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 위안부 여성의 이야기들 - 정서운 할머니 이야기
15세 일본 방직공장에 가면 아버지가 석방될 것이라는 말에 정신대로 동원이 되었다.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대만, 뉴기니아, 스마트라, 마랑 등지에 배치되었고, 자카르타 육군병원에서 모든 여성들의 자궁 속에 뭔가를 넣었다. 아랫배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가운데 3일 동안 하혈을 하였다.
나는 23명 정도의 여성과 마랑의 육군 부대에 배속되었다. 한 위안소에 여자가 20∼30명이 있었던 것 같다. 하루 평균 50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50명 이상을 상대하다 보면 지치고 기절할 때가 있다. 그럴때면 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한 후 다시 군인을 상대하게 했다. 그래도 성기가 부르트고 도저히 아파서 걸음도 걸을 수 없게 되고 더 이상 군인을 상대할 수 없게 되면 주사를 팔에다 놓아주었는데, 알고 보니 마약주사였다.
토·일요일에는 100명도 넘는 군인들을 아침 9시부터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시작하기 전부터 4∼5대의 마약주사를 맞혔다. 그래서 지금도 내 양쪽 팔은 이렇게 흙덩이로 뭉쳐놓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이것 때문에 지금도 피가 잘 통하지 않는다.
일본이 항복 직전 폭격당할 때, 나와 함께 같이 있던 위안소의 23명의 여성들 중 14명은 죽고 9명만 생존해 있었다. 일본군인들은 여성들이 몸이 병들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죽여버렸다. 그러던 와중에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패전이 임박하자 우리를 방공호에 가둬서 아마도 몰살하려고 했나보다. 이 사실이 연합군에게 알려져 우리는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이미 마약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결심했다.
'일본 놈들에 의해 마약중독자가 되었는데 돈을 들여 마약을 사먹을 수가 없다고...'
그래서 혼자서 두문불출하고 마약을 7개월만에 끊었다.
-이 글은 김성란의 "역사 속의 여성의 고난에 대한 여성 신학적 접근",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01 논문에 나온 실화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인권수업 발제로 인해, 정신대관련 책과 논문을 찾고 읽어보고 있는 중이다.
이 땅에 수많은 신음소리, 고통소리가 역사의 현장가운데 많이도 묻혀왔다는 걸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아프고, 그 소리들의 대변자가 되고픈 생각이 들었다.
일제침략기때 동남아시아의 일본군들이 700만 정도로 추정된다. 그 군인들이 고향생각하며 여자생각하니 이들을 위해 종군위안부를 동원하자는 일본의 생각은 남자 30~40명 가량 한 여자를 붙여주자는 식이었다. 종군위안부의 숫자는 통계가 불가능하나, 이 자료를 토대로 보면, 동남아시아의 식민지에서 가려낸 여자의 숫자는 20만으로 추정된단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우파세력은 이 좋은 제도는 세계 어느나라에서 찾기 어려운 제도로, 일본에서만 있는 좋은 제도라 생각했단다.
이에 대해서 일본은 반성하지 않았고, 한국으로 매춘관광이나 오게 되자, 여기에 대해 한국기독여성단체가 이 문제를 해결코자 조사해보니, 이 기원이 일제때 정신대 관련해서였다. 정신대 문제가 국제적으로 해결이 안되니, 일본은 현대에 와서까지 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1980년에 이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종군위안부 문제가 대두되었다. 인권의 유린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이 없는 약자일수록 경우가 심하다. 특히나 약소국의 여성과 어린이, 노약자 등...
역시나 늘 느끼는 거지만, 정말 예수님은 대단한 개혁가셨다. 인권이 가장 많이 유린당하는 계층들의 사람에게 겸손한 왕으로 오셨으니 말이다.
아직도 일본은 역사에 대한 진정한 사과의식이 없는 상태로, 이제는 독도문제로 인해 국제사회에 자신의 국가력으로 밀고 늘어지는 태도를 보면 정말 얄밉고 화가 날 지경이다. 이런 문제들이 없을려면 비정부단체들이 큰 힘을 써야되는데, 아직도 강대국 사이에서 힘을 얻지 못해 약소국의 인권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하니 통탄할 현실이다.
-2005.04.11 일기
*그림: 일제시대 위안부로 끌려가셨던 할머니 한 분의 작품