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 저, 푸른숲, 2005
- 긴급구호는 한마디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신속히 살려내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병원으로 치자면 응급실쯤 되겠다.
- 때에 따라서는 반드시 싸워야 하는 '쌈닭 허가증'을 받는 것.
- "재미있는 세계 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긴급구호를 하세요?"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만들기 때문이죠."
- 오늘도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가벼운 바람에도 성난 불꽃처럼 타오르는 내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소진하고 소진했을지라도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기꺼이 쏟고 싶은 그 일은 무엇인가?
- 아, 아프가니스탄!
이 나라와 나는 무슨 인연이 이다지도 깊은걸까.
1996년 초겨울 나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헤라트에 있었다. 무장한 탈레반이 거리를 활보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아이들만은 세상 여느 아이들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놀고 있었다.
따뜻한 햇볕 아래서 남자아이들에게 태권도 기본 동작을 가르쳐주고, 여자아이들에게 삼색 볼펜으로 꽃반지를 그려주면서 한참을 재미있게 놀았다. 그러나 어른들은 좌불안석. 외국인과 무슨 내통을 했느냐고 탈레반에게 트집을 잡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눈총을 견디가 못해 그곳을 떠나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지뢰로 왼쪽 다리와 오른팔을 잃은 여자아이가 까만 눈망울을 반짝이며 수줍게 빵을 건넸다.
얼마 만에 생겼는지도, 언제 다시 생길지도 모르는 귀한 식량을 자기와 잠깐 놀아준 이방인 친구에게 주고 싶은 거였다.
한순간 망설였다. 이 빵을 아이가 먹고 배가 부른 것이 좋을까, 내가 우린 친구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게 좋을까. 잠깐 망설임 끝에 빵을 받아 한 입 덥석 베어 물었다. 같이 있던 아이들이 손뼉을 치고 어깨춤까지 추며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그날 나는 앞으로 내가 할 일을 결정했다. 이 여행이 끝나면 난민들을 위해 일하리라고. 특히 아이들을 위해 나를 아낌없이 쓰고 싶다고.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첫 파견지는 바로 6년 전 그 아이들을 만났던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였다.
- 벼랑 끝에 손끝만 걸고 매달려 있는 이들을 잡아 끌어올려주고 싶다. 아, 그런 힘이 내게 있기만 하다면…….
- 진심어린 배려, 도전 정신, 그리고 칭찬과 격려 내게도 이것이 습득되어지길…….
- 로즈는 나를 한 번 껴안아주고는 얘기를 시작했다.
첫째는, 우리 팀이 쿠차마을에서 너무 울더라는 거다. 처음으로 그런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으니 그 눈물을 어떻게 참을 수 잇겠냐만, 구호 요원이 주민들 앞에서 너무 놀라거나 우는 등 감정에 휩쓸리면 오히려 현장 활동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란다.
둘째는, 식량 배분 계획이 없는 곳을 방문할 때 우리가 식량을 가져다줄 거라고 오해할 수 있는 행동이나 말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 그것은 주민들에게 헛희망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단체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란다.
- 바닷가에 사는 한 어부가 아침마다 해변으로 밀려온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져 살려주었다.
"그 수많은 불가사리 중 겨우 몇 마리를 살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동네 사람의 물음에 어부는 대답했다.
"그 불가사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진 거죠."
이것이 내 마음이다. 그리고 전 세계 긴급구호 요원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현장으로 떠나기 얼마 전에 받은 이메일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당신들이 목숨 바쳐 일한들, 아프가니스탄에서 고통받는 사람 전체 중 얼마를 돌볼 수 있느냐, 잘 해봐야 10만 분의 1도 구제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면 맥이 빠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되새긴다.
- 말라위와 잠비아, 기근 구호가 절박한 남부아프리카 6개국 중 두 나라다.
긴급구호를 시작하고부터 아프리카의 키워드가 내전, 굶주림, 대규모 난민, 막대한 외채, 그리고 에이즈 등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 "만약 인질로 잡히면 여러분 몸값이 얼만지는 잘 알죠?"
잘 알고 있다. 긴급구호 요원의 몸값은 0원이라는 것을. 우리 단체는 납치범들과 몸값 협상을 하지 않는다. 납치 세력이 인도적 지원을 원하면 무엇이든 들어준다. 구호 단체인 우리가 아군이건 적군이건 굶어 죽는 사람, 아파 죽는 사람들에게 식량과 약품을 갖다주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질 석방의 대가로 돈을 요구할 때는 절대 응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 후원자가 한 푼 두 푼 모아준 후원금으로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구호 단체 직원을 인질로 잡아 몸값을 뜯어내는 그런 세력에게 돈을 주면 그 집단의 힘이 점점 세져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도우려는 사람들을 더욱 괴롭히게 되기 때문이다.
- "꼬미야, 세상의 60억 인구 중 30억이 끼니 걱정을 하는 사람이래요. 그러면 여유 있는 30억이 한 사람씩만 맡으면 끝나는 거 아니에요?"
이제 한 술 더 떠 세계 빈곤 문제 해결책까지 내놓는다. 한달에 2만 원으로 하는 살이 잇는 세계화 교육, 짭짤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가방에 해외 아동 후원 신청서를 늘 가지고 다닌다.
- 월드비전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전쟁 고아와 미망인을 돕는 일로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한경직 목사님이 아이들을 돌보시고 밥 피얼스 목사님은 외국에서 필요한 자금을 모아 오셨다. 이렇게 작은 규모로 출발한 긴급구호 팀이 지금은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약 1억 명의 사람을 돌보는 세계 최대의 기독교 구호 및 개발 단체가 된 것이다.
나도 월드비전에 드러와서야 알았다. 전쟁이 끝난 후부터 1990년까지 우리 나라에 들어온 해외 원조 총액이 무려 25조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월드비전 내에서도 수혜국에서 완전한 지원국이 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 공적개발원조(ODA)란 잘사는 나라가 가난한 나라의 자립과 발전을 위해 지원하는 자금인데, 한 나라의 도덕 지수를 나타내는 지표라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1987년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무상원조와 유상 원조가 있는데, 전자는 한국국제협력단을 통해, 후자는 수출입을 통해 지원된다.
그러나 한국이 해외 원조에 인색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원조 받은 액수는 총 130억 달러 정도이고, 지금까지 원조한 총액은 약 22억 달러다. 갚아야 할 '은혜의 빛'이 이렇게 많은데도 우리는 국민 총소득의 0.06퍼센트, 1인당 한 달에 4백 원 정도를 원조금으로 내고 있다.
단번에 OECD 국가 평균치인 0.23퍼센트까지 가는 건 어렵더라도, 경제 규모 세계 13위라는 한국의 위상과 국력에 걸맞으려면 최소한 0.1퍼센트로는 올려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 나 혼자 촛불 하나를 들고 있다고 해서 그 어둠이 걷힐 리 만무하다.
하지만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초에 불을 붙이고, 그 불을 옆 사람에게, 또 그 옆 사람에게, 초가 타고 있는 한 옮겨주고 싶다. 그래서 내 주변부터 밝고 따뜻하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