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살에 대하여
김경현 - 2006 여름
몇달 전이었을 거다.
여느 때와 같이 사람들과 와글와글한 하루를보내고에
홀로 침대에 누워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난 문득 내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아우성이
곳곳에 형체도 없이 산재해 있는 까닭일 수도 있다.
하지만 큰 이유 없이 갑자기 그리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동경은 반드시 그러한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아직 젊고 뭐.. 건강합니다 하고 내세울만큼은 아니지만,
죽음과는 거리가 먼, 살아갈만한 수준의 건강을 가지고 있다는
현대인들의 육체적 오만을 나도 역시 가지고 있다.
때문에 어느 순간 ‘죽자’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충동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아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개개인은 누구나 그 자신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가 누구인가?
적어도 내 자신에게 나는 존재하는 단 하나의 가치다.
날로 성장하는 신체적, 정신적 단계를 함께 하였으며
이제 또 다시 노쇠와 완숙의 경지를 향해 가야 할 존재가 아닌가 말이다. 따라서 내게 있어 나 자신의 것은 그 어떤 사소함일지라도 절대로 의미 없는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문득 찌는 여름의 어느 날 놀랍게도,
혹은 습관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자살은 너무도 많은 공간에서 내게 유혹의 손길을 뻗어온다.
굳이 빈곤함이나 외로움, 의욕상실 등등의 거창한 이유를 붙이지 않더라도 그 유혹은 너무 매혹적이다.
선택적 죽음이라는 건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시대를 한탄한 충신의 죽음이나 부당한 대우와 권력에 대항한 열사의 분신 같은 것을 뒤로하고 보더라도 죽음, 특히 선택적 죽음, 즉 자살은 이미 일반적인 행동이 되어버렸다.
성적을 비관한 초등생이 아파트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불륜관계의 한 쌍이 승용차 채로 강물로 뛰어든다.
실직한 아버지가 농약을 마시고
강간당한 여성이 목을 맨다.
고참들의 가혹행위를 못이긴 군인이 총구를 입에 물고
실연 당한 이가 욕조에서 손목을 긋는다.
그렇다면 이런 자살은 어떻게 차별되어야 할까.
성서에서는 신의 창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신만이 관장할 수 있는 죽음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이유로 자살은 이미 죄악이다.
사실 생명이라는 것은 내가 원해서 갖는 것이 아니니 원해서 죽는 다는 것은 분명 죄악일 수도 있다.
죽음 자체를 미학적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미디어의 안내에 따라 자살자들은 개인의 특성에 맞추어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상태로 죽는다.
그러나 죽음 뒤에는 그런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 단지 죽었다와 죽지 않았다가 존재할 뿐이다. -
가스 밸브를 열어놓고 전화벨이 울리길 기다리던 손목을 긋던.
나는 자살을 할 때 분명 손목을 긋거나 수면제를 먹을 것이다.
가스를 이용하는 것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목을 조르기엔 천장이 너무 낮다.
투신하기 좋은 고층 건물도 아닐뿐더러 빠져
죽을 만한 깨끗한 물도 찾기 힘들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손목을 그을 땐 따듯한 물에 손목을 담가야
기분이 좋다는데 난 그 핏물을 보고즐길만큼의 간덩이도 없고
죽을 만큼 수면제를 사 모을 끈기도 없다. 그러고 보면 자신을 위해 자신의 육체를 폐기해버리는 과정도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아니, 내가 죽음을 겁내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누구나 처음부터 자살이 최선이다 라고 생각지 않는 것처럼
내게도 다른 최선이 분명히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적엔 내 인생의 서른이란 오지 않을 줄 알았다.
20대의 불같은 청춘을 겪고나면,
인생은 사그라드는 것인줄 알았다.
“ 청춘은 반항에 기본 틀을 두고 있어. 반항이란 열정에서 출발할 수 있는 거잖아. 열정은 젊을 때 나올 수 있는 거야. 난 이십 대 이후에 삶은 열정이 없는 삶이라고 생각해. "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의 나이는 스물 셋이며 오 년 후, 아니 사년 일 개월 후 혹은 만으로 따져서 사 년 칠 개월 후가 되더라도 물론 살아있을 것이다.
사 년이란 시간은 너무 짧다. !!!
어쩌면 어린 날의 내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나를 보게 된다면 변절자 쯤으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린 날의 논리는 궤변이었고 ‘개변’이었다.
그것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아직까지 내게 남아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난 여전히 아웃사이더고 타자이며 서툴다.
하지만 정열이 서른이 넘은 나이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이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구분하는 것뿐이다.
동경하는 자살은 비겁하다. 자살은 분명히 굴복을 요하는 세상에 마지막으로 꺼내 들어야 할 싸움의 수단이다.
알베르 까뮈의 말대로
‘자살한다는 것은 쉽사리 지지는 않겠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
인 것이다.
난 그런 의미로 내가 가지고 있는 자살에 대한 동경을 멸시한다. 물론 다른 이의 경우 그 죽음이 어떤 경로를 거쳐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판단할 수 없지만. 나의 경우 어쩌면 세상과 치열하게 맞장 한번 떠보지 않고 손쉽게 숨어보겠다는 비열한 행동에 다름아니므로.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우리는 때때로 죽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나와 세상의 괴리가 여전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만큼 세상의 압박은 더 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어설프게 타협하진 않을 것이다.
숨기 위해 죽음을 택하지도 않을 것이다.
비록 세상이 내게 존재할 공간을 허락지 않아 거리로 혹은 그보다 못한 곳으로 떠돌더라도
온갖 미디어들이 모두 죽음으로 이르는 길을
아름답게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한여름의 선선한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내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
살갗 속 혈관을 지나고 있는 내 피는 아직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