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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

하정완 |2006.09.18 11:10
조회 82 |추천 0


 

 

나니아 연대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1940년 세계대전 당시 런던 대공습을 배경으로 한 영화 는 C.S 루이스가 쓴 매우 중요한 환타지 작품입니다. 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런던 공습을 피해 한적한 마을 디고르 교수가 사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그 형제들이 숨바꼭질 하다가 우연히 막내 루시가 들어간 곳이 옷장이었는데, 그 옷장은 나니아 나라로 가는 마법의 옷장이었습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얼음 왕국 나니아, 원래는 아슬란이 창조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하얀 마녀 제이디스가 다스리는 곳으로 봄도 크리스마스도 없이 겨울만 계속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희망이 없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나니아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담의 두 아들과 이브의 두 딸이 나니아 나라에 나타나 하얀 마녀를 물리치면 나니아에 평화가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설에 의하면 네 형제는 나니아 나라의 네 지역을 통치하는 왕들로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평범한 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나니아나라가 하얀 마녀의 마법에서 풀려날 수 있는 방법은 나니아를 창조한 아슬란의 도래가 전제되긴 하였지만 아담의 아들들과 이브의 딸들이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일하기 왕적인 존재들로 활동하기 시작할 때부터엿습니다.

 

이같은 세상에 네 형제 중 막내인 루시가 숨바꼭질 놀이를 하면서 옷장에 숨었다가 나니아로 들어오면서 네 형제가 모두 들어오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네 형제의 등장은 하얀 마녀의 지배를 벗어나 아슬란이 통치하는 나라가 회복되길 기대하는 나니아 백성들에게는 큰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네 형제들은 자신들이 나니아 나라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전혀 가늠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왕적 존재라는 것은 더더욱 모를뿐 아니라 나니아가 갖고 있는 기대에도 별로 관심이나 기대도 없습니다. 여전히 첫째 피터, 둘째 수잔, 셋째 에드먼드 그리고 막내 루시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아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들이 나니아로 들어왔지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의 탄식스러운 상황을 이기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의 도래이지만 그 사역은 하나님의 아들들, 곧 왕적 자녀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도래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롬8:19)

 

그런데 우리들이 이 사실을 모르듯이 네 형제도 이것을 모릅니다. 자신들이 왕적인 존재임을 모릅니다. 하지만 나니아의 통치자 하얀 마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왕적 존재이고 그들이 일하기 시작할 때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세상이 무너질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나니아로 들어온 에드먼드를 구슬려서 나머지 형제들을 유인한 후 모두 없애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를 때 우리는 그저 동물적인 본능을 따라 살 위험성을 갖습니다. 영화에서 우리는 셋째 에드먼드를 통하여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첫 번째로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육체적 욕심을 따라서 사는 삶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하얀 마녀가 에드먼드가 제일 먹고 싶어하던 터키 젤리로 유혹합니다. 정말 먹고 싶었던 터키 젤리를 먹게 된 에드먼드는 터키 젤리에 눈이 멉니다. 그의 터키 젤리를 먹고 싶은 유혹은 결국 자신들을 도우며 나니아의 회복을 꿈꾸는 톰누스를 잡혀가게 만들고 심지어는 형제들까지 배신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합니다. 터키 젤리가 너무 먹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터키 젤리, 아무 것도 아닙니다. 먹고 나면 없어져 버리는 것, 뿐만아니라 언제까지나 유혹할 수 있는 과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에드먼드에게 절대적인 것, 그것이 터키 젤리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를 견딜 수 없게 유혹하는 것은 터키 젤리와 같은 것입니다. 작게는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TV의 드라마일 수도 있고, 담배일 수도, 성적인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얄팍한 명예일 수도 있고, 견딜 수 없는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빼앗기면 그것을 빼앗으려고 눈이 뒤집어집니다.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터키 젤리는 무엇입니까?

 

문제는 우리가 터키 젤리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할 때 우리는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살다가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피조물의 탄식을 듣고 반응하고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고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 이루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단순히 인간으로 사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터키 젤리의 유혹에 깊이 빠져 가면 갈수록 더 깊은 죄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교묘하게 사단은 그것을 이용합니다.

 

영화에서도 에드먼드는 터키 젤리는 먹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하여 저지른 범죄함이 그를 영원한 댓가를 치러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합니다. 늘 죄는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터키 젤리를 놓는 법, 우리는 민감하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에게 충분히 터키 젤리를 먹게된 것만으로 기뻐할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왕적 존재로 회복하고 사는 것이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세마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 왕좌에 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벌어진 사건의 실체를 모르고 삽니다. 여전히 터키 젤리를 얻기에 급급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우리 목적은 터키 젤리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이 우리의 추구점입니다. 우리는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적 존재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적 존재로서 삶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원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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