로 출발하던 70년대 후반은 가요사에 남을 황금기였다.

이미자 김추자 펄시스터즈 윤복희 조영남 양희은 트윈폴리오 남진 나훈아 하춘화….

숱한 스타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스타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즐거움이었지만 그들을 가까이서 보며 그 전의 꿈을 잃는 건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내내 나를 매료시킨 우상이 그들 속에 있었다.

패티김.

나는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그 도도하고 당당함에 압도당했다.

당시 쇼 프로그램 조연출자였던 나는 그녀에게서 범접하기 어려운 신비의 카리스마를 느꼈다.

노래속에는 타고난 천재성이 있었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목소리는 국악을 통한 음악수업으로 더욱 탄탄하고 농염했다.

패티김의 히트송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오랫동안 영혼을 적시는 노래였다.

연출자가 출연가수를 우상으로 생각한다는 발상이 비상식적이라 할 사람도 있겠지만, 젊은 날 패티김은 내 최고 우상이었다.

그 우상이 베일을 벗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 기회가 딱 한번 있었다.

94년 5월 도쿄에 있던 길옥윤(패티김의 전남편)씨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길옥윤씨가 암으로 2∼3개월을 넘기기 어려운 시한부 인생이라고 했다.

나는 일본으로 달려갔다. 길옥윤씨는 죽기 전 마지막 소원으로 귀국 콘서트를 하고 싶다면서 패티김이 함께 출연해 주기를 원했다.

94년 6월19일 「길옥윤 이별 콘서트」는 음악 콘서트라기보다 긴 이별 끝에 만난 두 사람의 화해와 용서의 다큐멘터리였다.

생방송 15분전.

몇년만에 만난 두 사람.

패티김은 『시시하게 아프고 그러느냐』며 가볍게 질책했다.

심하게 흔들리는 감정을 컨트롤하는 코멘트였다. 죽음을 앞두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길옥윤씨를 보고 게스트 가수들은 흐느껴 울었다.

그러나 패티김은 얼핏 눈물이 비칠 것 같으면 카메라를 피해 돌아서서 노래를 불렀다.

방송이 끝난 뒤 패티김의 분장실은 잠겨 있었고 30분 가까이 누구도 그 분장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절제력이 한꺼번에 무너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비로소 도도한 스타에서 가슴 따사로운 여인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패티김은 이제 가수 데뷔 40년이 가까워 왔고, 나도 24년째 연출생활을 하고 있다.

얼마전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패티김은 아직도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날씬한 몸매도 여전히 처녀 같다.

내가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물었다.

『모르고 있었어요? 가수가 된 뒤로 아직까지 배부르게 먹어 본 적이 없어요.음식 한번 마음껏 먹는 게 소원이에요.』 한끼쯤은 괜찮지 않느냐는 내 유혹을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

저녁으로 야채나 과일만 먹고 견디는 게 고통스러워도 팬들을 위해 청바지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프로듀서는 우상을 잃어가는 대신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직업이다.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냈지만 젊은 날 내 우상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패티김처럼 깨지지 않는 우상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이남기 SBS 예능국장. 1997.>

 

▷패티 김◁

59년 미8군 쇼로 데뷔한 패티김(본명 김혜자 59)은 보기 드문 대형 가수로 폭발적인 가창력을 보여줬다. 작곡가 길옥윤과 호흡을 맞춰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던 그는 가수생활 38년동안 「4월이 가면」 「빛과 그림자」 「서울의 찬가」 「이별」 「사랑하는 마리아」 「못잊어」 「가시나무새」 등 수십곡의 히트곡으로 사랑받았다. 96년에는 대중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훈장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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